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오스트리아 제국 인물 열전- '라인(Rhine)의 수호신' 카를 대공 [유년기- 5편] <제국의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눈을 감다>
<5편:제국의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눈을 감다>
<Part1. 마리아 테레지아의 건강 악화 2부>
2부. 큰아들 황제 요제프 2세의 대형 사고를 수습하시느라 건강 악화되신 마테지 전하
1)이 때 요제프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지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요제프 2세(장남): 신성로마제국 황제
(2) 마리아 테레지아(어머니): 오스트리아 여대공+헝가리 여왕+보헤미아 여왕 등
☞의전상으로는 황제인 아들 요제프 2세가 더 높은데, 실질권력은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가 여전히 쥐고 계신 상황입니다. 오스트리아 제국 핵심 지역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등에 대한 실질통치권한이 있으니, 아들 요제프 2세가 급진개혁을 추진하려고 해도, 어머니 마테지 전하가 영토 실질통치권한을 이용해 "Veto(거부권)"을 강하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단, 군권이 요제프 2세에게 있어서 요제프 2세의 권한도 상당했습니다.
2)하지만, 요제프 2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전제적 계몽군주' 사상에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습니다.
(1) 프리드리히 2세처럼 군사력을 통한 "팽창주의적" 정책을 펴려는 야심을 가졌습니다.
(2) 계몽사상에 동감하면서도, 스스로가 "법 위에 있는 군주"라는 전제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3) '외국과의 관세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제국령 중 '벨기에' 등 지역 산업 보호에 민감한 지역들의 반발을 부르게 됩니다.
3)위에서 말한 요제프 2세의 성향 중 특히 "팽창주의 성향"이 결국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1)1770년 제국재상 B.A. 카우니츠와 함께 프리드리히 2세를 만나 폴란드 1차 분할을 논의했습니다. 그래서 1차 폴란드 분할(1772년)에 관여하여 지금의 (폴란드 남부+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갈리치아를 획득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갈리치아 획득에 대한 손익계산은 좀 어렵습니다. 획득 영토 내에 거대한 비엘리치카(Wieliczka) 소금광산(지금도 암염이 남아 있습니다. 단, 관광지로 개발되어 더 이상 채굴은 하지 않습니다.)이 있고 르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상당히 큰 곡창지대(현재의 서부 우크라이나)가 있어, 획득한 땅 자체가 상당히 가치가 높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덕성, 도덕성 하던 마리아 테레지아께서 왜 날강도같이 힘없는 폴란드 땅 합병하셔?" 같은 비난이 유럽 사회, 특히 독일 영방 안에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요약하자면 좋은 영토는 얻었으되, '국제적 비난'을 받아 외교적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1772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3국이 참여한 1차 폴란드 분할의 모습입니다. 굵은 검은색 안쪽의, 합스부르크 제국(Habsbug Empire)의 녹색보다 약간 연한색 계열 녹색으로 <GALIZIEN UND LODOMERIEN>으로 표기된 부분이 제가 위에서 언급한 "갈리치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갈리치아의 중심지는 ◎표시가 된 주요도시 Lwow(현재의 우크라이나 르비우)입니다. 그러니, 오스트리아는 르비우와 함께 우크라이나 서부의 비옥한 곡창지대까지 손에 넣은 셈이지요. 그리고 파랑색 ⚒표시가 제가 위에서 언급드린 거대한 소금광산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입니다. 그 소금광산의 모습은 밑에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은 1645년의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광부 등의 광산 노동자들과 광산 노동자들이 캔 소금을 광산 위에 있는 마을에서 짐마차로 수송할 채비를 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이 지하에 여러 층이 있고, 수많은 인부들이 투입될 정도로 매우 거대한 규모였다는 것을 보여주네요. 그리고 17세기에 쓰던 '광산 승강기'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 같습니다. 이 그림을 남겨주신 네덜란드의 예술가 Willem Hondius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현재의 비엘리치카 소금광산(폴란드 크라쿠프 시 인근 관광지)의 모습입니다. 왼쪽 조명 분위기의 광산도 참 아름답운데, 저는 오른쪽 장소가 더 인상적입니다. 종유석처럼 맺혀 있는 소금 결정에, 옛날의 광산 노동자들을 무지개빛의 조명으로 비춘 색다른 분위기를 내는군요. 기회 되면 꼭 가보고 싶습니다.
(2)갈리치아 합병까지는 피를 적게 보면서 좋은 영토를 얻었으므로, 괜찮다고도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그 다음 요제프 2세의 행동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1775년 질병으로 심각하게 앓아눕자, 34세의 요제프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프로이센을 친다.' 라고 보헤미아에 오스트리아 군대를 소집해서 프로이센을 침공하려 합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가 병석에서 일어나버립니다! 그리고 요제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라는 분께서 비겁하시게 뭐하시는 짓이요?'라고 항의하자, 요제프 2세는 난처해질 뿐이었습니다.


