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오스트리아 제국 인물 열전- '라인(Rhine)의 수호신' 카를 대공 [유년기- 6편] 합스부르크 황실 남매간 불화의 충격적인 이유(남성혐오? 동성애?)
1.카를 대공에 대해서 (1~3편)
1771년 9월 5일 레오폴트 2세의 3남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카를 대공은 피렌체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1771~1779).
그러던 1779년 11월 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어린 카를의 양육을 맡게 된 이후로 카를 대공은 자신의 높은 지위를 자각하여 자신감 있는 자세를 갖게 되고, 승마 기초훈련을 통해 상당히 건강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교사 클라이스트 남작부인 등을 통해 좋은 교육을 받아 지적으로도 성숙하게 됩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성장하던 중, 큰형 프란츠(후일의 프란츠 2세)의 말을 듣고 "좋은 군인이 되어볼까?" 하는 꿈도 갖게 됩니다.
2.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해서(4~5편)
1740년~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사방에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적군이 침공하는 위기를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헝가리"와의 유대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제국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방어해냅니다.
그리고 산업을 발전시키면서도,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여, 강한 제국군을 육성할 기반을 키우고 나서, "동맹의 역전" 외교를 통해 황제국을 공격한 하극상을 벌인 주범 프로이센을 동서남북으로 포위섬멸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포위섬멸 계획을 실행한 전쟁이 7년전쟁(1756~1763)이었는데, 프로이센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웠으나, 중요 동맹인 러시아에서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고, 프리드리히 2세 추종자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함으로써, 프로이센은 영토는 다 지켜낸 채 전쟁을 마무리합니다. 단, 전쟁 중간에 베를린 성문이 두 번 따이고, 국토가 초토화되는 등 프로이센의 피해도 막대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도 더 이상의 전쟁은 피하는 쪽으로 성향이 바뀝니다.
1765년, 남편 프란츠 1세의 서거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주었고, 이후 15년간 검은 상복만 입고 지내는 등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계몽사상 및 팽창주의에 심취한 장남인 황제 요제프 2세와의 정치적 견해차 등으로 인한 갈등으로, 더욱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신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제국재상 B.A. 카우니츠 등 유능한 관료들이 위의 모자간의 정치적 갈등을 조율해 가면서 제국의 발전과 제국민의 복지 향상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래서 1765~1780년은 전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적으로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안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1778년 7월 군권을 가진 아들인 황제 요제프 2세가 바이에른을 침공(바이에른 계승 전쟁)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력을 다해 전쟁을 중지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 노력을 기울입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는 프리드리히 2세와 뜻이 맞아, 1779년 5월 13일 '테셴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시킵니다.
요제프 2세의 바이에른 침공은 "황제가 자신을 선출하는 선제후를 공격한 비상식적인 행동" 이었기에, 독일 영방 및 국제 사회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높아져 갔고, 이로 인해 그렇잖아도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하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1780년 11월 29일 향년 63세로 40년의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서거합니다.
1. 서문
오늘 이야기는 <카를 대공-유년기편>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이로서 카를 대공의 9세까지(1771~1780)의 성장 과정을 서술했고, 카를 대공의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회고해 본 <유년기편>이 끝나게 됩니다.
