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베르사유 사교계에 데뷔한 카를> 요약
루이 16세의 초청장을 받고 '공주 탄생 축하 연회'에 참석한 Tino-Mimi 부부와 동행한 카를은 "토스카나 대공의 아들, 샤를 드 토스칸" 이라는 이름으로 베르사유 궁전 사교계에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베르사유에서 카를은 국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대화하면서 조금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아르투아 백작의 주선으로 "벨기에에서 갈고 닦은 승마 기량"을 베르사유 승마장에서 멋지게 보여주어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카를은 프랑스 베르사유 사교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렸습니다.
하지만, 카를은 국왕 부부와 사이가 나쁘고, 군 장성으로 복무할 때 "허위 보고"를 했던 전과가 있던 프랑스 제1방계 오를레앙 공 필리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를레앙 공은 엄청난 부자였고, 파리 한복판에 있는 그의 대저택인 "팔레 루아얄"에는 많은 유력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를레앙 공은 비밀결사 프리메이슨 회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종합한 카를은 "능력은 부족한데, 재산이 많고 권력욕이 강한 오를레앙 공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라고 느꼈습니다.
★주요 등장 인물 소개
◎벨기에 총독부부와 그 조카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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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사실상 양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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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사실상 양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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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사실상 양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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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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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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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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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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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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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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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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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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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지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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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K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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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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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크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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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시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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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Ch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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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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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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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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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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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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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공동총독(내정 담당)
실권은 미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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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공동총독(군사/치안 담당)
실권은 미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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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지망생
(1788년 가을 입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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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자기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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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셴 공작부인
'마리 크리스틴 드 테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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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셴 공작
' 알베르 드 테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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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대공의 3남
'샤를 드 토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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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름답고 빛나는 파리(Paris)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조짐>
1. 머리말
카를, Mimi-Tino 부부 그리고 수행원 모두에게 비좁은 베르사유에서 지내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그래서 7월 31일 축하연이 끝난 다음날인 8월 1일에는 숙소를 파리로 옮겼습니다. 오스트리아 대사 메르시-아르장토 백작이 미리 준비한 파리의 저택은 "황제 요제프 2세"와 그 수행원들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어서, 카를 일행이 꽤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카를 일행은 1주일에 한두번 정도는 연회에 참여했지만, 그 외에는 대체적으로 파리에서 자유롭게 지냈습니다. Mimi는 시간 날 때마다 카를을 데리고 파리의 명소를 보여주었습니다.
2. 샹젤리제 거리
1) 1780년 풍경

1780년의 샹젤리제 거리 앞의 풍경화입니다. 가로수가 웅장하게 뻗어 있는 사이에 난 길이 샹젤리제 거리입니다.
샹젤리제 거리는 루이 14세 때 튈르리를 재건축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베르사유 정원을 설계한 앙드레 르 노트르가 가로수를 심고 보행 도로를 확장하여 지금의 샹젤리제 거리 원형을 형성했습니다. 샹젤리제라는 이름은 "엘리제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1709년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퐁파두르 부인의 동생인 파리의 건설 담당관 마리니 후작, 아벨 프랑수아 푸아송에 의해 정원을 리모델링하고 보행로를 확장해서 위 그림과 같은 경관을 띄게 되었습니다.
2) 1850년 풍경

3) 2021년의 샹젤리제

3. 파리 오데옹 오페라 극장

원래는 1782년 개장된 극장이었는데요, 1799년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때 재건축했는데 또 1818년 화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819년 재건축, 재개장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된 파리 오데옹 극장입니다.
카를의 승마 공연을 보고 감탄한 어떤 귀족 부인이 Mimi에게 '파리 오데옹 극장'의 오페라 공연 티켓을 선물했습니다. 그래서 Mimi 부부와 카를은 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를은 겉에서 보기에도, 내부로 들어가도 뭔가 친숙한 느낌이 나기에 이 극장 건축 설계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Mimi-Tino와 다음과 같이 대화했습니다.
카를: 고모, 이 건물 건축 양식은 신고전주의고, 내부 구조도 친숙하네요. 라컨 궁전하고 느낌이 좀 비슷해요. 혹시 이 건물 설계, 라컨 궁전을 설계한 샤를 드 와이 건축가가 한 것인가요?
Mimi: 빙고! 정확히는 샤를 드 와이와 그 오랜 절친 마리-조제프 페르의 합작품이야.
Tino: 정말이지. 샤를 드 와이라는 건축가는 안정감 확실하게 지으면서도, 건물과 기둥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솜씨가 대단한 것 같소!
Mimi: 맞아요. 저희 전속 건축가인 무슈 몽토예가 샤를 드 와이라는 분과 친분이 있던 게 큰 행운이죠. 그 덕에 우리는 아름답고 편안한 라컨 궁전에서 여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라컨 궁전 건축에 대한 스토리는 지난 벨기에편 5장에 있습니다. 링크는 아래에 있어요.)


