[연재]오스트리아 제국 인물 열전[카를 대공-벨기에편 3장] 가난한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빛과 희망, 벨브뤼크 대주교(feat. 리에주 왕립 미술대학을 남기다)
<주요 등장인물 3인 소개>-1781년 기준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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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사실상 양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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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사실상 양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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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사실상 양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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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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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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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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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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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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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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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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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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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지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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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K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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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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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크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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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시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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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Ch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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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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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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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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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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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람쥐 샤를'은 성인이 된 카를 대공의 키가 작다는 제보를 코겐인님께 받아서 '귀엽다'는 의미를 부여해서 제가 붙인 별명입니다.
<벨기에편 2장 내용 요약>
1. 오스트리아령 벨기에의 3대 도시
1) 브뤼셀: 베르사유 귀족 대상으로 하는 사치품(레이스, 테피스트리, 가구) 산업 발달
2) 안트베르펜: 지정학적 요충지. 영국 입장에서 절대 프랑스에게는 내줄 수 없는 벨기에 최대 항구
3) 겐트: 벨기에의 옛 수도. 15세기 제작된 반 에이크 형제의 <겐트 제단화>가 있는 곳
2. 요제프 2세가 <겐트 제단화>를 이상하게 손대서, Mimi 여대공에게 큰 충격을 주다.
<겐트 제단화>는 5×3.75m 크기의 앞면 8개의 panel로 이루어진 초대형 종교회화입니다. 예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습니다. <겐트 제단화>의 앞면 전체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15세기 반 에이크 형제가 12년(1420~1432)에 걸쳐 제작한, 겐트 제단화의 앞면 전체 모습입니다. 여기서 주목하셔야 할 인물은 좌측 상단의 알몸의 아담과 우측 상단의 알몸의 이브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장엄한 <겐트 제단화>를 본 요제프 2세가 "아담과 이브의 벌거벗은 모습이 외설스럽도 낯뜨겁다."라고 하면서 두 사람의 알몸에 가죽옷을 입히라고 명령해서 겐트 제단화의 모습이 아래와 같이 바뀌어 버립니다.

저는 요제프 2세가 했다는 대로 아담과 이브의 알몸을 가려 보았습니다. 전편 2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담과 이브만 보여드렸는데, 이번에는 앞면의 회화 전체적인 구도에서 시도해보았습니다. 확실히, 알몸을 가리니까 아담과 이브의 그림쪽만 문제가 아니라 전체 <겐트 제단화>의 작품성이 심하게 훼손되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뛰어난 예술가였고, <겐트 제단화>의 원래 모습과 전체 구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의 알몸을 가리면 <겐트 제단화> 전체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안 보고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룩셈부르크 시장인 베텔 시장(mayor)으로부터 "요제프 2세가 겐트 제단화의 아담과 이브의 알몸에 가죽옷을 입히라고 명령했습니다."라는 소식을 듣고 놀라 까무러쳐 기절했고, 약 2시간 뒤에 깨어났습니다.
<벨기에편 3장: 가난한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빛과 희망 벨브뤼크 대주교>
Part1. Mimi, 요제프 2세의 만행을 규탄하며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다.
▪ 장소:룩셈부르크 시청 내부, 조용한 휴식공간
Mimi: 내 오빠 조제프(Joseph)는 문화·예술을 훼손하는 탈레반이에요! 그리고 이건 나에 대한 선전 포고구요!
카를: 고모, 그래도 큰아버지(카를의 친아버지 레오폴트 2세가 요제프 2세의 친동생입니다.)에게 탈레반은 너무 심한 말 아닌가요? <겐트 제단화>에 대한 일은 안타깝지만, 고모도 좀 진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Mimi: 내가 열 받은 건 맞는데, 이성을 잃은 건 아냐! 조제프라는 first name을 가진 사람은 몇만 명이 넘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내 오빠 조제프'라고 지칭한거야. 설령 이 대화를 엿듣는다고 해도 '내 오빠 조제프'가 누군지 어찌 알겠냐고?
Tino: 그건 마리 크리스틴 여대공 말이 맞소. '탈레반 조제프'를 찾으려면 룩셈부르크, 프랑스, 벨기에(즉, 프랑스어권 전부) 다 뒤져도 못 찾을 테니까. 인정하겠소. Mimi 여대공은 분노한 와중에도 이성이 돌아가는 여성이라는 걸 말이오.