<유년기편>의 다음 편은 <벨기에편>인데 이 시기는 1781~1792년에 해당합니다. 카를 대공은 이 시기에 연령이 10~21세이고, 차츰 군인으로 성장해가며, 제국군에 입대하고(1788년으로 추정), 군생활 초반을 보내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카를 대공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기에 카를 대공을 스토리의 중심으로 내세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를 대공의 고모이자 실질적인 양육자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을 <벨기에편>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놓고 스토리를 풀어갈 생각입니다. <벨기에편>의 중심 플롯은 황제 요제프 2세와 벨기에 총독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대립으로, 중앙집권적이고 억압적인 황제 요제프에 맞서,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자치권과 종교적 전통을 빼앗긴 벨기에인들을 여러 방법으로 달래면서,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요제프 2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갈등에는 보다 근본적이고, 상당히 충격적일 수도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갈등의 근본 원인에는 요제프 2세의 첫 배우자였던 파르마의 이사벨라(1741~1763, 1760년 결혼)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이야기를 '파르마의 이사벨라'에 대한 고찰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2. 파르마의 이사벨라(Isabella of Parma)-결혼 전 성장기
1)이사벨라의 부모 소개 그리고 정략결혼에 대해서
이사벨라의 아버지는 스페인 펠리페 5세(루이 14세의 손자)의 4남 펠리페(1720~1765)이고, 어머니는 루이 15세의 큰딸로써, 프랑스에서는 마담 루아얄(Madame Royale: 국왕의 결혼한 큰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경칭)이라 불리는 루이즈 엘리자베트(1727~1759)입니다. 이 결혼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왼쪽이 이사벨라의 아버지 펠리페의 초상입니다. 이 때는 1765년 파르마 공작이실 때 그린 초상입니다. 검정색의 애견이 눈에 띄네요. 오른쪽은 이사벨라의 어머니 L.엘리자베트의 초상인데요, 역시 파르마에 거주하실 때, 즉 파르마 공작부인일 때 그린 초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귀여운 애견이 왼쪽 아래에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18세기 유럽 귀족 문화에서 '애견'은 빠뜨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1)프랑스 부르봉(어머니)-스페인 부르봉(아버지), 즉 부르봉가끼리 4촌간 혼인입니다.
(2)1739년 결혼했을 때 연령이 아버지 펠리페가 19세, 어머니 L.엘리자베트가 12세였습니다.
(3)명색이 대국 프랑스의 큰따님, 결혼 후 마담 루아얄(Madame Royale)이 되시는 분인데, L.엘리자베트에게 지참금이 지급되지 않아서, 한동안 L.엘리자베트는 스페인 왕비인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심하게 당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소견>
(1)의 사촌끼리 혼인이야, 합스부르크·부르봉 모두 흔한 일이라 그렇다 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신부(bride) L. 엘리자베트가 불과 12세(초등학교 6학년)에 시집갔다는 것입니다. 무슨 고려 몽골 간섭기나 조선 초기 처럼 "외국에 처녀 빼앗길까봐 무서워서 일찍 결혼시키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대국 프랑스가 뭐가 아쉬워서 귀한 제1왕녀의 결혼을 서두른 것인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는데요.
(3)의 왕비인 시어머니가 L.엘리자베트를 구박한 이유를 보고 약간의 조사를 더 해 보았습니다. 일단 1739년 프랑스의 재상이자 실권자는 A.H.플뢰리 추기경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지요. 그리고 A.H.플뢰리 추기경은 프랑스의 만성적 재정난을 일정부분 해결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문위키 보니까 스페인 왕비인 시어머니에게 구박 당한 이유가 하나 더 있더군요.
"영국과의 전쟁(1739년, '젱킨스의 귀 전쟁')에 원군도 파견 안 하는 주제에, 지참금도 없이 오다니!"


왼쪽 그림에 플로리다의 스페인 해안경비대에게 밀수 혐의로 걸려서 스페인의 J.L.판디뇨에게 귀를 잘린 영국의 "로버트 젱킨스(Robert Jenkins) 선장이 나와 있습니다. 이 R.젱킨스 선장이 1738년 영국 의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해서, 영국 의회는 "야만적인 스페인을 응징하자"고 결의했고, 이로 인해 오른쪽 그림에서 묘사된 전쟁 1739년 일어나게 됩니다. 이 전쟁은 귀를 잘린 R.젱킨스 선장의 이름을 따서 "젱킨스의 귀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즉, A.H.플뢰리 추기경이 실시한 재정난 해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어마어마한 국가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되도록 전쟁에 안 말려드는 것 까지야 그렇다 치겠습니다. 지참금도 없이 12세 어린 신부를 급하게 시집 보냈다는 것은 "왕실 예산마저 최대한 아껴서 어떻게든 프랑스 재정난을 해결한다."는 A.H. 플뢰리 추기경이 얼마나 처절하게 재정 문제에 열중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이렇게 이상하게 맺어진 부모의 결혼이 이사벨라의 성격 및 성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는 점입니다.
2) 이사벨라의 출생 및 성장환경
1741년 12월 31일, 위에서 언급드린 펠리페 5세(루이 14세의 손자)의 4남 펠리페와 프랑스 부르봉 가의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큰딸로 마드리드에서 태어납니다. 즉, 이사벨라는 원래는 스페인 공주(Infanta of Spain)였습니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 L.엘리자베트의 나이는 불과 만 14세, 중학생 나이에 출산한 셈이였습니다. 출생 후 1748년까지는 스페인 궁정에서 지내게 됩니다.