왼쪽이 Mimi 가족이 사는 라컨 궁전을 건축한 샤를 드 와이의 석고상이고요, 오른쪽은 샤를 드 와이의 절친 마리-조제프 페르(1730~1785)입니다. 파리 오데옹 극장을 최초로 설계한 사람은 이 두 사람이었습니다.
파리 오데옹 극장 안에서는 오페라 공연이 시작되었고, 카를 일행은 좋은 자리 티켓을 선물받았기에, 로얄석에서 기분 좋게 오페라를 감상했습니다.

1782년 파리오데옹 극장이 처음 개장했을 무렵에 오데옹 극장 내부에서 오페라가 상연된 모습입니다.
4. 루이 15세 광장(현재: 콩코르드 광장)

튈르리 정원 앞에 설계된 루이 15세 광장의 1758년 설계도입니다. 중앙에 있는 기마상이 루이 15세의 기마상이기에 "루이 15세 광장" 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습니다.

루이 15세 광장을 공사하는 중간에 이후 근위대가 사열하는 모습입니다. 이를 뒤에서 구경하는 구경꾼들이 보이네요.(1763년)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 "콩코르드 광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파리 중앙 광장은 원래 '루이 15세 광장'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루이 15세의 기마상은 1745년 5월 11일 퐁트누아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광장은 1757년 건축이 시작되어 1772년 완공되는데요. 위 그림의 근위대 사열식이 벌어졌던 1763년,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완패해서(유럽 대륙에서 영국-하노버군에게 패배, 해외 식민지도 영국에게 엄청나게 빼앗김) 루이 15세의 동상은 파리 시민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에게 전혀 그 이름에 대한 설득력이 없던 "루이 15세 광장"을 보면, 루이 15세의 손자일 뿐이고 루이 15세보다 뭔가 나아진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국왕 루이 16세는 굳이 두드러진 정적(政敵)이 없다 할지라도 국왕으로서의 존재감을 파리 시민에게 보여주기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1770년 대부분의 건축물이 지어진 루이 15세 광장의 모습입니다.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입니다. 1786년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5. 몽소 공원
Mimi와 Tino, 카를은 파리의 공원 중 당시 화제를 모으고 있던 '몽소 공원'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몽소 공원은 예술가이자 건축가, 공원/정원 디자이너인 루이 카르몽텔이 건축가 베르나르 포예와 함께 설계하고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이 공원에는 당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화적 요소"가 모두 동원된 "Universal Park"였습니다. 이 공원에는 피라미드, 로마식 콜로네이드(기둥이 여러 개 있고 기둥 위에 아치형의 들보가 놓인 건축물), 마르스 신전, 네덜란드 풍차, 수련 연못, 이탈리아식 포도밭, 인공 동굴이 모두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튀르키예식 텐트,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트 같은 건축 모형도 있었고요, 공원 안 동물원에는 낙타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몽소 공원에 조성된 튀르키예식(or 타타르식) 텐트입니다. 그 옆에는 꽤 커다란 인공호수를 조성했습니다(1779년). 지금의 몽소 공원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뒤쪽의 풍차, 풍차 옆에 있는게 미나렛(Minaret)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둥이 많습니다. 기둥 사이에 있는 사람 모양 조각상이 혹시 마르스 신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역시 1779년 풍경화로서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카를은 모태신앙 가톨릭이었고, 투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적국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미나렛'을 구경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고대 로마 신전, 이슬람 미나렛" 같은 것을 조성하는 발상을 하는 것이 신기하다 싶어서 Mimi에게 괜찮은지 물어 보았습니다.
카를: 우리가 몽소 공원 내에 있는 미나렛을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미나렛 구경했다는 거 알면 투르크 극혐하는 세르비아인 같은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을까요?
Mimi: 하하! 샤를이 성숙한 것 같지만 역시 아직은 순진한 면이 있구나! 우리 제국 불문율 알려줄 게. "오스트리아 본토 밖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행동해도 된다." 다음은 Tino 공작이 말해주세요.
Tino: 프랑스는 원래 투르크와 오랜 동맹이잖아. 그러니 이슬람 조형물 만들어도 별 이상할 것 없지.
카를: 알겠어요. 오스트리아 본토였으면 '이슬람 미나렛' 만드는 것 하나로 난리가 나버렸을 일이라, 일시적으로 문화 충격(culture shock) 받은 거에요. 구경해도 괜찮겠네요.
Mimi: 샤를, 이 특이한 정원 만들 자금을 누가 지원했을까? 이슬람 미나렛, 로마 신전 등 이교 색체가 강한 조형물은 국왕 폐하나 왕비 마마의 후원으로 만들었을 리 없겠지.
카를: 국왕 폐하는 그렇다 쳐도, 앙투아네트 왕비마마께서 이슬람 미나렛 지어지는 꼴은 못 보셨을 거에요. 그렇다면 설마? 국왕 폐하의 반대파가 될 수 있고 그리고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게는 생각나는 사람이 오를레앙 공 뿐인데요?
Tino: '설마'가 정답일 때가 진짜 많지. 샤를, 감이 좋구나. 이 공원 전체가 바로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소유야. 그리고 이 공원의 건축물 상당수를 맡은 건축가 베르나르 포예는 오를레앙 공의 전속 건축가고.
카를: 그렇다면! 몽소 공원을 열심히 관찰해야겠어요. 왠지 신나는데요! "적진 정찰"을 아무 위험없이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렇게 해서 카를의 3인 가족은 1786년 8월 16일, 몽소 공원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구글맵으로 찾은 몽소 공원의 위치입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약 2.2km 거리라고 하네요. 파리 도심부에 있는 편입니다. 오를레앙 가 대저택이었던 팔레 루아얄과 몽소 공원은 3.3km 거리에 있습니다.