Mimi: (약간 부끄러워하며) 역시 날 알아 주시는 건 Tino 공작 뿐이군요! 그리고, <겐트 제단화>에 대한 그 분의 행위가 (1)벨기에 총독인 우리 부부에 대한 선전포고인 것도, (2)가톨릭 종교계에 대한 선전포고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에요.
카를:(침묵하면서 마음 속으로) 휴~ 고모가 진정되어 가는군. 다행이네.
Tino: 그 분께서 (1)우리와 대립관계인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 그렇다치고, (2)가톨릭에 대한 선전포고인 것이 더 문제일 수도 있겠군요.
Mimi: 네, 벨기에는 정말 유럽에서도 유별난 골수 가톨릭 지역이에요. 벨기에인의 90~95%가 가톨릭이지요. 그 가톨릭의 자랑거리를 훼손한 행위로 인해 벨기에 지역 가톨릭 성직자들은 속된 말로 '부글부글' 하고 있을 겁니다.
카를: 그럼, 일단 가톨릭 고위성직자를 만나서, <겐트 제단화>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우리(카를, Mimi, Tino)는 모두 로마 가톨릭 신자잖아요.
Mimi: 샤를, 그거 좋은 생각이네. 나와 그 분이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인건 제국령에서 알 사람은 다 아니까, 성직자 쪽에서도 최소한 우리와 '만나봐서 손해될 건 없다.'고 생각할 것 같네. 잘하면, '적의 적은 친구(적적내친)'의 원리에 따라 우호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고.
Tino: 흠, 여기 룩셈부르크에서 우리의 계획된 이동 경로는 리에주 시를 거쳐 브뤼셀로 가는 것이오. 그렇다면 리에주의 통치자이자 최고위 성직자인 벨브뤼크 주교제후(Prince-bishop Velbrück)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소?
Mimi: 어차피 리에주 시에는 들릴 예정이었고, 그럼 그 대주교님(=벨브뤼크 주교제후)과 만나는 일정만 추가하면 되겠군요. 대주교님에게는 먼저 전령을 보내 우리가 방문할 것임을 알리면 되겠구요.

Mimi의 3인 가족이 룩셈부르크 시에서 리에주로 이동하는 경로를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실제로는 거의 룩셈부르크 공국을 통과해서 가고, 리에주 주교제후령을 통과하는 구간은 상당히 짧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리에주 주교제후(Prince-bishop of Liège)가 거주했던 '리에주 대주교궁' 입니다. 리에주 주교제후는 성직자이기도 했지만, 엄연히 약 3,500㎢의 상당한 면적을 다스리는 리에주 지역의 '성직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속 군주들의 화려한 궁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규모가 있는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리에주의 정치적 업무를 관장하는 관료들을 위한 공간이 많이 필요하기도 해서 이처럼 규모가 큰 건물을 지었습니다. 여기가 마리아 크리스티나 일행이 당시 리에주 주교제후였던 62세의 F.C. 벨브뤼크 대주교를 만나기로 예정된 장소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 크리스티나 일행은 카를의 제안에 따라 룩셈부르크 시→리에주 시의 약 170km를 1781년 7월 2일에 출발, 43km/일의 속도로 이동하였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는 카를에게 리에주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Part. 2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역사와 18세기 후반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상황
1. 리에주 시 및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중세시대 역사(~1400년)
1)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시작: 972년 신성로마 황제 오토 2세가 놋커(Notker) 주교를 '주교제후(Prince-bishop)으로 임명하면서, 리에주는 '성직 제후'가 통치하는 주교제후령(Prince-bishopric)이 되었습니다.
2) 비록 리에주는 성직 제후가 통치했지만, 중심도시인 리에주 시가 브뤼셀, 마스트리흐트, 아헨 등 여러 도시들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리에주 시는 중세 플랑드르의 중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3) 따라서 중세의 리에주 시는 직물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산업이 발달했고, 상공인의 세력이 강했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4) 특히 14세기 중엽인 1345년에는 리에주 시민들이 당시 리에주 주교제후였던 라 마르크 대주교를 굴복시키고, 상공인 세력인 32개의 길드의 대표자로 구성된 '시민 의회'를 만들기도 했던, "시민 저항 의식"이 강했던 도시였습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리에주 시(Liège City)입니다. 브뤼셀, 나무르, 아헨, 쾰른 등을 있는 교통 허브에 위치했고, 이러한 도로망은 중세시대에도 리에주 시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에주 시는 1400년까지는 상공업이 번창한 도시가 됩니다. 그러나, 교통 허브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군사학적 요충지라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리에주 시는 15~17세기 주변 국가들의 계속되는 전쟁에 시달리게 됩니다.
