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오스트리아 제국 인물 열전[카를 대공-벨기에편 6장] 억압적인 황제의 앞잡이, 전권공사 벨조요소 백작/ 1783년 대규모 화산폭발, 겨울 홍수까지 유발하다
<벨기에편 5장: 라컨 궁전 건설> 요약
Mimi는 ①멋진 대저택을 갖고 싶은 욕구 ②벨기에인 유력자+노동자 계층의 호감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③ 라컨 궁전 건축 비용은 시간이 지나면 회수 가능하다는 자신감, 이렇게 여러 가지 목적에서 현재까지 벨기에 왕실이 거주지로 사용하고 있는, 완벽한 여름 휴양지 라컨 궁전을 건설했습니다.(건축시기: 1781~1784년)
<벨기에편 4장: 허수아비 총독부부> 요약
Mimi와 Tino는 자신들이 황제 요제프 2세에 대해 실권없는 '허수아비 총독'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벨기에 총리 스타렘베르크 후작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Mimi 부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찾아 해 나갑니다. Tino는 카를을 데리고 벨기에 남부 프랑스 국경지대로 '사냥 여행'을 가면서 카를에게 군사학·지리학 등에 대해 매우 신경써서 알려주었습니다.
한편, Mimi는 브뤼셀에 남아, '벨기에 의회 의장'의 타이틀을 이용하여, 벨기에 유력자들을 의회로 소집했습니다. 그 의회에서 "벨기에인들의 자치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일치단결해서 하나의 의견을 내 주셔야 합니다."라는 연설로 벨기에 전역에서 <벨기에 전통 수호 결의안>을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1782년 스타렘베르크 후작과 함께 Mimi는 황제 요제프 2세에게 "황제 폐하의 뜻을 그대로 시행했다가는 시민 봉기 발생할 확률 90%. 따라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요제프 2세에게 한 방 먹여줍니다.
★본문을 연재함에 앞서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주요 인물부터 소개하겠습니다.
1. 벨기에 총독부부와 그 조카
가족관계
|
고모(사실상 양어머니)
|
고모부(사실상 양아버지)
|
조카(사실상 양아들)
|
|
초상화
|
|
|
|
|
생년월일
|
1742.5.13.
|
1738.7.11.
|
1771.9.5.
|
|
이름
|
독일식
|
마리아 크리스티나
|
알베르트 카지미르
|
카를(Karl)
|
프랑스식
|
마리 크리스틴
|
알베르 카시미르
|
샤를(Charles)
|
|
애칭
|
Mimi
|
Tino
|
다람쥐 샤를
|
|
직책
|
벨기에 공동총독(내정 담당)
실권은 미약함
|
벨기에 공동총독(군사/치안 담당)
실권은 미약함
|
장교 지망생
(1788년 가을 입대 예정)
|
2.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통파 정치인(요제프 2세와 비우호적 관계)
직책
|
제국 재상(1753~1792)
|
주벨기에 총리(1770~1783)
|
초상화
|
|
|
성명
|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
게오르크 아담 폰 스타렘베르크
|
인물 소개
|
▪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시 외교, 경제 면에서 맹활약
▪ '동맹의 역전' 외교로 영국 대신 프랑스와 우호관계
▪ '경잘알' 속성이 있어 제국 본토 뿐 아니라 벨기에· 밀라노 공국· 트리에스테 항 등 외곽 지역의 제국 속령까지 경제를 활성화시킴.
▪ 1780년대에는 요제프 2세와 코드가 안 맞아 별 활약상이 없음
|
▪ 제국 재상 카우니츠와 절친한 관계
▪ 카우니츠와 함께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략결혼 주선
▪1770~1783년 벨기에 총리를 맡아 벨기에의 경제 활성화, 농업생산량 증가, 과학기술 발전 등에 큰 공헌을 세움(이분도 '경잘알')
|
3.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및 황제의 예스맨
직책
|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1780~1790)
|
주벨기에 전권공사(1783~1787)
|
초상화
|
|
|
성명
|
요제프 2세
|
루도비코 디 벨조요소
|
인물 소개
|
◎ 1마디 요약: '공상적' 계몽전제군주
i) '기존 특권층'의 횡포를 억제하고 힘없는 농민·빈민·소수종교의 권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
ii) 하지만, 황제 본인의 명령은 '초법적'이고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음
iii) 그래서 제국령 중 헝가리·벨기에 등 원래 높은 수준의 자치가 인정되던 지역에 지주 및 가톨릭 세력 권한 약화를 명분으로 지나친 간섭
iv) 네덜란드에 의해 항구가 사실상 봉쇄당해 있는 벨기에 지역에 '무역 활성화'를 시도하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함.
|
▪출생: 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 벨조요소
(1728년생)
▪1783년까지 주요 경력
① 장교: 1757~1763 7년 전쟁 때 복무
② 외교관 경력
1764~1769년: 스웨덴 대사
1769~1782년: 런던 전권 대사
◎1783년 임명된 관직
i) 신롬 2성 야전 사령관(1783년 4월 26일 임명)
ii) 벨기에 전권공사(1783년 5월 9일 임명)
▪ 황제의 어명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시행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
Part. 1 벨조요소 백작, 벨기에로 파견되다.