몽소 공원에 있는 피라미드입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건축물입니다. 입구는 "파라오의 관" 처럼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로마시대 분위기의 콜로네이드입니다. 세월의 풍상을 겪은 흔적이 많이 보이네요.
※1793년 이후 몽소 공원의 간략한 역사
몽소 공원은 평등공 필리프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 국유화되었다가,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 오를레앙가에 반환됩니다. 오를레앙의 루이 필리프 국왕이 1848년 2월 혁명으로 망명하고, 1852년 제2 제국이후 오를레앙가가 공원의 상당부분을 매각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장소는 위의 수련 연못과 로마식 콜로네이드, 피라미드 및 나머지 공원 부지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몽소 공원은 지금까지도 파리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공원이고요. 유명한 화가 클로드 모네도 이 공원의 풍경화를 여러 점 남겼습니다. 제가 쉽게 찾아낸 것만 세 점이네요.
◎몽소 공원을 그린 모네의 풍경화



3점 모두 클로드 모네(1840~1926)가 1877~1878년 그린 풍경화입니다. 모네는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요. 저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는데요, "빛과 그림자"를 매우 강조해서 그린 것이 눈에 띕니다.
(다시 1786년 8월 16일 시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카를은 몽소 공원의 다양한 조형물과 풍경을 감상하면서, 처음 보는 튀르키예식 텐트, 미나렛, 피라미드와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낙타를 보고 마치 오스만 제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식 콜로네이드와 마르스 신전을 보면서 고대 로마로 타임머신을 탄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렇게 몽소 공원의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카를은 베르사유 연회장에서 '한 방 먹여준' 오를레앙 공이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파악했습니다. 오를레앙 공을 "비겁하면서 탐욕스럽기만 한 군인·왕족 자격 없는 놈"이라고 평가하며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신조차 어느샌가 오를레앙 공이 고용한 예술가들의 조형물에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리 시민이 대단한 구경거리를 주는 오를레앙 공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루이 16세 중 어느 쪽을 더 지지할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지요. 그래서 카를은 Mimi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를: 오를레앙 공이라는 인간, 뭔가 능력이 있기는 한 것 같기는 하네요.
Mimi: 그래. 내가 이 공원을 보여주면서, 샤를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바로 그거야. 베르사유에서 봤던 찌질한 모습이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지.
Tino: 정말 필리프란 놈이 싫기는 하지만, 그놈이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고, 그걸 이용해서 파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어.
Mimi: 샤를, 자세한 얘기는 하나 더 구경하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바로 그자의 본거지 "팔레 루아얄"이야. 여긴 조심해서 살펴봐야 할 지역이지만, 둘러볼 가치는 충분한 곳이지.