스페인 궁정에 있을 때 이사벨라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좀더 큰 여자아이가 이사벨라로 보입니다. 왼쪽은 이사벨라의 사촌인 나폴리의 마리아.I.안나입니다. 역시 18세기 유럽에서는 어딜가나 애견은 빠지질 않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인 L.엘리자베트가 마담 루아얄의 고귀한 몸으로 "군주가 되기 어려운 왕족"과 결혼한 것에 불만이 많아서, 프랑스 친정에 계속 로비를 넣습니다. 그리고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종결되자, 아헨 조약이 체결되는데, 그 조약의 골자는 "프랑스가 점령한 벨기에 지역과 오스트리아-사보이아 연합군이 점령한 북이탈리아 지역을 교환한다. 벨기에는 도로 오스트리아령으로, 북이탈리아는 제노바, 모데나 등은 원래대로 독립국으로 하고, 오스트리아령인 파르마는 부르봉가에 귀속시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편을 군주로 만들고 싶었던 L.엘리자베트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남편인 펠리페가 "파르마 공작 필리포(Fillipo:이탈리아어)"로 새로 얻은 파르마 공국을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748년부터는 이사벨라도 파르마에서 살게 되었고, 아버지가 군주인 파르마 공작이기에, "파르마의 이사벨라(Isabella of Parma)"로 불리게 됩니다.

북이탈리아에 위치한 파르마 공국의 위치입니다. 제가 빨강 색으로 테두리를 친 오스트리아보다 약간 더 진한 분홍색 영역이 "파르마 공국"에 해당됩니다.(제가 지도 위쪽에 있는 ★표 있는 4개 소국에서도 "Duchy of Parma"는 빨간색 테두리를 쳐서 구분해 놓았습니다.)
이사벨라는 어머니와 나이차이가 불과 14살이었고, 동생들과는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지라 어머니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부관계에서는 아내인 마담 루아얄인 L.엘리자베트 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영문위키에서 확인한 바로는 "남편 펠리페의 성격이 28살 먹고도 15살 소년 같았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오히려 7살 연하인 아내 L.엘리자베트 쪽이 주도했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사벨라의 어머니인 L.엘리자베트가 부부관계의 주도권, 나아가 가족의 주도권을 잡게 된 요인으로 아내 쪽이 남편보다 부르봉가에서 차지하는 요인이 우위에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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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엘리자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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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필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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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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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이사벨라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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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사벨라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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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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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본가(main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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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분가/방계(cadet bra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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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 아들(or 몇 번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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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의 장녀
(마담 루아얄:Madame Roy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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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5세의 4남
(펠리페 5세 두 번째 왕비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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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에서 보듯 같은 부르봉 가문이라도 아내인 L. 엘리자베트 쪽이 가문 내 지위도 본가 출신으로 우위이고, 게다가 넷째인 남편과 달리 맏딸이기 때문에 출생 순서에서도 우위에 있습니다. 이처럼, 부부의 성격적 특징과 부르봉 가문내 지위 차이 때문에 이사벨라의 가족은 오히려 어머니 쪽이 주도권을 잡는 집안 분위기였습니다. 이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18세기 유럽 대다수 지역과 크게 달랐던 반면, 여성 쪽에 주도권이 있다는 점에서는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를 중심으로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내던 당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분위기와 유사한 면이 있었습니다.


왼쪽은 이사벨라가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초상화입니다. 모녀가 상당히 닮았는데, 단지 딸 쪽이 좀더 홀쭉한 것으로 보이네요. 오른쪽 그림에서는 제가 녹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연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물이 이사벨라입니다. 이사벨라는 지도로 보이는 종이를 가지런히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1757년 그림이니 이 때 이사벨라의 나이는 16세입니다. 당대에는 이사벨라의 외모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여기서도 이사벨라 아래쪽의 강아지가 눈에 띱니다. 이사벨라 위쪽에는 앵무새도 있군요.