왼쪽이 요제프 2세의 젊을 때의 초상, 오른쪽이 프리드리히 2세의 51세때(1763년) 초상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초상의 키 포인트는 두 사람의 왼쪽 가슴에 달려 있는 '밝게 빛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스스로를 '계몽군주'로 자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군사적 재능이 상당했고, 국정 능력도 상당했지만(제가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하는 이유는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 때 방어력이 강한 오스트리아군을 만만히 보고 보헤미아와 작센(사실상 오스트리아의 가장 아끼는 동생같은 국가)과 보헤미아를 선제 침공했다가 스웨덴군과 러시아군에게 병력이 빠져나간 본토를 탈탈 털려서 국가 멸망 위기로 몰아간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제프 2세는 스스로의 지적인 뛰어남을 맹신한 나머지 너무 '독선적인' 면이 강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 때 기용된 유능한 관료들의 말조차 잘 듣지 않은 것이 문제였지요.
(3)1775년의 프리드리히 2세를 괜히 자극한 행동으로 끝났으면 차라리 괜찮았겠지요. 진짜 큰 사고는 "바이에른 왕위 계승전쟁(1778-1779)"을 일으킨 것입니다. 1777년 10월 30일,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계구도가 명확치 않은 채로 사망하자, 요제프 2세가 '명분 없이' 바이에른을 침공한 것입니다.
※배경지식: 선제후
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9명의 제후(6명의 세속 제후+3명의 고위 성직자 제후)를 말합니다.
나. 9명의 선제후 목록
나-1 성직자 제후 3명
i) 쾰른 대주교(=쾰른 선제후)
ii) 마인츠 대주교(=마인츠 선제후)
iii) 트리어 대주교(=티리어 선제후)
나-2 세속 제후 6명
i) 보헤미아 국왕:이건 신롬 황제가 겸직하는 지위니까요, 신롬 황제가 자신에게 1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ii) 작센 공작:작센 선제후, '제국 대장군'을 겸한다고 하네요. 유서깊은 베틴(Wettin)가문이 다스리는 데다가, 세속 제후 중 사실상 가장 높은 직위(보헤미아 국왕은 황제 본인이므로)이므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다른 국가보다도 1순위로 작센을 챙기는 이유입니다. 사실상 "작센 선제후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장 아끼는 동생 국가"라고 보시면 편합니다.
☞7년 전쟁때도 사실 슐레지엔 자체는 오스트리아가 거의 탈환했으나, 프로이센이 작센을 거의 점거한 탓에 '작센하고 슐레지엔을 교환한다.'고 합의할 정도로, 즉 자기 국토를 포기하면서 작센을 지켜낼 정도로 오스트리아는 작센 선제후국을 1순위로 챙겨 왔습니다.
iii) 팔츠 선제후: 제국 집사장을 겸한다고 합니다.
iv)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 국왕이 바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겸합니다. 사실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진짜 국명은 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 연합왕국입니다. 원래 쾨니히스베르크(현 칼리닌그라드)를 수도로 하는 동프로이센 공국이 베를린이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결혼으로 연결되어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에 영토를 모두 갖고 있는 흔히 알고 있는 '프로이센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즉,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은 엄밀히 말하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인 셈입니다. (1762년 예카테리나 2세의 사망으로 프리드리히 2세와 프로이센 왕국이 기사회생한 '브란덴부르크의 기적'도 프로이센 왕국의 경제적·실질적 요소의 거의 대부분이 독일 영방에 있는 '브란덴부르크'에 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브란덴베르크 선제후국을 보유한 프로이센 국왕도 신롬 황제 선출에 1표를 행사 가능합니다.

보라색으로 칠해진 두 개의 땅이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가 결혼으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 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 동군연합(Commonwealth)의 원래 영토입니다. 나머지 색깔은 1648년 이후 확장된 영토이고요. "Brandenburg"의 수도는 베를린, "Prussia"의 수도는 쾨니히스베르크, 프로이센 왕국 전체의 수도는 베를린이라고 이해하면 편합니다.
v)하노버 선제후: 영국 국왕이 하노버 선제후를 겸하기 때문에, 영국 국왕도 신롬 황제 투표에 1표 행사가 가능하네요.
vi)바이에른 선제후: 17세기 이전 바이에른 공국은 선제후는 아니었지만 독일 영방 내 "5대 공국"에 들 정도로 지위가 높았습니다. 선제후가 7명→9명으로 증가한 뒤에, 선제후로서 1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가가 신롬 황제를 세습하고, 선제후는 사실상 '거수기'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는 절차는 "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황제는 자신을 선출해준 선제후에게 상당한 예우를 갖추어 대해야 했습니다.
▣요제프 2세의 바이에른 침공이 명분이 없었던 이유
→황제가 자신을 선출하는 선제후의 영토를 침공한다? 그냥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 영방 내에서도 실제로 선제후국을 침공한 뒤 황제 요제프 2세에 대한 여론은 굉장히 나빴습니다. 심지어, 위에서 말씀드린 오스트리아의 '동생 국가' 작센이 오스트리아에 등 돌리고 프로이센 편을 들 정도였습니다.
◎국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오스트리아와 작센의 관계


왼쪽이 오스트리아 제국(1804~1867)의 깃발, 오른쪽이 작센 선제후국의 깃발입니다. 바탕색이 아예 똑같을 정도면 형제국가 맞지요?
☞위와 같이 국기만 봐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작센 선제후국은 너무나 절친한 형제관계 국가입니다.
◎바이에른 계승 전쟁 참전국