2.15~18세기 초 리에주 시의 수난과 농업지대로의 전환
1) 리에주 시는 1465~1468년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의 침공을 받고 큰 타격을 입습니다.
2)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 도중 어떻게든 주산업을 지켜낸 브뤼셀·안트베르펜과 달리, 리에주는 상공업의 활기를 잃고, 리에주 시 주변은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농업지대로 변환됩니다. 17세기 리에주 시의 지도는 아래과 같습니다.

1627년의 리에주 시(Liège city)의 모습입니다. 안트베르펜과 비슷하게 주변에 농경지가 많습니다. 그리고 배가 오갈 수 있는 강도 있습니다. 이 리에주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도시 주변에 소규모의 주택인 농가가 매우 많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즉, 리에주시는 '공업 도시'로의 성격은 약하고, 농업 및 농산품 유통의 기능을 담당하는 '농업 도시' 성격이 강해보입니다.
3) 이 리에주 시는 30년 전쟁 도중 1636년 4-7월 도시가 포위당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폰 베르트(Johann von Werth)가 이끄는 용병대에 의해 리에주 주변의 농경지 및 건물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4) 17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제국+친황제 독일 제후들)의 대립으로 프랑스령이었다가, 독일제후 영향권이었다가, 영국의 말버러 공작 존 처칠에게 점령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손바뀜을 겪으면서 전란의 타격을 또 입습니다.
5) 1714년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로는 이 리에주 주교제후령에 큰 타격은 없었지만, 주력 제조업이 살아 있던 브뤼셀·겐트·안트베르펜과 달리 산업이 지나치게 농업 중심으로 편중되어 '벨기에 도시 연합' 내에서 리에주 시의 지위는 높지 못했습니다.
3. 리에주 주교제후령과 리에주 시의 상황(1781년 기준)
1)리에주 주교제후령 인구: 약 60만(인구 증가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2)리에주 시의 인구: 약 6만(도시 인구 규모는 안트베르펜 및 겐트와 유사합니다.)
3)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주산업: 농업
4)농업생산품의 이동: 매우 높은 비중(50~75%)의 농업생산품이 리에주 시 밖으로 수출되고 있었습니다.
5)경제력: 고부가가치 산업이 딱히 없어, 이웃한 서쪽의 브라반트 지역에 비해 경제력 및 구매력이 많이 낮았습니다. 한 예로, 당시 리에주 시의 실업률이 20%나 될 정도였지요.
6)정치 체제: 14세기 시민 저항운동을 통해 만들었던 '시민 의회'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15~17세기를 거쳐 정치 주도권은 리에주 주교제후및 리에주 영내의 13개 교구의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에게 넘어갑니다.
◇리에주 주교령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상황이 당시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일랜드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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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 주교제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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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지배 하의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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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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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제조업 발달 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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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제조업 발달 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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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도시와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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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6만, 겐트·안트베르펜과 유사, 17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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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1750년 기준 12.5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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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부유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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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반트(사치품 제조업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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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산업혁명으로 각종 제조업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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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 유출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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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5% 외부로 반출
(1787년 기준, 영문위키 피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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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류(밀)은 거의 95%이상 외부로 반출
아일랜드 본토인은 감자로 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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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을 압제한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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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 지역의 가톨릭 고위성직자
(특히, Hoensbroeck 주교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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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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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적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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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 혁명(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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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감자 대기근(1845~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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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리에주 혁명으로 인해 리에주의 대표 종교 건축물인 "성 람베르트 대성당"이 파괴된 모습이고, 오른쪽은 1847년 그려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때 헐벗고 굶주린 아일랜드 주민들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두 사건 모두, 가난한 농업 중심 지역에서 지나치게 식량이 유출된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Mimi-Tino 부부로부터 이야기를 듣던 카를은 상당히 의아해하며 Mimi 고모에게 질문했습니다.
카를: 그럼 리에주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돌보지도 않으면서 자기 배만 채우는 나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 만나면 우리 합스부르크 가문 명성에 흠집 내는 것 아닌가요?