3)부르봉가의 이사벨라가 합스부르크가에 시집가게 된 이유
'동맹의 역전' 외교가 성사되어 프랑스(부르봉가)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가 우호관계로 바뀌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 사이의 정략결혼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 결혼 문제 때문에 결혼 적령기가 된 이사벨라는 어머니와 함께 베르사유 궁정에 찾아가게 됩니다. 베르사유 궁정에서 논의된 결과,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요제프 2세(1741~1790)와 이사벨라(1741~1763)가 동갑내기이기 때문에 결혼하기 좋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합스부르크가에 황태자비로 시집가게 됩니다.
4)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사망과 이사벨라가 받은 충격
베르사유에 이사벨라 모녀가 머무르던 1759년 천연두가 베르사유에 유행했고, 어머니 L.엘리자베트는 1759년 12월 6일 천연두로 인해 사망합니다. 이 때 L.엘리자베트의 나이는 32세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사망으로 이사벨라는 크게 상심하였고, "나도 어머니처럼 오래 살지 못할거야."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파르마에 있을 적에 점쟁이 집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로부터 "23번째 생일을 넘기기 어려우실 겁니다."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결혼 전 파르마의 이사벨라의 성장과정에 대한 저의 생각
(1)부부관계에서 어머니 쪽으로 너무 균형이 기운 집안에서 자라서 "왜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던 듯 합니다. 한편, 거세 가수 파리넬리는 "그곳의 여자들은 분별은 없으면서도 "유난히 조용한 여성들"처럼 처신해야 했다."고 합니다. 여성에게 억압적인 원래 파르마의 궁정 문화와 이사벨라가 가진 "왜 남성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의 충돌이 성장기 내내 이사벨라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2)지적인 활동, 학문 탐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757년 가족 초상화에도 지도를 가지런히 잡고 들여다보는 모습이 있다는 점이 일반적인 귀족 여성의 초상화의 모습과 다릅니다. 합스부르크가로 시집가서도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죽이 잘 맞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지적인 두뇌,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정략결혼"이라는 왕족/귀족의 숙명에 대해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L.엘리자베트의 경우에는 12세에 자기 뜻과 관계없이 대국인 프랑스 왕국의 맏딸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장래 군주가 되기 어려운 남편'에게 시집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경멸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scornful grimace)"고 합니다. 14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어머니 L.엘리자베트와 맏딸 이사벨라의 관계는 각별했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X같은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들었을 확률이 매우 높아보입니다. 게다가 어머니 L. 엘리자베트와 32세의 이른 나이로 사별했기 때문에 "이놈의 정략결혼만 아니었으면 소중한 어머니와 이렇게 일찍 이별할 일은 없었다!"는 정략결혼에 대한 강한 피해의식을 가졌을 가능성도 상당합니다.
(4)집안에서 어머니 말고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머니를 그녀의 나이 18세인 1759년 잃었으니, "나도 어머니처럼 일찍 죽을거야"라는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귀족 여성들이 '무도회, 사교모임'에 관심이 많은 반면 이사벨라는 '지적 탐구,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나와 관심사가 맞는 여성이 없네. 어딜 가야 나와 말이 통하는 여성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외로움도 많이 느꼈을 것 같습니다.
3. 이사벨라와 요제프 2세의 결혼(1760년)
이사벨라는 파르마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제국수도 빈까지 이동하는 데, 이 때 이사벨라의 호위를 담당한 분이 리히텐슈타인 공, 요제프 벤첼 1세(현재 리히텐슈타인 공국을 다스리시는 한스 아담 2세의 선조가 되시지요.)이었습니다.


왼쪽은 이사벨라를 호송한 리히텐슈타인 공 요제프 벤첼 1세의 초상화입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을 바쳐오던 대표적인 제국의 군인귀족가문이었습니다. 원래 영지는 현재의 리히텐슈타인+보헤미아에 1600㎢이었는데, 1차대전 패배 후 보헤미아의 넓은 영지는 잃고 현재의 160㎢(서울특별시의 1/3 정도 크기입니다.)의 작은 영지만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요제프 2세(당시 황태자)는 아름다운 이사벨라의 초상을 보고 또한 그녀의 지적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 신부(bride)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포함한 다른 합스부르크 가족들도 대부분 새 신부 이사벨라를 높게 평가했고, 그래서 먼 길을 온 이사벨라는 합스부르크 황실가족과 제국수도 빈 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황태자의 결혼식답게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당시 황태자인 요제프 2세와 황태자비 이사벨라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당대의 회화 자료들입니다. 왼쪽은 결혼 후 이루어진 성대한 저녁식사입니다.(현재의 호텔뷔페 형식 같군요. 하객들의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오른쪽은 결혼 축하 콘서트인데(당시에는 클래식 음악 콘서트겠지요.) 맨 앞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주로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는 분들이 합스부르크 황실가족이라 합니다.