빨간색 박스 안 Saxony는 작센입니다. 작센이 형제국가 오스트리아 편이 아닌 반대편 프로이센 편인 것에 주목해 주세요.
◇Belligerents가 참전국들인데, 오스트리아 VS 프로이센+작센+바이에른 입니다.(Saxony: 작센, Bavaria: 바이에른)
▪ 작센은 원래 오스트리아와 형제국가인 데다가, 7년 전쟁 때는 프로이센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받았습니다.
▪ 작센은 정상적이라면 '프로이센이라면 이를 갈고, 형님국가(혹은 언니국가) 오스트리아에 붙어야' 말이 됩니다.
Q.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작센이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그토록 싫어하는 프로이센 편에 붙고, 형제자매같은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등을 돌렸을까요?
A. 프로이센, 작센, 바이에른 모두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의 권한"을 가진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작센 선제후국은 요제프 2세가 '황제가 자신을 선출하는 유권자인 선제후를 침공'하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선제후의 권한을 수호하고, 자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요제프 2세의 반대편인 프로이센에 붙은 것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 힘든 몸을 이끌고 간신히 황제인 아들의 대형사고를 봉합하다.
▪ 1775년 군대를 소집해서 프로이센을 침공하려 했고, 1778년 바이에른을 침공하는 대형사고를 저지른 데는,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인사 실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7년 전쟁 때 안정적으로 군을 지휘하던 제국의 군권을 보유했던 L.J. 다운 백작이 1766년 세상을 떠나자, 그해 군권을 아들인 황제 요제프 2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군권을 갖고 있는 황제 요제프 2세가 고집을 부려 전쟁을 할 경우 제어할 수 있는 제도 및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 다행히,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와 프리드리히 2세의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뜻이 맞아 떨어져서, 직접적인 교전은 별로 없었고, 두 군주의 교섭은 큰 탈 없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ㄱ. 마리아 테레지아가 평화를 원한 이유: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한 국제 여론이 추가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ㄴ. 프리드리히 2세가 평화를 원한 이유: 7년 전쟁 때 수도 베를린이 2번이나 성문이 따이고(1757년·1760년), 러시아군, 스웨덴군에게 본토 침공을 당해, 프로이센 국토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 전쟁때 크게 혼쭐난 프리드리히 2세도 더이상의 전쟁은 피하는 쪽으로 성향이 바뀐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전하의 62번째 생신이었던 1779년 5월 13일, '테셴 조약'으로 약 10개월만에 바이에른 계승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전쟁이 "왕위 계승 전쟁"의 마지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779년 마리아 테레지아(62세)의 초상화라고 합니다. '공식이안외워져'님의 서평 글에서 보았습니다. 출처:https://cafe.naver.com/booheong/216801 이 초상화에 흥미로운 점은, 제가 본 1765년 이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 중에서 유일하게 상복을 입지 않고 치장을 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바이에른 계승전쟁 종전협상에 몸소 나서실 때 '적국인 프로이센의 협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이때는 정상적으로 드레스를 입으시고 치장을 하시고 왕관(아마 보헤미아 왕의 왕관이겠지요? 선제후의 자격으로 협상을 해야 하니까요)을 쓰신 것 같습니다.
▣바이에른 계승 전쟁의 후폭풍
◇ 저의 소견으로는 이 명분없는 전쟁은 매우 큰 해악을 오스트리아 제국에 미친 것 같습니다.
(1)막대한 전비 소모: 무려 1억 굴덴을 썼다고(출처: Ingrao, Charles W (2000). The Habsburg monarchy, 1618–1815, 영문위키에서 찾으니까 이렇다고 합니다.)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래의 문제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적 고립 자초
▪ 당시 강대국이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모두 오스트리아 제국의 움직임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진짜 큰 문제는 위에서 계속 말씀드렸듯이 '독일 영방 내'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여론을 매우 싸늘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기껏 카를 6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거의 60년 넘는 세월에 걸쳐 만들어 놓은 '독일 영방 내에 왠만하면 간섭 안하고 원칙대로, 법에 따라서 제국은 움직인다.'는 원칙을 요제프 2세가 완전히 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 영방 내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침략근성'에 대해 경계하는 여론이 높아져 갔습니다.
→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때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생겨난 독일 영방내의 反오스트리아 정서가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독일 영방 내에서 "자꾸 우리 영역 침범하는 독일 내 2강(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둘 다 싫다."는 여론을 불러 일으켜서, 1806년 나폴레옹이 '라인연방'을 만들 때 써먹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봉건적 압제에서 너희를 해방시켜 주마'라는 프랑스-나폴레옹의 프로파간다가 상당 부분 잘 먹혀 들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저는 나폴레옹이 단지 힘만으로 라인연방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프란츠 2세와 K.메테르니히도 '독일 영방 내 여론이 좋지 않은데, 전쟁에서는 계속 패하니, 신롬 해체는 피할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을 아마 1801년에 뤼네빌 협약으로 굴욕적인 강화를 할 즈음에는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분을 중심으로 여러 관료들이 논의한 끝에 '황제'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180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새로운 제국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1806년 7월 라인 동맹이 출범한 직후의 유럽 지도입니다. 프랑스와 같은 파랑색으로 색칠되어 있으면서, 제가 진한 빨강 둘레로 테두리를 친 영역이 라인 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 영역입니다. 라인 동맹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국가가 바로 요제프 2세가 침공한 바이에른(라인 동맹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바이에른 왕국")입니다.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1756~1825)는 원래부터 계몽사상에 긍정적이었고, "독일 민족의 정체성"은 약했으며, 나폴레옹 프랑스에 초기부터 협력적인 태도였습니다. 즉위 전에는 바이에른이 반프랑스 동맹이었는데, 즉위하자 반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하고 나폴레옹 프랑스 측으로 갈아탔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는 177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 침공을 당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 분이 바이에른 계승전쟁 때 22~23세의 피 끓는 나이였으니, 당시 침략자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을 상당히 싫어했을 만도 합니다.(출처:youtube.com/c/fishandmaps. "Fish and Maps"님께서 직접 수작업으로 작성하신 이 지도를 본 부흥카페에 올려주셨습니다. 귀한 지도를 작성해 주시고, 제공해주신 "Fish and Maps"님께 감사드립니다.)
(3)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건강 크게 악화
▪ 제가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였다면, 전쟁 중(1778년 7월-1779년 5월)에는 '어떻게 전쟁 수습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는 문제 때문에 매우 큰 골머리를 앓았을 것 같습니다. 이건 당연히 상식적인 것이겠지요.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제가 위에 "외교적 고립 자초"에서 말씀드린 문제 때문에 '이제 기껏 간신히 살려놓은 신성로마제국도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것을 노련한 여성 정치가의 강력한 느낌으로 아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63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여군주로서 "제국 해체의 운명"을 느꼈다면, 딱 이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허망하구나!
마리아 테레지아, 1780년 10월경
<Part2.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지막 며칠(1780년 11월 24일~29일)>
1. 서거하시기 직전 상황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서는 안에서는 너무 급진적이고, 전쟁을 좋아하는 아들 황제 요제프 2세 때문에, 밖에서는 어머니와 인연을 끊어버린 파르마 여공작 마리아 아말리아, 그리고 프랑스의 왕비로서 제 역할을 못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때문에 매우 근심이 깊으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나폴리 왕국으로 시집간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가 남편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자녀도 많이 낳았으며, 1776년 나폴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나폴리 왕국을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큰 성과를 낸 소식이 전하께는 위안이었습니다.



왼쪽부터 마리아 테레지아의 6황녀 마리아 아말리아,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 11황녀(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6황녀인 마리아 아말리아는 원래의 남친과 헤어지도록 강요하고 소국 파르마로 정략결혼을 강요한 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대로 빡쳐서 아예 모녀간 인연을 끊어버렸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파르마 여공작으로서, 통치술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외세의 간섭 다 몰아내고, "파르마 공국 특유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고, 파르마 공국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다스렸지요.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는 1768년 나폴리 왕국으로 시집간 이후, 나폴리 국왕을 뒷전으로 물러나게 한 뒤 자신이 나폴리 왕국의 실세가 되어, 명목상으로는 "나폴리 왕비"지만, 실질적으로는 "나폴리의 여왕 마리아 카롤리나"가 되어버립니다. 부유한 오스트리아 친정의 투자를 나폴리 왕국에 유치해서, 낙후된 나폴리 왕국을 발전시키는 등 내정은 수준급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자연스레 나폴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자본에 종속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성국이 되어버렸지요. 맨 오른쪽은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이십니다. 프랑스로 시집간 때가 1770년이고, 1770~1774년에는 세자빈이었고, 1774년 이후부터 프랑스 왕비가 되시는데, 사치가 심했던 때는 1774(프랑스 왕비로 즉위)~1778년(첫 아이 출산) 이었습니다. 1778년 이후로는 트리아농 별궁에서 농사 짓고 아이들 돌보면서 소박하게 지내십니다. 그 이유는 첫 아이인 큰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출산할 때 구경꾼들이 쓸데없이 너무 많아서, 질식당해 죽을 뻔했거든요. 그 때 트라우마가 생기셨기도 하고, 아직 아들이 없으셨기 때문에 '출산에 적합한 보다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다.'라는 논리로 조용한 트리아농 별궁으로 나오셨고, 딱히 여기에 태클을 걸 명분이 없었기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까지 트리아농 별궁에서 지내신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1780년에도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돌아가신 남편에 대한 지극한 애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전 황제였던 남편 프란츠 1세의 기일이 8월 18일이었기에, 전하께서는 8월 한 달간은 남편을 애도하며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매달 18일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애도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편에 대해 애도하기를 1765~1780년 거의 15년간 하셨답니다. 정말, 노국대장공주를 극진한 애도하던 고려 공민왕이 생각나는 대목이네요.