1. Mimi 때문에 벨기에 통치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열받은 황제
벨기에 총독 Mimi와 벨기에 총리 스타렘베르크 후작이 보낸 보고서는 1782년 2월 13일 황제 요제프 2세에게 전달됩니다. 그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벨기에편 4장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링크:https://cafe.naver.com/booheong/217270)
"벨기에 각 도시 의회가 일제히 <자치권과 전통 수호>를 의결했습니다. 황제폐하의 급진 개혁적인 어명을 지금 시행하면, 시민봉기로 온 벨기에가 뒤집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황제 폐하의 성스러운 뜻은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합니다."
요제프 2세는 이 내용을 보고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얄미운 여동생 Mimi의 손발 다 묶었다고 생각했다만 Mimi가 현지벨기에인 및 스타렘베르크 총리의 지지를 받고 황제인 자신의 뜻을 저지했다고 생각했지요. 거기에 1783년 2월경에는 벨기에 지역에 건설되는 라컨 궁전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벨기에 총독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브뤼셀 북쪽 라컨 지역에 여름 휴양지로 거대한 쇼넨베르크 성(Schonenberg Castle)을 건설중에 있습니다. 건축 설계는 프랑스 최고의 건축가 샤를 드 와이(Charles de Wailly)가 담당했고, 동원된 건축 노동자는 500명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현지 지주 및 유력 상인들이 대저택 건축을 후원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게다가, 노동자 계층까지도 '좋은 건설 일자리 생겼다.' 면서 여총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1781~1784년 자신의 여름 별장으로 건설한 규모가 큰 '라컨 궁전'의 모습입니다. M. 크리스티나는 이 대규모 건축을 통해 현지 유력자들의 지지('궁전을 지을 만큼 재력이 살아있는 나를 봐라!')와 노동자 지지(건설 일자리 다수 제공)를 모두 얻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요제프 2세는 '브뤼셀 근교 라컨에 지어지는 거대한 궁전'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얄미운 Mimi의 꼬투리를 잡을 좋은 찬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제프 2세의 생각에는 '공금 횡령'이 아니고서야 거대한 궁전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관료들 중 자신과 관계가 우호적인 루도비코 디 벨조요소(Ludovico di Belgiojoso) 백작을 황제 집무실로 호출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벨조요소: 황제 폐하, 부르셨습니까?
요제프 2세: 벨조요소 백작, 잘 와 주었소. 벨기에 총독의 아방궁같은 거대 저택 건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벨조요소: 벨기에 현지 지주층과 결탁해서 황제 폐하께 정치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요제프 2세: 그렇게 생각하시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벨기에 총독이 아무리 내 여동생이라 해도 이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벨조요소 백작, 나를 좀 도와주실 수 없겠소?
벨조요소: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요제프 2세: 내가 그대를 벨기에의 "전권 공사(authorised minister)"로 임명해서 벨기에로 파견하겠소.
벨조요소: 전권 공사(authorised minister)라 하시면, 벨기에 통치에 있어 황제폐하를 대신하는 사람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이 아닌 소신(小臣) 벨조요소라는 말씀이십니까?
요제프 2세: 그렇소. 아무래도 벨기에 여총독은 내 여동생이자 황족이라는 점을 악용해서, 내 명령을 듣지 않고 사보타주를 하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그대 벨조요소 백작이 나를 대신해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벨기에 신민들을 구원할 수 있는 나의 개혁정책을 실시해 주시오. 더불어 벨기에 총독부부에 대한 재무 감찰권도 부여하겠소.
벨조요소: 깊이 감사드립니다! 황제폐하! 신 벨조요소, 충심을 다하여 황제 폐하의 개혁정책을 황제 폐하의 뜻 그대로 수행하겠나이다.
이렇게 '아방궁 같은 라컨 궁전'으로 시선을 끌고, "황제 대리인(전권 공사)"으로서의 엄청난 권력이라는 당근으로 벨조요소 백작을 포섭한 요제프 2세는 다음 작업으로 들어갔습니다.
2. 요제프 2세의 인사발령,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한 벨조요소


좌측은 Mimi가 브뤼셀에 도착했을 때 벨기에 총리였던 스타렘베르크 후작이고, 우측은 황제 요제프 2세가 1783년 5월 파견한 L.벨조요소 백작입니다. 스타렘베르크 후작은 Mimi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고, 요제프 2세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전임총독 샤를 알렉상드르 공(통치: 1744~1780)의 통치를 이어가려 했는지라,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783년 도착한 L.벨조요소 백작은 "황제의 권위를 받은 전권공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Mimi 부부를 무시하고 황제 요제프 2세의 급진 개혁을 실시합니다. 그래서 1784년부터 벨기에는 본격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합니다.