4. 이사벨라와 요제프의 결혼 생활 및 합스부르크 궁정생활
이사벨라는 당대에 미인이라고 평가받았고 지적 수준과 예술적인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지적 탐구(전반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화학실험 같은 학술적 활동을 엄청 좋아합니다.)와 예술을 좋아하는 합스부르크 황실로부터 제대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시월드의 고통' 같은 것은 이사벨라에게는 사실상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왼쪽이 새신랑인 황태자 요제프 2세(1741~1790), 오른쪽이 새신부인 황태자비 파르마의 이사벨라(1741~1763)입니다. 외모로만 본다면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일단 남편 요제프 2세와의 관계에서부터 발생합니다. 요제프 2세는 이사벨라를 사랑하기는 했으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려 했고, 이사벨라가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761년 이사벨라는 임신하자 "임신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당대에 "임신, 출산, 다산"을 여성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와는 상반된 것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요제프 2세는 아내가 "임신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여기서부터 결정적으로 부부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이사벨라가 임신했을 때 "요절한 불행한 어머니의 삶을 답습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을 꽤 강하게 받았아서 임신 우울증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사벨라는 임신기간 내내 힘들어했고, 간신히 1762년 3월 첫 딸 "마리아 테레지아(당연히 할머니 이름 딴 것이지요.)"를 출생합니다. 출산 이후에도 6주간이나 앓아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시녀 및 수행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길어야 1주일이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자기 일을 하는 일반적인 18세기의 귀부인과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후에도 1762년 8월, 1763년 1월 두 번의 유산을 겪게 됩니다.

요제프 2세와 이사벨라의 첫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1762~1770)입니다. 안타깝게도 만 8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해서 요제프 2세는 자손이 단 1명도 없게 됩니다.
이처럼, 임신 우울증 등 임신으로 인한 힘든 과정·점점 악화되는 건강, 그리고 반복되는 유산으로 자기보호본능 차원에서 이사벨라는 남편과의 잠자리를 점점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인 요제프 2세에게 "내 건강 안 좋으니까 각방쓰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아직 둘 사이에는 아들 1명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사벨라 입장에서 남편과의 잠자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하는 "의무이자 고통"이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합니다.
한편, 합스부르크 황실 가족 중에는 이사벨라와 매우 죽이 잘 맞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바로 이사벨라의 손아래 시누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였습니다.
5.이사벨라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도대체 무슨 관계죠?(절친? 동성애? 성적 접촉?)
일단 요제프 2세, 이사벨라,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출생년월일부터 표로 만들어 보여드리고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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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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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의 이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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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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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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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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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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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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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기준으로 보면 요제프 2세와 이사벨라가 동갑이고 M.크리스티나가 그보다 1살 아래니까, 나이만으로 봤을 때는 요제프와 이사벨라가 가까워야 하고, M.크리스티나는 1살이라도 동생이니까 거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분들이 살았던 곳은 유럽의 정중앙 오스트리아 제국수도 빈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만 나이' 기준이고요, 이렇게 되면 요제프-이사벨라의 차이는 '9개월 반(약 290일)' 차이인데, 이사벨라-M.크리스티나는 '5개월 반(약 165일)'차이니까 오히려 나이 면에서도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가 오히려 가깝습니다.
이 표를 굳이 보여드린 것은 태어난 날짜가 불과 5개월 차이였던 것이 취향과 재능이 상당부분 일치하는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의 성향과 맞물려서 두사람의 관계가 '절친'을 넘어선 특이한 관계까지 가 버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는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①불과 5개월차밖에 안 나는 사실상 동갑내기인데다, ②지적·예술적으로 뛰어난 소양을 가져서 대화가 잘 되고, ③서로의 미모를 인정하며 칭찬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시누이-올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가까워졌습니다. 거기에, ④이사벨라가 정신적으로 남편 요제프 2세를 멀리하게 된 것이 더욱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깝게 만드는 촉매가 되기도 했고요.