왼쪽은 남편의 초상화를 들고,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을 애도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은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어진이지요. 이 어진은 종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두 군주의 공통점은 남은 생애 동안 지극히 사랑했던, 그러나 더 이상 같은 세상에 살지 않는 배우자를 끝까지 애도하신 점입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잃은 기간 동안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가 이루어졌다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공민왕은 기간을 정해놓지 않고 노국대장공주를 애도했던 반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8월 1달, 매달 18일이라는 기간을 정해놓고 애도했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소견에는 이것이 큰 차이를 만든 것 같습니다. 공민왕께서는 자신이 얼굴을 비추지 않고, 신돈에게 전권을 너무 일임하셨기에 개혁의 반발도 심했고, 신돈을 죽임으로서 개혁이 중단되어 버린 반면,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는 애도 기간 빼고는 적극적으로 제국의 정무에 힘을 쏟음으로써, 개혁에 추진력도 받고, 저항도 상대적으로 약했으며 성과도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마테지 전하께서 완전 자리를 비운 8월 1달 동안 행정 공백이 없게 해 준 아들인 황제 요제프 1세와 제국재상 B.A.카우니츠 등의 공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전하께서는 정사에 손을 놓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애도하는 기간이 아닐 때는 부부가 함께 할때보다 미망인 기간에 더욱 열의를 갖고 정사에 임하신 면도 많이 보입니다. 분명, 1765~1780년의 '미망인 시기'는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민들에게는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여유롭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황제 요제프 2세 그리고 제국재상 B.A. 카우니츠 등과 뜻을 모아 ①종교의 지나친 간섭 배제, ②6~12세 어린이 의무교육, ③농민의 지위 향상 등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과 발전에 유익한 꼭 필요한 개혁을 이뤄낸 오스트리아 제국의 중요하면서, 긍정적인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1)가족간의 갈등, (2)남편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애도, (3)열의과 진심을 가지고 제국의 정무에 임하시다 보니 이어지는 과로, 이 3가지 요소가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건강을 15년간 악화시켜왔고, 서거하신 해인 1780년에도 63세의 고령에 이 건강에 좋을 리가 없는 루틴을 그대로 지켜왔습니다. 어떻게든 버텨내던 15년의 마지막은 1780년 11월 하순인 11월 24일에 시작됩니다.
※요제프 2세에 관한 작성자 슈바르첸베르크의 입장
앞으로의 스토리가 한동안 요제프 2세와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던 카를 대공의 양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저는 <카를 대공 편>에서는 요제프 2세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많이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서, 1765~1780년의 어머니와 아들이 공동통치하는 기간에서 요제프 2세의 실책을 두드러지게 묘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765~1780년 공동통치 기간은 모자간의 갈등을 제국 재상 B.A. 카우니츠 등 유능한 관료들이 중재해 가면서 모자의 뜻이 일치하는 방향을 관료들이 잘 찾아내서, 제국의 중요한 개혁을 이뤄냈고, 제국의 인구도 늘어나고, 제국수도 빈, 헝가리의 당시 수도 브라티슬라바 및 현재 수도 부다페스트, 제국의 최대항구 트리에스테(현재는 이탈리아령) 등에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대거 세워지며 도시인구도 상당히 증가하게 됩니다. 단지, 공동통치 기간의 막판인 1778~1779년 일어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요제프 2세의 대실책이었고, 그 대실책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두고 두고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강조한 것일 뿐입니다.
아래의 사진/ 풍경화 등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 발전상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즐감하세요!


우선,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기간(1740-1780) 헝가리 도시들의 발전을 알 수 있는 도시의 사진들입니다. 왼쪽이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서안 지구인 "부다 지구"에 있는 '부다 성(Buda Castle)'입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및 7년 전쟁에서 의리있게 도와준 헝가리에게 보답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뛰어난 건축 기술자 및 디자이너를 파견해서 건축했다고 합니다(1769년 완공). 그리고 오른쪽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헝가리의 옛 수도 브라티슬라바 중앙 광장 부근 구시가지(old town지구라고 하네요)입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단단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좋습니다. 중앙유럽 쪽은 옛 건물들이 궁전이 아니더라도 평균 규모가 큰 것 같습니다.


왼쪽은 18세기의 트리에스테 항구입니다. 부두 쪽이 많이 묘사되어 있고, 도시에 해당되는 곳은 반대편 해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charger8607님 글에서 본 기억으로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상당히 번영했다고 해서, 18세기 항구의 모습을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이 현재의 트리에스테 항(지금은 이탈리아령)의 모습입니다. 확실히, 100여년 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도시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항구가 없는 "내륙국" 오스트리아에 항구가 있다면 이런 이미지겠다! 라는 모습과 일치하는 듯 합니다.

이 풍경화는 1758년(즉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의 제국수도 빈을 묘사한 풍경화입니다. 그냥 보는 순간 "Fantastic"이라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이때의 과거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풍경화가 Bernardo Bellotto의 작품입니다.
2.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지막 6일(1780.11.24~1780.11.29)
1) 1780년 11월 24일: 급작스레 건강이 나빠지셔서 자리에 앓아누우시게 됩니다. 아들인 황제 요제프 2세는 어머니가 회복될 줄로 알았지만, 주치의 스퇴르크 박사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고 합니다.
☞요제프 2세는 어머니와 맨날 싸우기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아들 요제프 2세를 사랑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요. 다만, 요제프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다간 제국의 장래가 잘못될까 걱정되어서 "안된다, 안된다"하다보니 모자 관계도 서먹하게 된 것 같습니다.
2) 1780년 11월 26일: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서는 스스로 세상과 이별하실 것을 느끼시게 됩니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이셨기에, 담당신부에게 "종부성사(가톨릭 7성사 중 하나로 사망 전 치르는 전례입니다.)"를 요청합니다.
3) 1780년 11월 28일: "전하께서 서거하실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주치의 스퇴르크 박사가 공표합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주변에 있던 가족들은 모두 모여서 전하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되지요. 장남인 황제 요제프 2세, 사실상의 장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사위 알베르트 공작 부부, 그리고 전하의 친손자인 9세의 카를 대공은 분명히 같이 계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4) 1780년 11월 29일: 주치의 스퇴르크 박사와, 가족들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는 63년의 생애, 그리고 40년의 재위기간을 마무리 짓고 이 세상을 떠나 서거하십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묻혀 있는 합스부르크 황실 묘역에, 구체적으로는 15년 전에 서거하신 남편 프란츠 1세의 곁에 묻히게 됩니다.