8월 17일은 오페라 작가 그림 남작과 약속이 있었고, 8월 18일은 전 황제 프란츠 1세의 기일이었기에 카를 일행은 1786년 8월 19일 "팔레 루아얄 정찰 작전"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6. 팔레 루아얄
1) Tino와 Mimi가 마련한 <팔레 루아얄 정찰 작전>
팔레 루아얄은 오를레앙 공의 저택으로 경비병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외곽 건물 1층 상당 부분이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개방되어 있다지만 이동시 주의해야 했습니다. 팔레 루아얄 주변은 오를레앙 공의 "치외법권" 지역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ino는 팔레 루아얄로 가기 전에 카를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었습니다.
"팔레 루아얄은 내부로 들어갈 생각 하지 말고 외곽 지역만 살펴봐야 한다. 괜히 팔레 루아얄 내부에 들어갈려고 하면, 오를레앙의 부하들이 우리에게 달라붙어서 귀찮아질 수 있기 때문이야. "
그리고 Mimi도 남편을 거들어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는 이유 불문하고 자기 자존심 조금이라도 흠집냈다 싶으면 그 원한 잊지 않는 놈이야. 7월 31일 베르사유에서 샤를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은 것도 잊지 않고 있을거야. 그러니 그놈의 홈그라운드인 팔레 루아얄에서 그자와 마주하는 상황은 절대 만들지 말아야 해!"

팔레 루아얄의 외곽을 구성하는 "몽팡시에 회랑"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건물에는 레스토랑, 카페 등 각종 상업시설 들이 있었습니다. 맨 앞에 보이는 머스킷 총검을 가진 경비병 보이죠? 이렇게 팔레 루아얄 곳곳에는 오를레앙 공의 직속 경비병력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카를은 고모부, 고모가 진심으로 자신의 안전을 생각해서 주의를 주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군말없이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Tino가 팔레 루아얄 지도를 보여주면서 "정찰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팔레 루아얄의 현재 지도입니다. 빨강색 화살표가 Tino가 말해주는 "팔레 루아얄 정찰 경로" 입니다.
Tino가 계획한 팔레 루아얄 정찰 Plan
1) 팔레 루아얄의 오른쪽(북쪽)에서 진입한다.
2) 진입 후 위쪽(서쪽)으로 우회전해서 보졸레 거리(Rue de Beaujolais)를 통해 이동하며 살펴본다.
3) 보졸레 거리 모서리에서 좌회전해서 몽팡시에 거리(Rue de Monpensier)를 통해 왼쪽(남쪽)으로 이동한다.
4) 몽팡시에 거리가 끝나면, 우회전, 다시 좌회전해서 로앙 거리(Rue de Rohan)를 통해 팔레 루아얄 영역을 벗어나 루브르 궁전 방향으로 향한다.
여기에 Mimi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오를레앙 공의 부하가 "왜 우리 저택 주변에서 얼쩡거리십니까?"라고 고압적으로 압박해 올 때 어떻게 답해야 할지 카를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루브르 궁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루브르 가는 김에 팔레 루아얄의 아름다운 정원과 건물을 감상하고 싶어서 팔레 루아얄 저택 옆을 지나가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우리 행동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를은 Mimi와 Tino가 세심하게 준비한 계획을 듣고 "역시 파리에서 오를레앙 공의 영향력은 상당히 강하다."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모와 고모부가 말한대로 '자연스럽게, 지나가듯이' 오를레앙 공의 대저택 "팔레 루아얄"을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2) 1786년 경 카를 일행이 살펴본 팔레 루아얄의 모습
(1) 보졸레 회랑(Galerie de Beaujolais)- 북쪽