거기에 이사벨라가 성장 과정에서 갖고 있었던 "왜 여성이 남성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스스로의 신념과 이에 상충되는 남편 요제프의 가부장적 태도(왜 임신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울해하냐는 등)가 맞물려 ⑤이사벨라의 마음에는 "남성혐오"의 성향도 생겨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저술한 저서 중 사후에 발견된 <남성론>에는 이런구절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실속 없고 이기적인, 그리고 여성의 속성인 이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자들이자 "무익한 동물들"이다.
파르마의 이자벨라 <남성론>에서
18세기 유럽, 그것도 전통적 요소가 강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며느리가 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표현이 매우 강해서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사벨라가 어머니 입김이 강한 가정에서 성장했고, 시집와서도 여성 역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합스부르크 궁정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런 급진적인 사고를 갖고, 남성을 강하게 비난하는 표현까지 그녀의 저서에서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이유 등으로 인해, 아래 그림과 같은 관계가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 사이에 생겨납니다.

이 가계도를 만들 때 일부러 이사벨라와 요제프를 멀게 배치하고, 이사벨라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거리를 가깝게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이사벨라가 정서적으로 남편인 요제프를 멀리 했고, 시누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가까이 했다는 것입니다. 점선으로 연결된 핑크색 ♥표시는, 이사벨라가 M.크리스티나에게 보낸 쪽지(note)로 보았을 때 일단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의 관계는 romantic한 관계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 같습니다. 그리고 영문위키피셜로는 "possibly sexual"인데, possibly 부사의 뉘앙스는 약 60~70%이상 확률이라는 뜻이니, 둘 사이에 성적인 접촉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고,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의 저자 마틴 래디 박사님은 "분명히 성적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 사이의 성적 접촉에 대해서는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심증이야 있으나 결정적 증거는 없으니 "판독불가!"로 판정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별명:미미)와 이사벨라가 주고받은 행동
(1)엄청나게 많은 간단한 편지(쪽지: note)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사벨라→미미 쪽으로 보낸 것만 200통이고, 미미→이사벨라 쪽으로 보낸 편지는 다 불태워버려서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심지어 종교의식(가톨릭 미사) 중에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3)보통 이사벨라의 남편 요제프 2세가 사냥을 나간 사이 이사벨라와 미미의 밀회가 이루어졌는데, 날씨가 나빠 요제프가 사냥을 나가지 않으면, 둘의 밀회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4)심지어 둘은 임시 화장실조차 같이 사용했고, 거기서도 '선물을 주고받았다(gift each other)'라고 전해집니다.


18세기 유럽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단서가 있는 장소와 유물입니다. 왼쪽은 18세기 초 영국의 좌석 3개짜리 화장실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벨기에 브뤼헤 지역에서 발견된 도자기로 된 요강/임시변기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임시 화장실을 같이 썼다."라는 것은 오른쪽에 있는 도자기 요강 같은 것을 같이 쓰지 않았나 하고 추론해봅니다.
(5)이사벨라와 미미는 대놓고(in public) hug, kiss를 주고받고 칭찬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hug야 유럽에서야 이렇게 절친이면 당연히 하는 인사법이니까 아무 문제 없는데, kiss가 약간 문제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kiss도 '친근한 인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것만으로 두 사람의 "육체적 접촉"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이사벨라와 미미는 서로의 관계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목숨을 건 사랑을 나눈 부부)에 비유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사벨라와 미미(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
"그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어요
그대에게 키스하고 싶어요
키스하고 싶고 그대가 키스해주면 좋겠어요."
작성자:미미, 이사벨라에게 (마틴 래디 피셜)
난 그대의 대천사적인 귀여운 엉덩이에 키스해요.
작성자: 이사벨라, 미미(M.크리스티나)에게
나는 그대를 숭배해요. 그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게 남은 것은 도나우강에 스스로 뛰어드는 일 뿐이에요.
작성자:이사벨라, 미미(M.크리스티나)에게
성스러운 방법이든, 악마적인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써서
나는 그대를 무덤에 갈 때까지 사랑할 거에요.