Mimi: 일반적인 리에주 성직자라면 그렇겠지만, 지금의 리에주 주교제후이신 F.C. 벨브뤼크 대주교님은 정말 좋은 분이란다. 그래서 리에주 사람들에게도 그 분은 인기 많으신 분이셔.
Tino: 그리고 리에주 지역은 브라반트에 상당량의 식량을 공급하는 지역이야. 그래서 이 지역은 가톨릭 교회령이기에 우리가 직접 관여할 수는 없지만 경제권이 벨기에와 연결된 지역이라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 줘야 하는 지역이기도 하지.
카를: Mimi 고모가 인정하는 벨브뤼크 대주교님이라면, 저도 궁금해요. 고모, 그 대주교님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Mimi: 아직 지금 룩셈부르크 영내니까 리에주에 도착하려면 시간 꽤 남았네. 샤를, 느긋하게 얘기해 줄게.
※브라반트: 브뤼셀을 포함한 벨기에의 핵심 지역
Part. 3 선량한 리에주 주교제후 F.C. 벨브뤼크 대주교(통치:1772~1784)에 대한 소개

1781년 당시 리에주 주교제후(Prince-bishop of Liège)로서 리에주 지역을 통치했던, 프랑수아-샤를 드 벨브뤼크(François Charles de Velbrück) 대주교입니다. 리에주 지역의 빈민 구제 및 복지 증진에 힘썼고, 문예 및 예술 진흥에도 열성을 쏟았던 분입니다. 여러 개혁을 실시는 해 보았는데, 재정부족으로 인해 성과는 엄청 좋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이분의 지역민들을 향한 애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리에주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1) F.C. 벨브뤼크 대주교의 출생 및 리에주 통치자가 되기 이전까지의 경력
▪ 출생: 1719년 뒤셀도르프 인근, Chateau de Garath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독일계입니다. Chateau에서 태어나신 것을 보니 명망 높은 귀족 출신인 것 같습니다.
▪ 1735년(16세) 리에주 시의 최대 대성당인 성 람베르트 대성당(Saint Lambert Cathedral: 성 람베르트가 리에주의 수호성인입니다.)에서 성직록(prébende)를 받게 됩니다.
☞제 의견: 명문 가문 빽으로 성직자 경력 초기부터 권력의 핵심에 근접할 수 있는 직책을 맡게 된 것 같습니다.
▪ 외교 사절로 빈(Wien)에 파견되고, 바이에른 궁정대신을 맡는 등 리에주 외부에서도 정치경력을 쌓습니다.
▪ 1759년 40세 때 리에주 주교(Bishop of Liège)로 임명됩니다.(이 정도 연령대에 가톨릭 주교가 되는 일은 현대에도 있었습니다. 최근 작고하신 정진석 추기경(1931~2021)이 1970년 청주교구 주교가 되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리에주 지역 13개 교구에서도 가장 핵심인 '리에주 시'를 낀 No.1 교구, "리에주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는 것이죠. 즉, F.C. 벨브뤼크 주교는 40세에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강력한 권력자 중 1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 의견: 25년 가량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일을 잘했고, 가문의 배경까지 있는 분이라 리에주 지역 가톨릭 고위성직자들도 "벨브뤼크라면 리에주 주교를 맡길만 하다."라고 인정한 것 같습니다.
※보충설명: 리에주 주교제후(Prince-bishop of Liège)≠리에주 주교(Bishop of Liège)
→전자는 리에주 전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 후자는 13개 교구 중 리에주 시와 그 인근만이 관할인 성직자입니다.
2)F.C. 벨브뤼크, 리에주 주교제후(Prince-bishop of Liège)가 되다.
▪ 1772년, 전임 리에주 주교제후의 사망으로, 새로운 리에주 주교제후를 뽑는 선거(유권자: 리에주 지역 고위 성직자)가 실시되는 데 F.C. 벨브뤼크 주교는 이 선거에서 무난하게 주교제후에 당선되어 약 3,500㎢ 면적을 다스리는 리에주 지역의 통치자 "리에주 주교제후 F.C. 벨브뤼크 대주교"가 됩니다.
3) F.C. 벨브뤼크 주교의 통치 및 개혁 정책
★상당 부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정책과 일치합니다.
(1) 가난한 어린이와 시골 어린이를 위한 초등 교육 실시 시도(부분적인 성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국 내 6~12세 아동의 초등교육 의무화와 상통하는 정책입니다.