회랑 안쪽의 건물은 1786년 당시 레스토랑, 카페 등 상업 시설로 이용되었습니다.
(2) 카페 드 샤르트르(Café de Chartres)- 현재는 고급 레스토랑 르 그랑 베푸르(Le Grand Véfour)

간단한 연혁
i)1784년 카페 드 샤르트르(Café de Chartres)로 오픈: 1784년에는 아직 평등공 필리프의 아버지(필리프 선대 오를레앙 공작)가 살아 있어서, 평등공 필리프의 호칭이 '오를레앙 공작'이 아닌 '샤르트르 공작'이었습니다. 즉, 이 카페의 네이밍은 "평등공 필리프의 카페" 라는 이름으로 볼 수 있겠네요.
ii)1820년 장 베푸르(Jean Véfour)가 이 영역을 매입 후 레스토랑으로 용도를 변경했습니다. 워낙 위치가 좋은지라, 이때부터 이 레스토랑은 "프랑스 고급 요리의 성지"가 되었답니다.
(3) 팔레 루아얄 극장- 팔레 루아얄 정원의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


보시다시피 현재도 영업하고 있는 극장이 팔레 루아알 극장입니다. 몽펭시에 거리와 보졸레 거리가 만나는 코너에 위치합니다.
(4) 몽펭시에 회랑(Galerie de Monpensier)

1786년 당시에는 몽펭시에 회랑쪽에 상업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도 많고, 오른쪽을 보면 일부 점포가 영업하고 있었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5) 리슐리외 홀(Salle Richelieu)- 1786년 8월 당시 공사중

그 당시 한참 공사중(1786~1790)이었던 리슐리외 홀의 모습입니다. 18세기 수동 크레인의 모습을 볼 수 있네요.
◇리슐리외 홀은 현재는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으로 파리를 대표하는 전통 극장 중 하나입니다.

※카를 일행은 리슐리외 홀을 마지막으로 지나친 다음 계획대로 '로앙 거리(Rue de Rohan)'를 통해 팔레 루아얄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파리 중심부에 위치한, 여느 궁전에 뒤지지 않는 팔레 루아얄 건축물의 화려함과 큰 규모를 지켜보면서 카를은 '파리의 최강자는 오를레앙 공 필리프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Mimi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카를: 오를레앙 공의 대저택! 대단한데요. 어지간한 궁전 못지 않아요.
Mimi: (가볍게 웃으며) 샤를, 오를레앙 공 필리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이제 루브르 다 왔어.
Tino: 루브르에 연결된 대회랑(Grande Galerie)는 박물관으로 용도변경할 계획이 있어. 그래서 1785년에 베르사유로부터 미술품을 꽤나 옮겨 왔지.
Mimi: 대중들에게는 아직 개방이 안 되어 있지만, 우리는 국왕폐하의 인척이라 특별 출입이 가능해. 수준높은 미술품 꽤 많이 있을 거야.
7. 루브르 궁전+대회랑+튈르리 궁전

1615년 경 루브르 궁전과 그와 연결된 건축물들을 건축을 주도한 왕/권력자와 함께 알기 쉽게 표시한 그림이네요. 튈르리 궁전과 튈르리 정원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주도해서 조성했다는 것이 제겐 눈에 띕니다. 루이 14세가 극혐했다는 루브르 궁전은 필리프 2세 시대 'ㅁ'자 모양의 중세시대 성 모양으로 지어진 옛날 궁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 위 그림에 묘사된 궁전의 각 부분과 건축 주도자를 나타낸 표
궁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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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주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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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및 건물 모양,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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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Louvre)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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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중세): 존엄왕 필리프(필리프 2세)
2차(르네상스기): 앙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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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궁전:위쪽의 'ㅁ'자 성 모형
르네상스기: 위쪽의 짧은 가로 직사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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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대회랑(Grande Gal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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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Henri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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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방향 긴 직사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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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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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메디시스
(Catherine de Médi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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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긴 가로 방향 직사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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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궁전은 필리프 2세 때 1190~1202년 최초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이 13세 시기까지 프랑스 국왕의 정궁으로 쓰여 왔습니다. 이 궁전은 여러 번 보수공사를 거치기는 했지만, 17세기 중반에는 너무 낡고 미로같아서 생활하기 불편했다고 합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 건축에 열을 올린 이유 중에 하나는 "너무 낡아서 귀족 저택만도 못한" 루브르 궁이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기 때문이지요. (정작 베르사유 궁전도 부지는 크지만 주거 공간이 충분치 않아 사람들이 미어터졌다는 것이 함정이지만요.)