가. 1783년 4월 26일
▪ L.벨조요소를 신성로마제국 2성(★★) 야전 사령관(Lieutenant Field Marshal of the Holy Roman Empire)으로 임명
→ 벨조요소에게 확실히 군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벨기에의 군권까지 벨조요소에게 쥐어줄 생각의 인사발령으로 보입니다.
나. 1783년 5월 9일
(1) L.벨조요소를 벨기에의 전권 공사(authorised minister)로 임명
① 여기서 전권(authorised)이란 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 '전권'이라는 단어는 "황제의 명을 대리하여 집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② 즉, 법적인 의미에서 "황제의 칙서를 보유한 전권 공사"가 황제 정책을 반대하는 총독보다 권력상 우위를 점할 수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③ 원래 이런 오스트리아 속령의 전권공사는 "임지로 파견된 황족의 횡포, 독립선언 등을 막기 위한 안전 장치" 차원에서 있던 제도였습니다.
④하지만, 요제프 2세는 정치적으로 자신과 대립관계인 자기 친동생인 Mimi가 조그마한 권력도 행사할 수 없게 만들고, 자기 뜻대로 벨기에를 개조하기 위해 "예스맨" 벨조요소 백작을 '전권공사'로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2) 전 벨기에 총리 스타렘베르크 후작을 제국수도 빈으로 소환
① 스타렘베르크 후작의 지위도 "전권 공사" 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샤를 알렉상드르 로렌 공 아래에서도,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래에서도 "자신의 역할은 총독을 보좌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벨기에 총독과 최대한 대립하지 않고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②이러한 스타렘베르크 후작이 Mimi와 협조적으로 남아 있어서는 벨기에를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요제프 2세는 L.벨조요소 백작을 브뤼셀로 파견하면서, 스타렘베르크 후작은 빈으로 소환한 것입니다.
※1783년 5월 9일 요제프 2세로부터 "벨기에 전권공사"로 임명된 L. 벨조요소 백작은 6월 3일 브뤼셀에 도착했습니다. 벨조요소 백작은 전임 총리 스타렘베르크 후작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후, 스타렘베르크 후작에게 "황제폐하께서 빈으로 소환하셨습니다."라는 황명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전임 총리 스타렘베르크 후작은 브뤼셀을 떠나 제국수도 빈으로 황명에 따라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3. Mimi의 3인 가족과 벨조요소의 만남
L. 벨조요소 백작은 1783년 6월 4일(목), 총독 부부인 Mimi와 Tino에게 신임 전권공사로 부임했다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벨조요소가 쓰고 있던 가면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주말이 지난 6월 9일(월)이 되자마자 이런 말을 일방적으로 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황제폐하께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공동 총독 각하보다 권력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체 높으신 합스부르크가의 혈통이 흐르는 총독 각하도, 저를 통해 집행되는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개혁 정책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저에게 재무 감사도 철저히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Mimi는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지금 벨조요소 백작을 설득할 수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럼, 황제폐하의 어명대로 마음껏 그 개혁정책을 집행해 보시지요. 과연 황제 폐하의 뜻대로 모든 신민들이 먹고사는 걱정이 없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는 좋은 세상이 올까요?"
그리고 이제 12세가 된 카를은 분해서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Tino가 눈치를 주기도 했고, 자신이 분노를 표출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만한 벨조요소의 행위를 힘들게 참아넘겼습니다.
Part. 2 아이슬란드 라키(Laki) 화산의 폭발
1. 라키 화산의 폭발, 그리고 엄청난 농작물 피해 및 인명피해(1783년 6월~11월)


왼쪽 지도에 1783년 6월~1784년 2월까지 분출한 라키 화산의 위치가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최근인 2010년 4월 아이슬란드의 에이야퍄들라이외퀴들 화산이 분출하여 화산재가 공중으로 방출되는 사진입니다.
1783년 6월 8일 일요일, 아이슬란드 남쪽의 라키 화산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 화산은 용암 뿐 아니라 위의 오른쪽 사진과 같은 대규모 화산재와 유독 가스[이산화황(SO2), 불화수소(불산, HF) 등]가 대규모로 분출되었습니다. 이산화황(SO2)은 무려 1.2억톤, HF(요즘 불산 유출 사고 난 바로 그 맹독가스입니다.)는 800만 톤이 대기권으로 분출되었고, 이는 엄청난 인명피해로 이어집니다. 아이슬란드에서만 5만 인구 중 9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화산에서 분출한 화산재와 유독가스는 아이슬란드 뿐 아니라 전 유럽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화산재는 성층권에 머물러서 햇빛을 차단, 일조량이 급속히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1783~1785년까지 유럽의 농업생산량은 크게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이산화황(SO2)등의 유독 가스는 빠른 속도로 서유럽으로 퍼졌습니다. '실안개가 나타났다' 라고 영국 및 프랑스 신문에 보도된 이 유독 가스는 프랑스 북쪽 해안에 6월 14일에 등장했고, 6월 말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실안개는 1783년 여름 내내 유럽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독 가스 때문에 영국에서만 2.3만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농장 일꾼이 너무 많이 죽어서 추수에 애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화산에서 뿜어져나온 유독가스에 의한 인명피해는 상당했습니다.