(2) 예수회(Jesuit) 교육기관 압류, 예수회 세력 약화(1773년)
→이건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책과 일치하고 오스트리아 본토에서 예수회 세력을 약회시킨 연도까지 일치하네요.
(3) 각종 빈민 구제/ 빈민을 위한 의료기관 설립
i)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큰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 후반기에 농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려고 했던 점과 상통합니다.
ii) 공공 병원 설립: '모든 이를 위한 성 레오나르도 병원(Hôpital général Saint-Léonard)' 설립
→ 이것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치의 게라르드 판 즈비텐(Gerard van Swieten)의 주도로 "위생 보건 개선 및 의학 기술 연구"가 이루어진 점과 비슷하네요.
(4) 문예 및 예술 진흥
i) 1779년 리에주 문예회(Société littéraire de Liège)를 설립하여, 리에주의 지식인과 외부의 학자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시와 예술 작품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ii) 1775년 리에주 미술 아카데미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는 현재의 "Académie royale des beaux-arts de Liège(리에주 왕립 미술대학)"으로 계승됩니다. 이곳은 1831년 독립한 벨기에 왕국보다 역사가 오래된 미술대학입니다. 1836년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높은 미술 수준을 인정받아 이곳에 'royale', 즉 '왕립'의 칭호가 붙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이 벨브뤼크 대주교로 인해 시작된 현재의 '리에주 왕립 미술대학'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이 리에주 왕립 미술 대학(Académie royale des beaux-arts de Liège)의 모습입니다. 외부가 꽤나 고풍스럽네요. 확실히 18세기 후반쯤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리에주 왕립 미술대학 내부는 정말 아름답고 깨끗합니다. 리에주 왕립미술 대학 사진 중에서는 이 사진이 가장 멋있는 것 같습니다. 미술은 잘 모릅니다만 멀리서 봐도 석고상들이 참 섬세해 보입니다. 출처:Académie Liege - ESAHR(@academieliege)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4) F.C. 벨브뤼크 주교제후에 대한 리에주 사람들의 평판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벨브뤼크 대주교는 리에주의 아우구스투스와 같다."
이는 당시 리에주인들이 벨브뤼크 대주교를 추앙하며 지은 시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6행으로 된 시를 발번역해 보았습니다.(원문은 프랑스어인데, 제가 영문위키의 영어판을 발번역한 겁니다.)
사람들은 그의 정성과 친절함을 아네.
그는 예술을 환영하고, 발전시켰다네.
그는 힘든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를 열었고,
그들의 보호자와 수호신이 되었다네.
선량하고, 자상하며 인간적인 벨브뤼크는 그야말로,
리에주 한가운데 있는 아우구스투스와 마이케나스라네.
※마이케나스: 아우구스투스의 뛰어난 조력자
어떤 리에주인이 벨브뤼크 대주교를 회고하며 지은 시
이 시가 벨브뤼크 측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는 '리에주 혁명' 때 다른 주교제후들의 무덤은 다 파해쳐졌는데, 유일하게 벨브뤼크의 묘역만 무사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100년 넘게 압제적인 주교제후 및 고위 성직자의 통치에 치를 떨던 리에주인들도 '벨브뤼크 대주교가 12년간 리에주인들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통치했다.'는 점은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카를 대공의 시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진심을 갖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며 리에주 주교제후령을 통치하는 벨브뤼크 대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카를 대공은 이제 '인자한 할아버지같은 벨브뤼크 대주교'를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71세의 은퇴한 노장 A. 하디크 장군(카를과 하디크 장군과의 만남은 https://cafe.naver.com/booheong/217052 글 중간쯤에 있습니다.)을 만났을 때와 같은 좋은 인상을 당시 62세의 벨브뤼크 대주교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카를에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카를 대공 일행은 1781년 7월 6일, 마침내 리에주 시에 있는 리에주 대주교궁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리에주의 주교제후이자 통치자 벨브뤼크 대주교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Part. 4 카를 대공 일행과 벨브뤼크 대주교와의 만남


왼쪽이 위에서 소개드린 성직자 본연의 마음으로 리에주 지역을 통치하는 리에주의 벨브뤼크 대주교이고, 오른쪽은 그가 정무를 보고 있는 '리에주 대주교궁'입니다. 카를 대공의 3인 가족과 벨브뤼크 대주교는 이 리에주 대주교궁의 별실에서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벨브뤼크: 벨기에 공동총독 각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한 분들을 이 곳에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Mimi+Tino: 리에주 주교제후님, 처음 뵙겠습니다. 신임 벨기에 공동총독으로서 대주교님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습니다.