루이 14세 시대 재건축 이후의 루브르 궁의 모습입니다.(1763년)
이렇게 해서 왕실 가족이 빠져나간 루브르 궁에는 18세기 여러 예술가들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루브르 궁에는 예술품들이 엄청나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루브르 궁과 튈르리 궁을 연결하는 대회랑(Grande Galerie)은 이미 1776년 경부터 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하기로 논의는 되었는데 실행은 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1785년에는 베르사유에서 많은 미술품들을 옮겨 왔지요.

아직 제대로 개장되기 전의 Grande Galerie 미술관의 모습입니다. 극소수의 특권층만 이 공간에 출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유명 화가 위베르 로베르의 작품입니다. 아마 Mimi 일행이 루브르 대회랑의 미술품을 구경했다면 이 그림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를은 루브르 대회랑에 있는 여러 회화(Paintings) 작품 및 석고상, 조각상들을 보면서 작품의 질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고모가 젊었을 때 그린 자화상(1765년)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모나 리자> 등 엄청난 예술 작품들이 많은데다, 소장 작품 규모로는 유럽 1, 2위를 다툴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성되고 있는 "루브르 갤러리"을 파리 시민에게 개방한다면 반응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쪽이 1765년 그린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자화상(23세 때)이고요, 오른쪽이 같은 해에 궁정화가 마르틴 반 메이텐스가 그린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초상입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예술적 수준은 당대 최고 화가 수준 같습니다. 오히려 황족이라는 고귀한 신분이고, 전해지는 작품이 많지 않아서 묻혀진 게 아쉬울 뿐이죠.
그래서 카를은 왜 이 좋은 루브르 미술관을 파리 시민에게 개방하지 않는지가 궁금해서 그들의 저택으로 돌아간 뒤 Mimi에게 질문했습니다.
카를: 국왕 폐하께서는 왜 루브르궁을 미술 박물관으로 개방하지 않으실까요? 파리의 여론은 오를레앙 공 쪽으로 많이 기울어서 반전의 계기가 필요할 텐데요.
Mimi: 샤를, 파리는 브뤼셀처럼 치안이 좋지 못해. 미술품 도난의 위험도, 담뱃불에 의한 화재의 위험도, 방화의 위험도 큰 곳이 인구 60만이 넘어가는 대도시 파리야.
Tino: 또, 결정적인 점은 파리가 프랑스 국왕 폐하의 영향권에서 사실상 이탈해 있는 점이야. 파리의 유력자 중에 국왕 폐하와 왕비 마마를 지지하는 사람은 10%가 될까말까 하는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 왕실 재산인 미술품을 파리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건 "이 미술품들을 다 날려먹을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은 어렵지.
카를: 두 분 말씀을 들으니 제 머리속에는 "파리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오를레앙 공은 파리에서 뭘 해도 다 되는데, 정작 프랑스 전체의 국왕인 루이 16세 폐하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할 수 있는게 마땅치 않다."는 암담한 현실이 떠올라요.
Tino: 어쩌면, 루이 14세가 대도시 파리를 떠나 작은 베르사유로 궁정을 옮기면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라고 왕이 수도를 떠나니, 수도 중심부 팔레 루아얄 대저택에 자리잡은 "제1방계 오를레앙 공"이 실질적인 파리의 주인이 된 것이지.
Mimi: 프랑스 문화·예술에 있어서 실질적인 중심은 파리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살롱(salon)들이야. 우리 황제 폐하(요제프 2세)께서 심취해 계시는 계몽 사상도 사실 이 살롱에 드나드는 유명 논객인 볼테르, 루소 등의 주장이 널리 전해진 것이지.
Tino: 반면 현재 프랑스 왕실은 문화·예술에 있어 영향력이 별로 없어. 그저 "왕비마마가 입은 옷이 한 시즌 유행 타는 정도"의 영향력이 있을 뿐이야.