합스부르크의 황실 묘역 카푸친 묘역 중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부부가 함께 안장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 조각들은 이미 마리아 테레지아의 미망인 시절(1765~1780)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중앙 밑의 대포와 대포알들은, 큰 전쟁 2번을 치렀음을 의미하고, 그 위에 목 없는 사람의 모습은 전몰자를 추모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 위쪽에 남녀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부부가 연애결혼으로 맺어진, 금슬 좋은 부부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해석대로라면 관 위에 있는 어린이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Part 3: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카를 대공에게 서거하신 할머니에 대해 알려주다>
feat.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돈 많은 비결
◎등장인물
1)마리아 크리스티나(38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실상 장녀/실질적인 카를 대공의 양육자)
2)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르(42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위)
3)카를 대공(9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의 조카)
◎시기: 1780년 12월 5일
◎장소: 빈 근교 락센부르크 저택
카를: 그렇게 강인하시던, 40년간 제국을 지탱하시던 할마마마께서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다니! 아직도 슬퍼요.
M. 크리스티나: 슬퍼하는 건, 얼마든지 괜찮아요, 카를 조카님. 다만, 슬프다고 해서 자기 할 일 안 하는 건 큰 문제가 있는 거에요. 잘 안 되더라도, 꾸역꾸역이라도, 자기 할 일은 해나가야 하는 것이랍니다. 사실, 알고 보면 어마마마께서는 지난 15년을 사랑하던 남편을 잃으시고 힘들게, 꾸역꾸역 버텨 내신 거에요.
알베르트: 그렇소. 나도 장모님께서 괴로워하시고 힘들어하시는 모습 많이 보았소. 모두들 그분을 "강인하고 무서운 여자"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장모님 역시 죽음을 두려워했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오. 그 분도 알고 보면 결국 연약한 면이 많으신 여성이자 인간이신 것이라오.
카를: 그렇군요. 그래서 저도 아직 약하다고 겁 먹을 것 없군요. 고모님께서 언제나 강조하셨던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조금씩 극복하고 강해지면 언젠가 정말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고모님께서 할마마마를 보고 생각해 내신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맞나요?
M. 크리스티나: 역시 카를 조카님은 느낌이 좋으시군요! 맞아요. 어마마마께서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았을 때는 '여자라고 얕잡아보고' 주변 모든 나라들이 우리 제국령을 뜯어먹으려고 쳐들어왔답니다. 그 때는 제국 자체가 멸망할 위기였어요.
알베르트: 장모님께서는 이 때 정확한 판단을 하셨소. 오스트리아와 항상 다투어 왔고, 문화가 전혀 다른 헝가리인만이 제국을 구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셨고, 1741년 10월 당시 갓난아기였던 현재의 황제폐하를 안고 헝가리 의회(Hungarian Diet: 헝가리 지주귀족들의 의회. 브라티슬라바에 소재)로 가셔서 "우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이미 운명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우리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힘을 합쳐 공동의 적 프로이센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대토지와 농장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헝가리 귀족들의 마음을 울리는 연설을 하셨다오.
카를: 헝가리 귀족들이 어떻게 할마마마께 답을 드렸나요?
M. 크리스티나: "우리의 생명과 피를 우리의 여왕폐하께 바치겠나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헝가리 여왕폐하 만세!"라고 칼을 뽑아들면서 답했답니다. 아래의 초상화에 그것이 묘사되어 있지요.

1741년 헝가리 귀족들의 충성맹세! 중앙에 계신 마리아 테레지아 헝가리 여왕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헝가리 귀족들의 오스트리아 군주에 대한 충성맹세는 일단 1848년까지 107년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제 생각에는 제가 오스트리아 황제라면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의리있는 힘센 민족은 헝가리인"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헝가리측이 "제국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우겠다."라는 자세가 딱 잡히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투력은 갑자기 급상승합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도,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헝가리인이 적극 가세해 주기 전에는 죽을 쑤다가, 헝가리인들이 적극 협력해주니까 무서운 군대로 변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알베르트: 장모님께서 헝가리 의회에서 거두신 이 대성공 이후에 헝가리군이 도착하기 전부터 오스트리아군이 용기백배해서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시작했소. 그리고 여기에 헝가리군이 합류하니,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은 공수밸런스가 딱 맞는 무서운 군대가 되었소. 결국 1748년 끝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슐레지엔 대부분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겼지만, 나머지 합스부르크 제국령은 월경지인 밀라노, 벨기에를 포함해서 모두 지켜냈소.
M. 크리스티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분명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국인 프로이센 왕국이 자신이 섬기는 황제국인 우리 제국을 공격한 하극상이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카를: 그래서 프로이센을 응징하기 위해 할마마마께서는 어떻게 하셨나요?
알베르트: 현재 제국재상인 B.A. 카우니츠 백작이 '프로이센을 확실하게 응징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동서남북으로 공격해서, 국가적인 포위섬멸전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 파트너를 전통의 우방인 영국에서 앙숙인 프랑스로 바꿀 필요가 있다. '고 장모님께 제안해서, "동맹의 역전" 외교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아래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왼쪽이 '동맹의 역전'이라는 "전통의 앙숙인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하극상을 벌인 프로이센을 포위섬멸한다."라는 기발한 기획안을 제출한 B.A. 카우니츠 당시 외무장관이었습니다. 이 동맹은 성사되고, 오른쪽 지도에서 큰 타원으로 연결된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뿐 아니라 북쪽의 스웨덴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여 동서남북으로 프로이센을 포위섬멸하는 거의 완벽한 구상이었습니다.
카를: 그렇군요. 우리 남쪽의 오스트리아, 서쪽에서는 프랑스, 북쪽에서는 스웨덴, 동쪽에서는 러시아. 완벽한 작전인 것 같아요. 이럼 프로이센은 나라가 멸망해야 정상인데, 왜 지금 프로이센은 살아 있고, 먼저의 전쟁에서 잃어버린 슐레지엔은 왜 되찾지 못한 것이죠?
M. 크리스티나: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뜻을 정하는 것은 사람이나, 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신다." B.A. 카우니츠 백작이 완벽한 계획을 짰지만, 프로이센을 멸망시키거나, 약소국으로 만드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프로이센은 수도 베를린만 두 번 습격 당하고(1757, 1760년), 1761년 북부 포메른 지방의 콜부르크 군항까지 함락되어 국가 멸망의 위기였답니다. 그런데, 1762년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서거하고 그 후계자인 독일계 표트르 3세가 즉위했어요. 이 사람이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빠돌이인 나머지, 갑자기 전쟁에서 발을 빼고 스웨덴까지 같이 전쟁에서 발을 빼게 만들었어요.
알베르트: 이러한 급작스런 변수에 우리 제국군이 멘탈이 나갔다오. 완벽하게 형성되어 있던 포위망 두 방향이 사라졌으니까요. 그틈을 타서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 제국에 불의의 일격을 가하지요. 1762년 10월 말 작센에서 일어난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슐레지엔 회복에는 성공하지 못했답니다. 프로이센은 영토는 어떻게 다 지킨 셈이 되었고요.
카를: 그럼 우리 오스트리아 제국은 7년 동안 괜히 돈만 쓰고 건진 것은 없었나요?
M. 크리스티나: 그건 절대로 아니랍니다. 아까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이 두 번 습격 당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1759년 8월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보유한 5만 병력 중 2만을 잃고, 대포는 거의 3/4인 172문이나 잃어버리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답니다. 이 때 프리드리히 2세는 내가 듣기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다고 해요.
알베르트: 즉, 프로이센에게 "우리 제국에게 또 대들면 박살을 내버리겠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소. 그리고 독일 영방 내에서도, 유럽 세계에서도 우리 오스트리아 제국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이 전쟁으로 전부 사라졌소. 그러니 비록 많은 사상자를 냈고, 전비 소모도 엄청났지만 무의미한 전쟁은 아니오.