1783년 이산화황(SO2)에 의한 유럽인의 피해는 쉽게 말해서 1952년 12월 런던 스모그가 유럽 전체에 닥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 이 유독가스 때문에 죽어간 사람의 증상도 "목이 타는 듯 아프고,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증상으로 런던 스모그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기본적으로 호흡기질환을 일으킨 유독가스가 이산화황(SO2)으로 동일했고요.

1783년 화산폭발로 인한 '실안개'로 인한 시야차단은 1952년 12월 초 런던 스모그 때의 시야차단 효과와 비슷했을 것 같아서 1952년 런던 스모그 때 넬슨 동상의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2010년 4월 하순 아이슬란드(빨간 점)에서 퍼진 화산재의 모습을 나타낸 북극점을 중심으로 한 지도입니다. 1783년 라키 화산 폭발 때는 이것보다 영향력도, 화산재 및 유독가스 분출량도 100배 정도는 많았으니 이로 인한 농업 생산량 감소와 인명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일 듯 합니다.
이러한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는 영국·프랑스와 인접한 벨기에에서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따라서, 저는 1783년 여름~가을의 벨기에는 호흡기 질환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고, 그래서 줄초상이 나서 분위기가 음울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벨기에 지역 역시, 가을에 추수 일꾼이 부족해서 농작물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발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모든 권력을 빼앗겼고, 자연재해가 닥친 상황에서 Mimi의 가족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2. Mimi의 자연재해 대처
벨기에에 '독가스 안개'가 전파된 것은 1783년 6월 17일경 이었습니다. Mimi는 주치의와의 면담을 통해 이 가스가 건강에 해로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야 한다."는 총독부 포고문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벨조요소 백작도 이를 막을 근거는 없어 총독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브뤼셀부터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런 분위기는 뢰벤, 겐트, 안트베르펜, 샤를루아 등의 벨기에 지방 도시에도 전파됩니다.

1783년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했을 때 어떤 도시나 지역의 통치자는 유독가스의 해로움을 눈치채고 '불필요한 외출 금지' 명령을 내렸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 이야기에서는 Mimi의 주도로 이러한 명령이 18세기에 내려진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브라반트의 지주들로부터 '추수할 일꾼 부족'의 민원을 접수한 Mimi는 리에주 지역의 통치자인 벨브뤼크 대주교에게 서한을 띄웁니다. "리에주 시(인구 6만, 실업률 20%)의 일자리 없는 사람들을 브라반트 지역으로 보내줄 수 없습니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벨브뤼크 대주교는 ①리에주 시의 실업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었고, ②리에주 지역으로 자금을 조금이라도 유입시켜야 했기에 Mimi의 요청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그래서 브라반트를 포함한 벨기에 지역은 리에주에서 온 수확철 일꾼 덕분에 조금이라도 식량을 더 거둬들일 수 있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서 1780년대를 덜 굶주리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1781년 Mimi 가족 일행이 벨기에로 올 때 잠시 만났던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통치자 벨브뤼크 대주교입니다. 이 분은 가난한 농업지역 리에주 지역의 통치를 맡아 어떻게든 빈민 구제와 리에주 지역 문예 예술 진흥에 열성을 쏟았던 통치자였습니다. 1784년 65세를 이분이 별세하시자, 불행히도 리에주의 다음 통치자는 매우 수구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1789년 리에주에서 '리에주 혁명' 이 일어나 정치 체제가 전복되게 됩니다.
3. 1783년 말~1784년 초의 혹독한 겨울
(1)혹독한 추위와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리던 겨울
라키 화산은 1784년 2월 7일까지 계속 화산재와 유독가스를 성층권으로 뿜어냈습니다. 그 결과 지구가 받는 태양 복사 에너지의 총량은 급감했고, 1783년 12월~1784년 2월에는 유럽에 유래없는 강추위가 닥쳣습니다. 특히, 1783년 12월 31일에는 많은 벨기에 지역에서 -23~-15℃ 안팎의 기온이 관측되었습니다.

1783년 12월 30~31일에 브뤼셀, 투르네, 안트베르펜 등의 지역에서 -17℃가량의 강추위가 기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도표입니다. 벨기에와 인접한 프랑스 북부 릴과 덩케르크에서도 -14℃ 가량의 강추위가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네요. 출처: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28628708_The_catastrophic_floods_of_February_1784_in_and_around_Belgium-a_Little_Ice_Age_event_of_frost_snow_river_ice_and_floods
좀더 전체적으로 관측된 겨울 기온을 보자면 아래 도표와 같습니다.(출처: 벨기에 왕립 기상학 아카데미 회원 가스통 R 드마레(Gaston R. Demarée)가 2006년 저술한 논문. 링크는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G.R. 드마레의 도표에 실제 일어난 이벤트를 추가했습니다.