작성자:이사벨라, 미미(M. 크리스티나)에게
◎편지 내용 분석
1) 분명히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미미) 사이에 romantic한 감정이 오고 간 것은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런데, romantic한 감정의 정도가 이사벨라가 미미에게 느끼는 쪽이 미미가 이사벨라에게 느끼는 쪽보다 훨씬 강렬하다고 판단됩니다. 이사벨라는 미미에게 "당신을 숭배한다. 당신 없으면 난 자살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이 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엄청나게 강도 높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미미는 "그대에게 키스하고 싶어요"(이것도 사실 18세기 기준으로는 경악할 만한 일이지만요.) 정도 수위니깐, 이사벨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수위입니다. 이사벨라와 미미 사이의 romantic한 감정을 주고받은 것을 표현하자면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이 그림은 이사벨라와 미미(M.크리스티나) 사이의 romantic한 관계에서 이사벨라가 미미에게 표현한 romantic 감정이 상대적으로 미미의 표현보다 훨씬 강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이사벨라의 생애 마지막 해(1763년)에 대하여
위 그림처럼 이사벨라는 미미에게 열렬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미미는 이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점점 이사벨라는 "나는 열렬하게 표현하는데, 미미는 너무 약하게 받아줘."하고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그 동안 가졌던 여성간의 애정을 "가톨릭교에서 엄격히 금하는 동성애의 죄악을 범했다."라고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이사벨라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쓴 편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편지 등을 근거로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자살은 못합니다. 가톨릭은 자살을 금지하므로)"라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직 전능하신 유일신만이 날마다 큰 슬픔에 잠겨 지내시는 그분의 삶(예수의 수난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지 아실 겁니다.
작성자: 이사벨라, 수신자: M. 크리스티나
그리고 이사벨라는 4월말~5월초 경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임신 및 출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고, 첫 번째 출산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더더욱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즉, 한편으로는 "죽기 싫어"라는 감정을 가지면서도, "난 동성애를 범했고, 또 남편에게 소홀했어."라는 죄책감 때문에 "내가 죽는 길 말고는 해결법이 없는 것 같아."라는 마음까지 갖게 되어 이사벨라는 심한 괴로움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763년, 4년 전 베르사유에서 이사벨라의 어머니를 사망에 이르게 한 천연두가 이번에는 빈 궁정에서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사벨라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1763년 11월 중순 천연두에 감염됩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힘들고, 2번의 유산 뒤에 임신해서 감염병에도 취약했기 때문에 이사벨라는 천연두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임신한 딸을 예상보다 3개월이나 빨리 조산한 뒤(2번째 딸은 출산 당일 사망합니다.) 1763년 11월 27일, 비록 고귀하게 태어났으나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약 22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합니다.
6. 나중에 첫 아내 이사벨라와 여동생 미미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 요제프 2세의 분노
요제프 2세는 아래 그림과 같은 이사벨라와 미미(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요제프 2세가 이걸 안 이상 "저 여우같은 미미년이 내 소중한 첫사랑 이사벨라를 뺏어갔었구나!"라고 분노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미미)가 주고받은 서신 내용을 요제프 2세는 확인하게 됩니다.
"그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어요
그대에게 키스하고 싶어요
키스하고 싶고 그대가 키스해주면 좋겠어요."
작성자:미미, 이사벨라에게 (마틴 래디 피셜)
난 그대의 대천사적인 귀여운 엉덩이에 키스해요.
작성자: 이사벨라, 미미(M.크리스티나)에게
나는 그대를 숭배해요. 그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게 남은 것은 도나우강에 스스로 뛰어드는 일 뿐이에요.
작성자:이사벨라, 미미(M.크리스티나)에게
성스러운 방법이든, 악마적인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써서
나는 그대를 무덤에 갈 때까지 사랑할 거에요.
작성자:이사벨라, 미미(M. 크리스티나)에게
요제프 2세는 "원수같은, 여우같은 미미년(M.크리스티나)이 내 소중한 첫사랑 이사벨라를 홀려서 나에게서 이사벨라를 빼앗고, 동성애의 추악한 죄악을 범하게 만들었구나!"라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사실, 요제프 입장에서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1살 아래 여동생 M.크리스티나만 편애하는 것만해도 못마땅했을 텐데, 이런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거의 이성을 잃었을 것이고, 그 충격은 그가 49세로 사망할 때까지 잊지 못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다른 이유도 더 있겠지만, 저는 충격적인 이유 1가지만 소개합니다.) 요제프 2세는 바로 밑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미미, 카를 대공의 실질적인 양육자)을 평생 용서 못하게 된 것입니다.