카를: 저는 벨기에 공동총독의 조카 샤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벨브뤼크: (카를에게) 대공 전하, 제가 이곳의 주교제후가 되기 직전에 태어나셨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많이 성장하셨군요. 제 눈에는 대공 전하께서 큰 일을 해내실 것 같습니다.
Mimi: 저희들은 이 아이를 열심히 교육시키고는 있는데, 미래는 신만 아시는 것이니 모르는 일이겠지요. 먼저 저희가 대주교님을 찾은 용무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벨브뤼크: 네. 당연히 용무가 있어서 저와 만남을 가지시는 것이겠지요. 용무를 들어보겠습니다.
Tino: 첫째 이유는 <겐트 제단화 사건>에 대해 가톨릭 성직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벨브뤼크: 그 사건에 대해서라면 고위 성직자이든 젊은 성직자이든 모두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황제폐하라도 이건 말도 안 된다."는 분위기입니다.
카를: 아담과 이브가 알몸인 것은 <창세기>에 나온 성경 내용 그대로 반 에이크 형제가 묘사했고, 지금보다 성적으로 보수적이던 중세 가톨릭에서 '문제없다' 한 것인데, 아무리 높으신 황제폐하라도 그 장엄한 예술작품에 손을 대신 건 선 넘으신 행동 같아요.
벨브뤼크: 대공 전하께서 우리 성직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군요. <겐트 제단화 사건>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모든 성직자가 "황제폐하(요제프 2세)께서 선 넘으셨다."는 입장입니다.
Mimi: 그렇다면 성직자 분들과 저는 <겐트 제단화>에 대한 입장도, 정치적으로 황제 폐하와 대립관계인 것도 입장이 같은 셈이군요.
벨브뤼크: <겐트 제단화 사건>으로 인해서 저처럼 계몽사상에 우호적이던 성직자들도 황제 폐하의 편에 서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정치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된 상황이군요.


위 대화에서 오고 간 <겐트 제단화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겐트 제단화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그림을 가져 왔습니다. 왼쪽의 멀쩡한 아담과 이브의 그림을 오른쪽처럼 훼손했다면 예술을 사랑하는 M. 크리스티나도, 장엄한 종교회화인 <겐트 제단화>를 '성화(holy painting)'로 생각하는 가톨릭 성직자도 이 사건에 대한 분노가 엄청났을 것임은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Mimi: 그리고 저는 대주교님께서 리에주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 병이 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통치를 하고 계신다는 점이 정말 존경스러웠어요.대주교님의 인자하신 통치를 생각하니까 돌아가신 어머님 생전에 그 분이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할 고민을 하고 계시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해서, 뭔가 친숙한 느낌이 나요.(약간 눈물이 흐른다)
벨브뤼크: 저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고, 성직자 생활도 편하게 했고, 권력의 핵심에 일찍 접근해서, 무난하게 주교제후가 되어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 비해 가난하게 태어나서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농민을 보면,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는 그 마음을 따라 통치했을 뿐입니다.
Tino: 사실 그런 마음을 일시적으로 갖기는 쉬우나, 대주교님처럼 평생 일관되게 그 마음을 지키기도 어렵고, 마음이 있어도 '현실적인 방법'으로 통치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대주교님은 '일관되게 인자한 마음'과 '현실적인 방법' 모두를 갖춘 뛰어난 통치자이십니다.
벨브뤼크: 아닙니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제 통치구역에 너무 많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벨브뤼크 대주교가 선정(善政)을 펼치는데도 불구하고, 리에주 지역의 가난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위의 지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리에주 지역은 가난한 농업지대이고 제조업 발달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도시민의 구매력이 낮기 때문에 리에주 지역의 지주들은 보다 곡물을 비싸게 팔 수 있는 이웃의 브라반트(Brabant), 플랜더스(Flanders), 룩셈부르크(Luxemburg) 등에 리에주에서 생산한 곡물을 반출하여 팔려고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정작 농사를 지은 리에주 지역의 식량이 부족한 결과가 발생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리에주 주교제후령에 발생한 것이지요.