(a)는 벨기에 동부 내륙지역 베르비에 지역의 최저기온을 기록한 도표입니다. 베르비에는 브뤼셀보다 내륙지역이기에 겨울이 더 혹독하게 추워서 최저기온도 브뤼셀보다 낮았습니다. (b)가 브뤼셀의 기온변화입니다. 1783말/1784초 브뤼셀의 경우에는 겨울에 보통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지만, 이 때는 한국 겨울보다 조금 더 추운 혹독한 추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겨울은 일관되게 추운 것이 아니라 도표에서 보시듯이 변동이 심했습니다. 이러한 큰 변동성이 벨기에 지역에 큰 자연재해를 가져왔습니다. (b)의 어두운 남색: 일 최저기온, 핑크 또는 주황색: 일 최고기온
◎벨기에 지역 기온에 대한 도표분석
(1) 1783/1784 겨울의 벨기에는 전반적으로 서안 해양성 온대 기후(Cfb)의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 기온분포가 아닌, 마치 한국의 대륙성 기후 겨울날씨처럼 최저기온이 -15~-10℃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의 높은 습도까지 겹쳐서 체감온도는 당시 벨기에인들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우 추웠을 것 같습니다.
(2) 기온 변동성이 매우 심합니다. 극심한 기온 변동성으로 인해 강/운하가 얼었다가 갑자기 녹는 일이 1월 초에 일어났고, 2월 21일 이후에는 갑작스런 해빙기가 벨기에 전역에서 찾아왔다고 제가 인용한 드마레의 논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783 말/1784 초에 브뤼셀에서 측정한 관측 기압입니다. 주목하셔야 할 점은 1월 18일경과 2월 4일경에 기압이 980hPa 정도로 매우 낮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1월 16일~2월 8일까지 벨기에 지역에 폭설이 내린 기록이 있습니다. 즉, 이 자료는 1784년 1월 중순~2월 초에 벨기에 지역에 저기압이 형성되어 폭설이 내렸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위의 1783/1784 겨울 브뤼셀 지역 기압 그래프와 드마레 논문에 인용된 당시 사람의 날씨 기록을 통한 고찰
(1)겨울에 980hPa이라는, 마치 태풍에서나 나올 듯한 낮은 기압이 1월 18일과 2월 5일경에 눈에 띕니다. 실제로 이 당시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1월 16일~2월 8일까지 벨기에 지역에 폭설 및 폭우가 내렸다고 합니다. 즉, 벨기에 지역에 저기압이 형성되어 이 기간동안 폭설이 내린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2)특히 1월 18일은 전 유럽에 저기압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3)1783.12.31~1784.1.2.에 상대적으로 기압이 높은 1000hPa 정도의 극솟점인데도 불구하고 표시를 한 이유는 이 부근에 "1783년 연말의 혹독한 -15℃에서 갑자기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면서 많은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플란데런 지역 운하의 결빙 시점과 다시 사용한 시기를 기록한 도표입니다. Bruges(브뤼헤) 지역 기준으로 보면 1783년 12월 20일에 결빙되어 쓰지 못하게 되다가 1784년 3월 1일 운하 운행이 재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플란데런 지역 운하의 결빙/ 운행 재개에 대한 도표 분석
(1)전반적으로 약 100일 가까이 운하가 결빙되어 있었기에, 물류 수송에 상당한 차질이 있었을 듯 보입니다.
(2)그래서 이 혹독한 겨울에, 특히 빈민들이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3)단, 이 100여일의 기간동안 운하가 스케이트장처럼 단단하게 얼어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얼음 기둥과, 얼음 장애물(ice jam)을 형성해서 물의 흐름에 지장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아래의 흑백사진이 빈의 도나우 강에 형성된 ice jam 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을 흐르는 도나우강에 형성된 '얼음 장애물(ice jam)' 입니다. 이는 물의 흐름을 방해해서 강변의 수위를 높여 홍수를 유발할 수 있어 상당히 골치아픈 존재입니다. 또 다리의 교각 손실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4. 강추위와 폭설, 이상기후로 인해 일어난 1784년 초 벨기에의 홍수
★제가 드마레의 논문에서 찾아본 바로는 뢰벤, 티넌, 메헬렌 등의 홍수 피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중심도시인 브뤼셀, 안트베르펜, 브뤼헤 등이 홍수피해를 받지 않았던 것이 벨기에로서는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표시한 세 개의 도시 메헬렌(Mechelen), 뢰벤(Leuven), Tienen(티넌)이 1784년 초 홍수 피해가 컸다고 기록되어 있는 도시입니다. 모두 브뤼셀과 멀지 않은 '브라반트 공국' 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드마레의 논문에서 찾아본 바로는 브뤼셀, 안트베르펜, 브뤼헤 등 벨기에 중요도시는 홍수 피해가 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 뢰벤(Leuven)의 홍수 피해
▪ 온 도시가 물에 잠겼고, 대부분의 가옥이 침수되었으며, 특히 창고에 있는 물건이 침수되었다고 합니다.