◎파르마의 이사벨라에 대한 저의 평가
1) "어머니 우위"의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시집온 합스부르크 궁정도 오히려 여성의 파워가 더 강해보이기도 하는(마리아 테레지아 치세) 문화였기에, "여성이 남성에 순종해야 한다."는 당시의 가부장적 불문율에 반항적이었습니다.
2) 그런데, 남편 요제프 2세는 이사벨라를 사랑했지만, 당시의 가부장적 태도로 이사벨라를 대했고, 이사벨라의 살아온 환경과 "경사스러운 임신에 우울해하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아, 부부 관계를 틀어지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3) 미미(M.크리스티나)는 지적이고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는 면에서 이사벨라와 공통점이 있어, 쉽게 친해지게 되었고, 이사벨라가 남편을 썩 맘에 들어하지 않아했기에, 더더욱 특별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4) 분명, 남편에게 제대로 받지 못한 애정을 미미에게 갈구하는 듯한 면이 확실히 보이므로 이를 "동성애적"이라고 충분히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이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었다는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고 판정합니다.
5) 그리고 1763년 그녀의 마지막 해에는 미미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고, 스스로 자제하려는 태도도 어느 정도 보입니다. 즉, '동성애적 애정'을 미미에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동성애에 탐닉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도 보입니다. 동성애에 빠졌다 해도 그 기간은 길게 잡아야 2년(1761년 초~1763년 초) 이상 잡기는 어렵습니다.
6) 설령 동성애에 빠졌다고 해도, 남편 요제프 2세가 성관계를 요구했을 때는 대체로 다 들어준 것 같습니다. 첫 딸 출산(1762년 3월) 이후에 두 번이나 유산(1762년 8월, 1763년 1월)을 했고, 둘째 딸의 임신 시기는 1763년 5월로 추정됩니다.(1763년 11월 출산이 3개월 가량 조산이라고 했으므로, "임신 후 6개월만에 출생"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기간은 9개월로 계산했고요.). 오히려 출산 이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관계를 계속 하지 않았으면 아무리 수유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10개월(1762.8~1763.6) 사이에 수정란이 3번(유산 2회+출산 1회) 만들어질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사벨라는 분명히 부부의 의무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7) 종전에는 M.크리스티나에 대한 서신의 애정 표현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이사벨라를 "요절한 레즈비언"으로 단순히 폄하하는 평가가 거의 주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틴 래디 박사님도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에서 그녀의 저작 <남성론>등을 보면서 "일찍부터 남성혐오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황태자비로서의 답답한 궁정생활에 반감이 생겼을만 하다."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가정 환경을 어머니가 주도했기에, 특히 파르마 공국은 순전히 어머니의 노력과 힘으로 얻어냈고, 아버지는 여기에 한 일이 없기에 일종의 '여성우월주의'를 성장기에 갖고 있었고, 빈의 합스부르크 궁정도 '여성 주도적'인 성향이 상당했기에 여성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을 뿐이라고 평가합니다. 즉, 덜 다듬어진 면은 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여성관과 남성관'을 가진 인물이 바로 파르마의 이사벨라라고 평가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에 대한 저의 평가(이사벨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1) 저는 기본적으로 "난감한 상황"을 "최대한 트러블 없이" 넘기는 현명한 대처를 했다고 평가합니다.
2) 처음에야 "동갑내기이자 죽이 잘 맞는 친구" 생겨서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사벨라의 애정표현이 너무 수위가 강해졌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는 상당히 부담스러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그래서 이사벨라의 적극적인 애정표현에 대해 "소극적 응답"을 함으로써, 스스로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멀어지기를 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가 이사벨라의 너무 강렬한 애정표현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이 관계가 시간이 더 지속되었으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키는 심각한 스캔들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4) 이러한 대처로 인해 올케(이사벨라)와 시누이(M.크리스티나)의 비정상적으로 가까운 관계는 정상화되었고, 이사벨라도 다시 남편에게 충실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사벨라가 천연두로 요절해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왼쪽이 파르마의 이사벨라(아마 18세 정도의 모습), 오른쪽이 마리아 크리스티나(24세)의 초상입니다. 이사벨라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남편은 맘에 들게 행동하지 않아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고, M. 크리스티나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신임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지라, 애정결핍과는 거리가 먼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와 M.크리스티나의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이사벨라의 애정표현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