이 그림은 1757년 헝가리의 A.하디크 장군에 의해 감행된 '1차 베를린 습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A.하디크 장군은 불과 5,000 병력으로 적국의 수도 베를린을 급습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수도 베를린 수비가 허술한 것을 알고, 들키지 않고 베를린까지 접근한 후 갑자기 베를린 성문을 열고 들이닥칩니다. 베를린에는 하디크 장군의 병력보다 약간 더 많은 5,500병력이 있었지만, 급습을 당해서 당시 베를린 시장 및 수비대장은 영문을 모르고 멘탈이 나가버립니다. 그것을 파악한 하디크 장군이 "우리 병력은 너희 수비병 다 학살해 버릴 수 있고, 원군 또 오니까, 여기서 굽히는 게 신상에 좋을거야!"라는 허장성세를 부리는 모습이 이 그림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약간 굽어져 있는 헝가리 특유의 곡도를 착용한 파란 군복을 입은 오른쪽 분이 바로 A.하디크 장군이십니다. 왼쪽에는 이 A. 하디크 장군의 위세에 설설기고 있는 프로이센의 베를린 시장 및 베를린 관료들이 묘사되어 있지요. A. 하디크 장군은 이렇게 프로이센 관료들에게 겁을 잔뜩 준 뒤에, '돈만 주면 안잡아 먹지.'로 회유해서, "20만~30만 탈러(출처마다 조금 다르네요)"를 받고 그냥 퇴각합니다. 프로이센의 원군이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하디크 장군의 베를린 습격을 프리드리히 2세가 알게 되었을 때 멘탈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굳이 말씀 안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1759년 8월 12일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준 쿠너스도르프 전투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프로이센이 자력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사라졌습니다. 사실 이러한 참화를 자초한 것도 프리드리히 2세의 전략미스입니다. 프랑스를 영국이 막아줄 것으로 믿더라도 북의 스웨덴, 동의 러시아, 남의 오스트리아로 3면포위 들어오는 상황에서, 공격력이 강한 스웨덴군 및 러시아군을 내버려둔채 방어력이 강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치명적인 전략미스입니다. 실제로 보헤미아에서 1756~1759년까지 어느 정도 위협을 주기는 했으나, 그 동안 스웨덴에게는 포메른에서 잔펀치를 계속 맞고, 러시아에게는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의 중심지에 강펀치를 맞으니, 프로이센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의 저울추가 확 넘어간 것이 이 쿠너스도르프 전투입니다. 7년 전쟁에서 이러한 치명적 판단미스가 있기에, 저는 프리드리히 2세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카를: 두 분 말씀은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결과도 그에 맞게 나온다"는 말씀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헌데,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전비 소모가 엄청 심했을 텐데, 우리 오스트리아 제국은 크게 재정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건 어떻게 된 일이지요?
M. 크리스티나: 좋은 질문이세요. 그건 우리 부부가 잘 알 수 밖에 없답니다. 잘 들어 보세요. 전쟁 자금은 분명 제국 정부에서 썼지요. 그럼 그 전쟁 자금을 어디다 썼을까요?
카를: 일단 생각나는게, 군인들 월급 주고, 먹여 살려야 하고, 군복도 공급해야 하고, 군마 구입에도 써야 하고... 쓸 데가 엄청 많을 거 같은데요.
알베르트: 카를 조카님, 정답이 될만한 거 두 개를 말했군요. 바로 '먹이는 것, 군마 구입' 생각해보시오.
카를: 그럼, 식량하고 군마 조달에 많은 돈이 쓰인다는 것인데, 그 식량은 곡창지대에서 날 것이고, 군마라면 헝가리산!
맞다! 헝가리 자체가 판노니아 평원이라는 큰 곡창지대이자 군마를 육성하는 거대한 목초지지요. 가정교사 클라이스트 부인이 지리학 시간 때 가르쳐 준 게 생각났어요!