▪ 비교적 고지대에 있던 '도미니코 형제 수도원'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고립되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범람한 물이 얼어붙어 아이스 스케이트로 사람이 자주 다닐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 피해가옥 1,000여 채, 재산피해는 1채당 200길더로 계산시 총 20만 길더 정도 된다고 합니다.

홍수로 물이 범람한 뒤 범람한 물이 얼어붙어서, 스케이트장을 만드는 자연재해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최근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연안에서 일어난 겨울 홍수의 한 장면입니다.
2) 티넌(Tienen)의 홍수 피해
▪ 1월 초부터 홍수 피해가 시작되어 2월 말이 되어서야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특히 홍수 피해가 심했을 때는 집에 고립된 이재민은 불, 식량, 식수가 공급되지 않는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하염없이 구조용 바지선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 이재민은 가옥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다락방에 있거나 벽에 구멍을 뚫거나 지붕에 구멍을 뚫던지 해서 필사적으로 생존하려고 노력했고, 티넌 및 이웃 도시의 유력자들이 보낸 바지선이 이재민들을 구출했다고 합니다.

겨울 눈 내리는 와중에 열심히 노를 젓고 범람한 물을 해쳐나가는 두 사람을 담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1784년 겨울 벨기에 홍수 당시 티넌의 고립된 이재민들을 구출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보트 및 바지선에 탄 구조대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제가 고른 사진입니다.
3) 메헬렌(Mechelen)의 홍수 피해
▪ 저지대 가옥과 그 가옥에 있는 창고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 군 주둔지 역시 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 다행히 이 지역은 2월 28일부터 3월 4일, 비교적 짧은 기간만 침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뢰벤, 티넌에 비해서는 홍수 피해가 적었습니다.
▪ 그리고 현지 신문에는 "교량 피해가 없이 물이 빠져서 다행이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5. 1783년 말~1784년 초 벨기에/네덜란드 강추위 및 홍수 발생시 현지 유력자들이 보여준 행동
1) 현지 시 의회: 인명 구조, 빈민 구제를 위해 비교적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1) 안트베르펜 시의회: 1784년 2월 15일, 빈민의 피난처 마련 및 식량 마련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메헬렌 의회: 1784년 3월 1일 ①사다리가 있는 우마차를 동원해서 홍수로 고립된 이재민을 구조하는 일을 결의했고, ②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700덩이의 빵을 제공할 것을 의결했습니다.
2) 운하 및 교량 관리인들: 기회될 때마다 교량의 손상 없이 운하의 운행을 재개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1)브뤼헤: 1784년 2월 8일, 말을 이용해 얼음을 파쇄하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2월 25일, 날씨가 확실히 풀리자 말을 6마리를 동원해서 간단히 얼음을 파쇄했고, 이 과정에서 교량의 손상은 없었습니다.
(2)마스트리흐트(네덜란드): 얼음에 대포까지 발사해 가면서 운하 운행을 재개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3) 종교계(가톨릭 성직자)
◇네덜란드령 Velno 시에서 가톨릭 주도로 빈민 구제가 이루어졌습니다.
(Velno시는 네덜란드 동남부에 위치하고, 독일 라인란트에 인접해 있어 '네덜란드령이지만 가톨릭 영향권'인 지역입니다. 그 증거로 지금도 'Vastelaovend'라고 하는 가톨릭 카니발 행사가 있습니다.

네덜란드 Velno시의 카니발 복장입니다. 유럽은 겉으로는 종교색이 옅고 세속화된듯 보이지만, 지방 소도시나 시골로 가면 여전히 종교색이 강한 지역도 꽤 많이 있습니다. Velno시도 이에 해당됩니다.
(1) 1784년 2월 13일 Velno시 성당의 앞에 빈민을 위한 난로가 놓여졌고, 찾아온 빈민들에게는 수프가 제공되었습니다.
(2) 2월 15일에는 네덜란드의 Weinhuysen 장군이 고기 10파운드, 감자·당근 몇 포대를 가져와 빈민들에게 제공했다고 합니다.
(3) 가톨릭 수도회인 '작은 형제회'에서 빈민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이 일은 벨기에가 아닌 네덜란드령 가톨릭 지역에서 있었던 '가톨릭의 빈민 구제' 였습니다. 전반적으로 개신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네덜란드의 한 지방에서도 이러한 '가톨릭 빈민구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가톨릭이 완전히 주도하는 이웃한 벨기에 지역에서 1784년의 혹독한 겨울 및 홍수 재해에서 빈민 구제에 가톨릭교가 상당 부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상당수의 벨기에인이 혹한 및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가톨릭 신앙에 의지해서 극복해 보려고 했습니다.