1755년 조프랭 부인의 살롱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18세기 파리의 문화는 이러한 귀부인들이 운영하는 살롱에서 여러 논객들이 논의하며 이루어졌습니다. 볼테르, 루소 등도 이러한 살롱에서 영향력을 키워가서 18세기 주류철학 중 하나인 "계몽사상"을 형성했습니다.
8. 맺음말
카를의 3인 가족이 주고받은 위의 대화처럼 1786년 8월 당시 베르사유는 고립되어 있고, 비좁고, 쓸데없는 에티켓에 얽매여 있는 "왕실과 궁정귀족만의 작은 섬" 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인구 60여만의 대도시 파리는 활기차고, 자유로운 토론이 오갔으며, 최신 문화예술이 창조되는 프랑스의 수도였습니다. 그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라면 바로 "오를레앙 공 필리프"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는 비록 군인으로서의 자질, 왕족으로서의 품위는 부족했으나, 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가 오를레앙 공이 될 때부터 5대째 내려오는 막대한 부(wealth)가 있었고, 필리프 스스로도 경제적인 능력이 꽤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팔레 루아얄 외곽 건물을 많이 짓고 그것을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임대해서 막대한 임대료 수입을 올릴 정도의 발상을 할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와 수도 한가운데 자리잡은 입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정치적인 능력도 있었습니다.
카를은 오를레앙 공이 베르사유에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오를레앙 공이 스스로 "파리의 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홈그라운드 파리에서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실상 "파리의 No.1"으로 대우받고 살고 있기 때문에 '왕실 예법 따위'는 그냥 하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충분히 생각할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카를은 오를레앙 공의 두 가지 결정적인 약점을 알았습니다.
①너무 오만방자하다.
②그렇기 때문에 처음보는 상황이나 평소와 다른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를레앙 공(Duke of Orleans: 39세)이 못 보던 '샤를 드 토스칸(15세)'이 자기 앞에, 그리고 평소에 자기 아래 서열이던 테셴 공작 부부(Tino: 48세, Mimi: 44세)보다 앞서서 나타나자, 어리다고 얕보면서 짓밟으려 했다가 역관광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지요. 국왕과 그 동생 프로방스 백작, 아르투아 백작과 인사 나누는 장면을 눈여겨 보지도 않았고, 자기소개 때 카를이 분명히 말했던 "나는 토스카나 대공(Grand Duke of Tuscany)의 대리로 연회에 참석한 샤를 드 토스칸(Charles de Toscane)입니다."라는 말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기에, 필리프는 잘못 깝치다가 자기 아내가 아랫 서열의 테셴 공작 부부에게 고개를 숙이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https://cafe.naver.com/booheong/217619에 있습니다.)
그래서 카를은 Tino에게 "앞으로 어찌될 지는 모르겠지만,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최후는 그닥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네요. 너무 안하무인이니까요.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Tino는 그 말을 칭찬하며 부드럽게 웃었고, Mimi 역시 카를이 생각한 바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생각의 중심이 잡혀 있는 좋은 사고방식을 가졌다."라며 칭찬했습니다.
고모와 고모부의 칭찬을 들어 잠시 기분이 좋았지만, 카를의 마음 한켠에는 프랑스 국왕의 힘과 권위는 점점 약해지는데 반해, 오만하고 욕심많은 오를레앙 공의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는 현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카를은 불안해하면서도 신에게 프랑스 국왕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연재 후기]
원래는 파리의 배경은 가볍게 소개하고, "파리의 비정상적인 소금가격(원산지 낭트 부근보다 20~30배 가량 높습니다.)"과 그 원인인 가벨(gabelle:소금세)에 대해 쓸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벨에 대해 조사하다보니 영문 블로그 http://rodama1789.blogspot.com/에 가벨의 폐단과 소금밀수에 대해 매우 상세한 정보가 나와 있었고, 그래서 다음 편에서 "가벨의 지역별 차등징수 상황" 및 프랑스의 지역별 소금가격, 그리고 소금밀수에 대해서 나름 개념을 잡아서 정리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을 카를 일행이 파리 구경하다가 "혁명의 중심지 콩코르드 광장" 그리고 "오를레앙 공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몽소 공원 및 팔레 루아얄"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프랑스에서 전개될 일을 간접적으로 예고하는 형식으로 글을 전개했습니다.
원래 예고와 달라진 점에 대해 양해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원래 연재하고자 했던 "소금세: 가벨"에 대한 글은 다음주 화요일~수요일쯤에 연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