Mimi: '빈곤 퇴치'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저희 합스부르크 제국 같은 부유하다고 평가받는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은 많이 존재합니다. 특히, 판노니아 평원이라는 거대한 곡창지대를 갖고 있고, 건축업·상공업이 발달했는데도 아직 빈곤이 제국 내에 남아 있습니다. 대주교님은 그에 비해 훨씬 좋지 않은 조건에서 최선의 통치를 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Tino: 저도 대주교님께서는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리에주 시민과 농민 모두 대주교님을 우러러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리에주인들이 '벨브뤼크 대주교는 우리의 빛이자 희망'이라고 노래하는 것을 저희는 마차를 타고 오면서 분명히 들었습니다.
카를: 네, 저도 그 노래 분명히 들었어요. 전 대주교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느끼기에는 대주교님께서 이 리에주 땅에 계시는 것 자체로 리에주인들이 삶의 희망을 얻는 것 같았어요.
벨브뤼크: 부하 성직자들이 '리에주인들이 벨브뤼크 대주교를 존경하고 있다.'고 보고했을 때는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아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리에주 시민들과 농민들이 저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제가 이 리에주인들의 마음에 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Mimi: 한 마디로 리에주인들은 "대주교님은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샤를의 말대로 최대한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이 리에주인들을 위한 길인 것 같네요. 저희도 미력하나마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Tino: 일단, 봄의 사육제(Carnival) 때 쓸 식량을 지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육제 때 즈음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을 때라, 그 때 식량을 지원해 드리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벨브뤼크: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금만 지원해 주셔도 굶주리는 사람 몇 명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Mimi: 그리고 하나 부탁 드릴 게 있어요. 대주교님, 저희 가족과 수행원들이 리에주 지역에서 사냥을 해도 될까요?
벨브뤼크: 사냥이요? 실례인지는 알지만 목적은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총독 각하 관할구역인 플란데런과 브라반트에도 사냥터가 많을 텐데 굳이 우리 구역에서 사냥을 하시겠다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Mimi: 당연히 말씀드려야지요. 곡물의 씨앗을 파종한 이후에 얄밉게 새싹을 먹어치우는 사슴과 토끼 때문에 골치 아프시지 않으신가요?
벨브뤼크: 네, 맞습니다. 그놈의 얄미운 사슴과 토끼들 때문에, 농민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고 있습니다.
Tino: 사냥의 목적중 하나가 그 사슴과 토끼의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이지요. 저희가 사냥을 함으로써 그 골칫거리인 들짐승 개체수를 줄여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Mimi: 그리고 농지를 다 들어엎는 멧돼지도 개체수를 좀 줄여놓아야지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벨브뤼크: 저희 성직자는 사냥을 잘 나가지 않아서 '황족/귀족의 사냥이 농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냥을 통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리에주 주교제후의 지위로 서명한 '합스부르크 황실과 그 가족에게 발행하는 수렵 허가증'을 작성하겠습니다.
※벨브뤼크 대주교가 서명한 <수렵허가증>이 작성되었습니다.


토끼와 사슴은 18세기 농민들에게는 전혀 귀여운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왼쪽에서 토끼가 밀의 줄기를 갉아먹는 것을 보고 오른쪽 잘 익은 밀밭에서 사슴이 돌아다니면서 밀밭을 짓밟고, 밀이삭을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는 농민들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그래서 귀족들의 사냥은 단지 오락으로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자기 영지의 농민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일이 토끼·사슴의 사냥이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무섭지요? 멧돼지 1마리도 무서운데, 이렇게 떼로 나타나는 멧돼지는 지금도 농민들에게 "disaster" 그 자체겠지요. 18세기 기준으로 멧돼지는 진짜 "전문 사냥꾼"인 귀족들이나 소수의 직업 사냥꾼 아니면 해치울 생각도 하지 못했겠습니다.
◎벨브뤼크 대주교와 Mimi 일행의 회담 주요 내용 요약
1) 리에주 주교제후와 벨기에 총독은 황제 요제프 2세의 무리한 중앙집권, 세속화 정책을 반대하는 데 뜻을 같이한다.
2) Mimi-Tino부부는 다음 두 가지 지원을 벨기에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리에주 주교제후령에 제공한다.
① 매년 이른 봄에 있는 가톨릭 사육제(Carnival)에 식량을 지원한다.
② 시간 될 때 리에주 주교제후령에 사냥을 나가 유해짐승인 토끼·사슴·멧돼지 퇴치를 돕는다.