→벨기에에서도 가톨릭 전통이 특히 강한 브뤼헤 및 덴데르몬더에서 '신이시여, 이 혹독한 기후를 풀리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Part. 3 큰 재난이 닥친 벨기에에서 Mimi와 벨조요소, 벨기에 유력자의 대응
1. 벨조요소 전권공사와 클레르페 장군의 언쟁
1784년 1월 Mimi는 총독부가 있는 플라스 루아얄(Place Royale) 궁전에 거처했기에 추위로 인한 불편은 덜 했지만, 날씨가 "단순히 추울 뿐 아니라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Mimi와 벨조요소가 각자의 집무실에 있던 1월 7일 오전 10시, 전권공사 벨조요소에게 전령이 허겁지겁 뛰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전령은 "티넌 시가 홍수로 인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상황을 벨조요소 백작에게 전파했습니다.
벨조요소 백작은 자신이 군권을 갖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티넌의 이재민을 주도적으로 구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오스트리아 소속 벨기에 주둔군의 한 50대 장성이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는 벨기에 태생의 오스트리아인 장군 프랑수아 세바스티앙 드 클레르페(François Sébastien de Clerfayt, 1733~1798) 소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벨조요소와 클레르페는 다음과 같은 언쟁을 총독부 한가운데에서 벌였습니다.

프랑수아 세바스티앙 드 클레르페(François Sébastien de Clerfayt, 1733~1798) 장군의 소묘화입니다. 제가 나름 좋아하는 장군이라 최대한 잘 생긴 그림으로 가져왔습니다. 오스트리아군에서 "용감하면서도 지혜롭다"는 평을 들었던 장군으로, 프랑스 혁명전쟁 초기 "플랑드르 전역(Flanders Campaign)에서도 오스트리아군에 여러 차례 승리를 안겨준 장군이었습니다.
클레르페: 전권공사 각하, 군대는 굳이 너무 많이 동원할 필요 없습니다. 티넌 정도면 추위에 강한 동부 출신 장병 위주로 대대급 500명 정도면 충분합니다. 각하의 생각대로 5,000명 동원하면 이재민 구하러 갔다가 괜히 이 엄동설한에 동상 및 비전투손실만 불필요하게 초래할 수 있습니다.
벨조요소: 무슨 소리요? 지금 이재민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한 상황 아니오. 빨리 구하지 않으면 안돼오!
클레르페: 각하, 급하기만 해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티넌의 이재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①" 인명 구조용 바지선 및 보트, 그리고 사다리", ②이재민에게 필요한 식수 및 식량 조달, 이러한 물자를 동원할 방법을 생각해 놓고 티넌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자는 주로 브뤼셀의 유력자들이 갖고 있지요.
벨조요소: 그럼, 나보고 브뤼셀의 그 나쁜 지주 및 상인들에게 고개를 숙이란 말이오?
이 때, 두 사람이 언쟁하는 소리를 듣고 Mimi 총독이 두 사람에게 와서 일단 목소리를 낮추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전해듣고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벨조요소에게): "굳이 그대는 벨기에 유력자와 만날 필요 없소. 이재민에 대한 구호 물자는 총독인 내가 벨기에 의회로 가서 해결하면 되니까요."
(클레르페에게): "나는 총독으로서 이번 일은 클레르페 장군의 손을 들어주겠소. 이런 재난 상황에서는 50년 가까이 벨기에에 살고 있는 클레르페 백작이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500명이라면 클레르페 소장 휘하의 군대로도 충분할테니, 군대에 관한 일은 그대에게 위임하겠소."
클레르페 백작은 "총독 각하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하고 총독부를 나서, 자신의 사령부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벨조요소 전권공사(1728년생)는 '군권을 갖고도 데꿀멍'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클레르페 백작(1733년생)보다 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나이가 5살 많은 것 그리고 '전권공사'라는 직책 뿐이었습니다. 7년 전쟁에서 세운 전공은 클레르페 백작이 압도적으로 앞섰습니다. 그리고 클레르페 백작은 벨기에 현지 출신 오스트리아인이라 벨기에인 비중이 높은 벨기에 주둔군 장병들은 이탈리아 출신 벨조요소보다 클레르페 백작을 훨씬 더 따랐습니다. 그러니 그 오만한 벨조요소도 자칫 강제로 병력 5천명 동원하려다 '개망신'을 자초할 수 있기에 이때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벨기에 의회에서 <이재민 긴급 구호 법안>이 통과되다
Mimi는 1월 7일부로 "티넌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긴급 의회 소집"을 벨기에 의회 의원들에게 통보했고 1월 8일 오전 9시 곧바로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의회에서 '긴급 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Mimi는 이 자리에서 파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천재지변은 나 총독 마리 크리스틴 도트리슈(Marie Christine d'Austriche)가 벨기에 의회 의장직에 있어서는 대응에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재해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재해 재난에 대한 극복 노하우를 갖고 있는 H.F.J. 로캉앵(Henri Ferdinand Joseph de Locquenghien) 브뤼셀 시장을 '벨기에 의회 의장 대리'로 추천합니다. 