18세기~19세기 헝가리가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판노니아 평원"의 모습입니다. 헝가리는 제가 빨간색 선으로 표시한 안쪽 영역을 '실질적으로 지주귀족들이 지배했습니다.' 서쪽으로는 알프스 산맥, 서남쪽(보스니아 쪽)으로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 동쪽과 북쪽으로는 카르파티안 산맥이라는 큰 산맥으로 막힌 25만~30만 제곱킬로미터의 거대한 평지로 된 엄청나게 큰 평원입니다. 토질도 중국의 황토와 유사한 '풍적토'라서 엄청 비옥한 토양입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평원은 대부분 농경지와 말을 키우는 목초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워낙 유럽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넓은 평원이고, 기후도 온화하고 일조량도 많아서, 곡물생산량도, 군마생산량도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왼쪽은 헝가리 전통 방식으로 말을 관리하는 헝가리 카우보이이고(역시, 헝가리가 아시아계다 보니 몽골과 스타일이 닮았네요.), 그리고 오른쪽은 드넓은 헝가리 평원에서 미국식 농기계로 땅을 관리하는 모습 같습니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입니다. 게다가, 강수량이 600mm 미만으로 건조한 곳이 많아, 큰 나무인 교목류(참나무, 전나무 등)이 자라기에 불리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식생은 초본(풀 종류) 위주로 형성되니까, 자연 초지는 말을 키우기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고, 건조하더라도, 도나우강과 티서 강이라는 거대 하천이 있기 때문에 관개 시설만 받쳐주면 농사는 끝내주게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곡물류는 밀이든, 귀리(말 사료) 든 전부 초본(풀 종류)이라 오히려 나무가 토지 영양분을 빼앗아가지 않으니, 곡물 농사 짓기는 이렇게 나무가 없는 곳이 유리합니다. 토질이 황토가 대부분에 어떤 곳에는 화산질 토양이 있는 꽤나 비옥한 토양인 것은 덤이고요.
알베르트: 그렇소, 헝가리 대귀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헝가리 평원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농장주 아니면 목마장 주인이요. 그럼 전쟁 때 전투용 식량과 군마를 엄청 팔아서 돈을 많이 벌지 않았을까요?
카를: 네. 당연하겠죠. 그런데 고모부님, 그럼 헝가리 대귀족이 돈을 많이 모으는 건데 그게 어떻게 우리 제국 재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M.크리스티나: 내가 대신 대답할게요. 두 번째 전쟁인 7년 전쟁 종료시점인 1763년 당시 헝가리 대지주들은 돈은 많은 반면에 돈을 쓸 곳이 마땅치 않은 문제가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요,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7세기 말에는 대튀르크 전쟁의 영향으로 원래 수도인 부다페스트가 심하게 파괴되어서, 그 고귀하신 귀족분들이 살 집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분명 돈은 많은데, 돈에 맞지 않는 소박한(?) 거주지를 갖고 있는 헝가리 귀족들이 많았어요.
카를: 그럼 헝가리 귀족들은 우리 제국수도 빈에 넘쳐나는 것과 같은 거대한 그림같은 저택들 지어서 살고 싶었겠어요.
알베르트: 그래서, 서거하신 장모님께서 헝가리 귀족에게 "열심히 제국을 도와주면, 여러분의 숙원인 부다 성(Buda Castle)을 이전보다 멋지게 복원시켜 드릴게요."라는 약속을 하셨던 것이오.
M. 크리스티나: 그리고 어마마마께서는 약속대로 부다 성을 1765-1769년 4년만에 헝가리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짓도록 하셨답니다. 정말 최고의 건축업자들과 건축디자이너들이 그 부다 성에 투입되었어요.

다시 한 번 보여드리는 아름다운 부다 성입니다. 완공년도는 1769년,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시기, 구체적으로는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되어 힘들어하시던 시기입니다.
알베르트: 이렇게 부다 성 재건계획을 알게 되자, 헝가리 귀족들은 머리 좋은 사람부터 "아,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 오스트리아 건축업자를 고용해서, 내 거대 저택을 지으면 되는구나!"를 깨닫기 시작하게 되었소. 그리고, 오스트리아 건축업자들이 헝가리 대지주들에게 거액을 받고 헝가리의 건축 사업에 투입되기 시작되었소. 이렇게 해서 오스트리아 건축업자들에게는 헝가리가 "대박 거래처"가 되기 시작했소.
카를: 마치 먼 훗날 1970년대 코리아(Korea)란 나라에서 오일달러로 벼락부자된 중동 국가들 건축/토목공사로 외화를 엄청 획득하는 걸 보는 것 같아요.
M. 크리스티나: 네, 바로 맞추셨어요. "헝가리의 건설 붐"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건축업자들과, 그리고 건축 디자이너들, 예술가들, 숙련 노동자들이 돈을 벌고, 그 벌어온 돈들이 오스트리아로 풀리기 시작하면서, 오스트리아 본토 경제도 활력을 띄게 된 거에요. 자연히 제국의 세수도 회복이 되니 전쟁으로 인한 국가 부채도 금방 갚고, 재정도 건전화된 거에요.
알베르트: 사실, 우리 부부도 "헝가리 건축 붐"을 이용해서 돈을 많이 벌었소. 그 일은 사실 나보다는 미미 여대공이 많이 했지요(미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애칭)
카를: 고모님, 어떻게 돈을 많이 버신 거에요?
M. 크리스티나: 일단, 헝가리 귀족들하고 좋은 건축업자/예술가/디자이너들을 연결시켜 주면서 중개료로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진짜 중요한 고위귀족에게는 제가 직접 그린 작품을 제공하기도 하니까, 엄청 높은 값을 주시더라고요. 그러다가 건축 사업을 좀 직접 지켜보고 나서는 가끔씩 직접 고급 건축업을 해보기도 한답니다.
알베르트: 예를 들면, 헝가리의 현 수도 브라티슬라바의 '브라티슬라바 성'의 상당 부분은 미미 여대공이 지은 것이오. 그리고 그 성 안에서 우리가 모은 미술품 컬렉션인 "알베르티나 컬렉션"의 전시회를 함으로써, 헝가리 귀족들의 문화적 욕구도 충족시키고, 관람료로 돈도 쏠쏠하게 벌었소.