Part. 5 카를 대공 가족, 리에주 대주교궁을 나와 브뤼셀로 향하다
카를 대공 가족은 벨브뤼크 대주교의 대주교궁을 나온 뒤, 리에주 시의 광경을 둘러봅니다. 리에주 시는 1781년 기준 도시인구 6만으로 뮌헨(3.5만)의 두 배에 가까웠지만, 아래의 그림과 같이 도시가 너무 조용했습니다.

1738년 리에주 시청 부근 중앙광장의 모습입니다. 상당히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지만, 사람이 너무 적어보입니다. 1738년이면 리에주 시가 약 3.4만으로 1781년의 뮌헨과 비슷한 규모인데, 모여 있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제 느낌에는 도시의 활력이 죽어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너무 조용한 리에주 시의 모습을 본 카를 어린이는 여태까지 지나왔던 도시와는 다른 어색함을 느껴 Mimi 고모에게 질문합니다.
카를: 리에주 시는 너무 조용한데요? 장사하는 사람들도 눈에 잘 띄지 않네요. 6만이나 되는 대도시라 들었는데, 3.5만의 뮌헨보다 유동인구가 적어보여요.
Mimi: 샤를이 맞게 본 것이란다. 이곳은 극소수의 고위 성직자와 지주들만 돈이 있을 뿐, 나머지 리에주 시민들은 식량 살 돈도 빠듯하지. 그래서 이곳에서는 저품질의 접시도 잘 안 팔려서 상인들이 이 도시를 잘 찾지 않는 것이란다.
Tino: 리에주 시가 가난한 이유는 제조업이 잘 발달해 있지 않아, 브뤼셀·안트베르펜 처럼 외부에 좋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벌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벨브뤼크 대주교님이 문예·예술 진흥 정책을 추진하신 이유도 ①어떻게든 리에주 외부 사람들과 교역망을 형성하기 위해서 ②자체적으로 예술 산업을 발전시켜 리에주 시를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지.
카를: 결국, 벨브뤼크 대주교님은 정말로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의 정책을 선택하신 것이네요.
Mimi: 그래, 그전의 리에주 통치자들은 그저 '무사안일주의'로 민생을 신경쓰지 않고 리에주 지역을 낙후된 채로 방치해 놓았는데, 벨브뤼크 대주교님은 몰락해 가는 리에주 지역을 부흥시키려고 모든 힘을 다하고 계신 것이란다.
Tino: 그리고 벨브뤼크 대주교님은 리에주의 지주들에게 '리에주 시의 문화·예술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일단 리에주 시에 대한 식량공급이 필요합니다!' 라고 설득하여 리에주 시로 식량이 더 많이 공급되게 하셨어. 그래서 예전보다는 사람들이 덜 굶게 된 것이란다.
카를: 벨브뤼크 대주교님이 리에주 통치하신지 이제 9년이네요. 그 동안 예전보다 상황이 좋아졌다는 걸 체감하고 리에주 시민들이 '벨브뤼크 대주교는 우리의 빛이자 희망' 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군요.
Mimi: 다만, 벨브뤼크 대주교님도 올해 62세로 고령이시고, 열성을 다해 일하고 계신 점이 돌아가신 어마마마(마리아 테레지아)와 너무 닮아서 걱정이란다. 정말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을 텐데.
Tino: Mimi 여대공, 동감하오. 만일 벨브뤼크 대주교님께서 돌아가시면 그 뒤가 정말 걱정이오.
카를: 만일 그분이 돌아가시면 리에주인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정말 너무 슬플 것 같아요.
Mimi: 최악의 경우는 그분이 돌아가신 뒤, 다음 리에주 주교제후 선거에서 수구적이고, 기득권의 이득만 옹호하는 성직자가 리에주의 통치자로 당선되는 경우란다.
Tino: 그럼 그분이 리에주 시에 추진하고 있는 문예·예술 진흥정책도 중단되게 되고, 리에주 지역 밖으로 식량반출도 심해져서 리에주 지역 사람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란다.
카를: 너무 끔찍해요! 저 이제 그만 듣고 싶어요!
Mimi: 알겠어, 샤를. 그만 이야기 할게. 자, 이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총독부가 있는 브뤼셀로 향해 출발!
※이렇게 해서 카를 대공과 Mimi-Tino 부부, 즉 벨기에 총독 부부는 리에주 시를 떠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향해 여행길을 떠납니다. 브뤼셀을 향해 가던 Mimi 부부와 카를은 브뤼셀 인근의 도시 티넌(Tienen)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반가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