이 쪽이 이번 티넌 수해 이재민 대응에 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상당수의 의원들이 '총독이 자기 권한을 내려놓은 상황' 에 대해 어리둥절하게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①벨기에인 자치권 유지를 위해서도 ②이웃한 도시 티넌을 돕기 위해서도 ③어차피 Mimi 총독은 벨조요소에 의해 실권이 너무 약해졌기에, 로캉앵 브뤼셀 시장이 사실상의 벨기에 의회 의장을 겸직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총독 각하 만세!", "의장 대리, 무슈 로캉앵을 환영합니다."라고 적극 찬성 의사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Mimi를 대신해서 사실상의 벨기에 의회 의장이 된 브뤼셀 시장 로캉앵은 다음과 같은 취임 연설을 했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브뤼셀 시의 시장으로 작년 선출된 것도 너무나 영광인데, 존경하는 총독 각하와 벨기에 의회 의원님들의 추천으로 벨기에 의회 의장 대리로까지 취임하게 되어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제 어깨가 짊어지고 있는 브뤼셀과 벨기에에 대해 강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자연재해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 의원님들과 관계되신 분들도 이 자연재해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시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자연재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모두가 합심하여 서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번 수해로 인해 음식물과 생필품이 부족하고, 목숨까지 위협받고 있는 이웃의 티넌(Tienen) 시민들을 돕는데 우리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혹 브뤼셀 시민들 중에는 "우리 브뤼셀도 힘든데 남 도와줄 여력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으실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80여년 전의 일을 잊으면 안 됩니다. 1695년 8월 우리 브뤼셀은 루이 14세의 무자비한 군대의 포격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티넌 시민들처럼 생필품도, 식량도 없는 채로 브뤼셀 시민들은 폐허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브뤼셀 시민에게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의원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왼쪽이 1695년 8월 13~14일 루이 14세 휘하 빌레루아 공작의 포병대의 무참한 포격을 받고 폐허가 된 브뤼셀 중앙광장의 모습입니다. 브뤼셀 시민들은 이 폐허에서 살 곳도 마땅치 않고 식량 및 생필품도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던 브뤼셀 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된 사람들이 같은 브라반트 공국 소속 도시였던 티넌, 뢰벤, 안트베르펜, 메헬렌 등의 도시의 유력자와 상인들이 보낸 식량 및 물자였습니다. 이러한 이웃 도시들의 도움에 힘입어 브뤼셀 시민들은 약 5년만에 브뤼셀 도심을 예전보다 더 아름답게 재건해 냈고, 그 기본적인 건물의 모양은 1700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의원들은 소리를 모아 "우리 브뤼셀은 주위 브라반트의 도시인 티넌, 뢰벤, 안트베르펜, 메헬렌 덕분에 5년만에 재건했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브뤼셀의 대표 의원이자 곡물 도매상인 D. 메르텐스 의원이 <수해 발생 지역 긴급 구호 법안>을 발의했고, 이 법안은 논의끝에 1월 8일 밤 9시경 통과되었습니다. 논의가 길어졌던 것은 법안 자체의 '찬성/반대' 여부 보다는 "이재민 구호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실행 방안을 놓고 많은 논의를 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벨기에 지역은 이처럼 혹독한 1783년 12월~1784년 3월까지의 긴 겨울과 홍수까지 겪었지만, 재난 상황에서 ①도시 의회 자체가 빠르게 대처했고 ②피해가 덜했던 브뤼셀, 안트베르펜 등의 대도시가 홍수 피해를 입은 티넌, 뢰벤 등의 이재민 구호와 복구 작업을 도운 덕분에 1784년 8월경에는 티넌, 뢰벤 등도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화산재로 인한 일조량 감소는 계속되었지만, 감자 보급률이 높은 벨기에 지역은 농업생산량이 덜 감소해서 1784년 하반기에벨기에 지역은 상대적으로 덜 굶었습니다.
<벨기에편 6장>을 마무리하는 글
원래는 벨기에 전권공사로 부임해 온, 황제의 앞잡이 벨조요소 백작이 오만하게 전횡을 휘두르는 이야기를 오늘 전개하려고 했는데요, 아이슬란드 라키 화산 폭발로 인한 자연재해가 "화산재로 인한 일조량 감소" 뿐 아니라, "벨기에 지역의 겨울 홍수"까지 일으켰기 때문에 <자연재해 파트>이야기가 길어져서, '벨조요소 백작의 횡포' 이야기는 '벨기에편 7장'에서 연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재해에서 가톨릭 종교재단이 어느 정도 빈민 구호에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잖아도 골수 가톨릭인 벨기에인들이 가톨릭 종교재단에 고마워하는 판이라는 배경 묘사가 이번 편을 통해 자연스럽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벨조요소 백작을 통한 요제프 2세의 강력한 가톨릭 억압 및 세속화 정책이 현지 벨기에인의 강한 반발을 불렀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번 편을 통해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네요.
서술이 길어진 것은 좀 문제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