왼쪽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헝가리 총독으로 부임하던 시절 거주하던 브라티슬라바 성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양식으로 복원한 계단이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원래의 브라티슬라바 성은 나폴레옹 전쟁, 구체적으로 말하면 1809년에 큰 피해를 받고 방치되어 있다가(헝가리 왕국 수도가 브라티슬라바→부다페스트로 옮겨져서, 브라티슬라바의 중요성이 점점 감소했기에, 자연히 브라티슬라바 성도 복원되지 않고 방치되었습니다. 1957년부터(공산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시절입니다.) 서서히 복원되어 1997년에야 지붕까지 다 완성되어서 지금의 브라티슬라바 성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카를: 고모님! 대단하세요. 그럼, 세간에서 말하는 할마마마께서 고모님만 이상하게 편애했다고 구설수에 오르는 건 완전 부당한 평가였군요. 할마마마께서는 능력대로 지참금을 주셨던 것이고, 헝가리 귀족들 상대할 일도 많으니까 품위 유지를 위해 락센부르크 대저택도 고모님 소유로 한 것이군요.
알베르트: 사실, 우리 부부가 연애결혼이지만, 100% 연애결혼은 아니오. 장모님께서 나를 사위로 받아주신 큰 이유가 바로 헝가리 귀족 상대하기에 적합해 보였기 때문으로 나는 생각하오. 아무래도, 내가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기마술에 익숙하고 기마술 및 기병 전술을 좋아하니, 기마술 전통을 중시하는 헝가리인을 상대하기 적합하겠다 싶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오.
카를: 확실히 고모부님께서는 고모님과 결혼하자마자 헝가리 총독으로 부임하셨죠(1766년). 제가 봤을 때 "오스트리아 총독"의 역할은 그 지역에서 압제하고 군림하는 게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 비위 맞춰주는 게 "오스트리아 총독"들의 역할 같은데요. 그런 면에서 확실히 할마마마께서 고모부님을 "헝가리 귀족 비위 맞추기 좋다"고 생각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M. 크리스티나: 어머나! 벌써 "오스트리아 총독"의 역할을 파악하셨군요. 맞아요. 오스트리아 총독은 훗날인 1910~1945년 코리아(Korea)를 압제하던 자아판(Japan:일본의 독일어 발음) 총독처럼 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럼 그 지역에서 시민봉기 일어나서 매우 골치 아파지니까요. 벨기에 총독으로 부임하게 될 우리 부부가 할 일은 그냥 현지인들 자치 최대한 보장하고, 치안 유지하고, 불법행위만 단속하고, 현지인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들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들어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 이 정도에요.
알베르트: 맞소. 그것이 전임 총독이셨던 전 황제 프란츠 1세 폐하의 동생 되시는 샤를 알렉상드르 로렌 공의 노선이었고, 벨기에인들도 그분을 존경하고, 따랐소. 우리는 그분의 노선을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하오.
M. 크리스티나: 어느새 얘기하다 보니 밤이 깊었네요. 카를 조카님도 이제 피곤해 하는 기색이 있어요. 이제 마무리 짓는 뜻에서 서거하신 어마마마, 제국의 국모의 업적을 간단하게 요약해 주시겠어요? 테셴 공작 각하.
알베르트: 알겠소. 아래와 같이 정리하겠소.
1. 군사적+외교적 업적
1)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서: 제국 멸망의 위기에서 그 동안 사이가 좋지 않던 '헝가리 귀족'들의 지지들 화끈하게 받아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제국령을 지켜냄.(슐레지엔은 88% 상실. 테셴 등 3개 구역은 지켜냄)
2) 7년전쟁(1756-1763)에서: "동맹의 역전" 외교로 프로이센을 동서남북으로 완벽하게 포위공격해서, 프로이센이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혼내줌.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다가 스웨덴·러시아에게 본토를 탈탈 털린 프리드리히 2세의 실책까지 겹쳐서 프로이센은 유능한 장교 및 인재 대거 손실 및 국토 중심부가 초토화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음. 슐레지엔은 탈환하지 못했으나, 원래 프랑스에게 할양하기로 했던 벨기에는 지켜내서, 영토 변동상 크게 나쁘지는 않다고 봄.
3)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해서 거대 소금광산 있는 비옥한 곡창지대 갈리치아 획득(기록으로는 폴란드 분할을 기획한 쪽은 장남인 황제 요제프 1세와 제국재상 B.A. 카우니츠라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폴란드 분할을 반대했습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서거시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표기한 지도입니다. 주황색 계열로 표기된 것이 오스트리아 제국령입니다. 다른 곳보다 진하면서 제가 G라고 표기한 곳이 1차 폴란드 분할(1772년) 때 획득한 갈리치아(Galicia)입니다. 그리고 'P.S'라고 표기된 보라색 빗금으로 된 지역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 때 프로이센에게 상실된 슐레지엔(프로이센령 슐레지엔)이고요. 'A.S'라고 표기된 부분이 오스트리아가 지켜낸 슐레지엔 3개 구역(오스트리아령 실레지아)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중서부 쪽에 있는 'T'라고 표기된 노랑색 땅이 합스부르크가의 차남 레오폴트 2세가 1780년 당시 다스리고 있는 "토스카나 대공국(영어로는 Grand Duchy of Tuscany)"입니다. 토스카나 대공국은 합스부르크가의 상속지이기는 하나, 합스부르크 제국과는 별개의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이기에 다른 색깔로 표기된 것입니다.
2. 내정에서의 업적
1) 제국의 세수를 늘려, 재정을 탄탄히 함. (재위시 세입: 약 1,700만 플로린→재위말 세입 약 5,000만 플로린)
2) 건축업이 크게 발달, 빈·브라티슬라바·부다페스트·트리에스테 등 제국의 주요 도시가 화려한 바로크/로코코 건축물로 가득차게 됨. (개인적인 소견에는 건축업의 발달은 전후 재정복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3) 관료제의 내부 개혁 성공, 위계질서와 분업이 확실한 행정조직 확충
4) "정당한 보수가 주어지는 사회 건설"
a. 그 동안 확실한 보수가 없던 그랜처 부대(세르비아인 정예병)가 정부에서 보수를 받게 됨
b. 농민들이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 프란츠 2세 시대가 되었을 때 확실하게 농민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5) 평민에게 신분 상승 사다리 제공
ex) 마리아 테레지아 사관학교: 연 200명 뽑는데, 귀족 100명·평민 100명을 뽑습니다. 당시 평민으로서는 "장교"가 된다는 것은 군인 귀족과 대등한 계급이 된다는 것이고, 나아가 귀족 계층으로 진입할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뽑는 귀족은 보통 고아가 되었거나, 가난하게 되어 가문 내에서 "군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귀족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보헤미아의 군인귀족 백작가문 소생이나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돌볼 사람이 없어, 마리아 테레지아 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은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을 들 수 있습니다.(라데츠키 행진곡의 그 분 맞아요.)
(빈 필하모닉에서 아르헨티나 출신 "바렌보임 지휘자"의 연주로 연주되는 라데츠키 행진곡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라데츠키 장군이 80세 되시는 1845년 헌정한 곡입니다. 라데츠키 장군은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라데츠키 아빠"라고 불리셨답니다. 이 즈음 되셔서는 "라데츠키 할아버지"가 별명이었겠지요. 이 곡을 들으시면서 "씩씩한 할아버지 장군, 라데츠키 장군"의 모습을 연상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