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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연재]오스트리아 제국 인물 열전[카를 대공:세 곳의 혁명-4장] Mimi의 위기: 수천명의 분노한 벨기에 시민에게 포위되다

by Dr. Seoul 2023. 3. 12.

<3장: 황제와 총독부의 선 넘은 억압, 뚜껑 열린 벨기에인> 요약

벨기에 총독부의 실권자 벨조요소 백작은 황제 요제프 2세의 명령을 따라 '중앙집권, 반가톨릭' 정책을 "도시자치 전통및 가톨릭 전통이 뿌리깊은" 벨기에 지역에 1783년부터 실시해 왔습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자치권과 전통을 위협하는 총독부의 정책에 불만이 많았음에도 벨기에인들은 1786년 초반까지 참으면서, 큰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786년 후반~1787년 초에 걸쳐 벨기에에 실시된 요제프 2세의 정책은 도저히 벨기에인 입장에서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1) 신학교 통폐합 및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얀센주의' 신봉자를 유일한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

→ 정통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것에 강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벨기에인 거의 대부분(92%)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2) 곡물 관세 폐지 정책 등 자유무역 정책 실패

→ 경제 불황이 심해짐으로써 하층민들의 삶이 더 피폐해졌고, 그로 인해 벨기에 하층민들이 총독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3) 벨기에 각 자치도시의 의회, 법원 폐쇄 및 중앙집권화

→ 몇 백년간 이어져 온 도시자치 자체를 부정하는 정책이기에, 벨기에 시민 거의 모두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요제프 2세의 정책은 <1356년, 즐거운 입성 헌장>에서 보장된 "①자치도시의 권리 및 자유 ②성직자의 권리 및 자유"를 대놓고 침해하는 정책이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법"의 기준으로 봐도 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제1의 법률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던, 부유한 명문 가문의 변호사 앙리 반 데르 노트가 벨기에를 대표해서 브뤼셀에 있는 오스트리아 총독부에 항의방문했습니다.

반 데르 노트 변호사의 항의방문은 그 자체로는 별 성과가 없이 끝났으나, "체포되어 수감될" 각오를 하고 총독부에 찾아간 그는 벨기에인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고, 반 데르 노트는 "벨기에 저항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갔습니다.

<4장- Mimi의 위기: 수천명의 분노한 벨기에 시민에게 포위되다>

▣주요 등장 인물

1) 벨기에 총독부부와 그 조카

가족관계
고모(사실상 양어머니)
고모부(사실상 양아버지)
조카(사실상 양아들)
초상화






생년월일
1742.5.13.
1738.7.11.
1771.9.5.
이름
독일식
마리아 크리스티나
알베르트 카지미르
카를(Karl)
프랑스식
마리 크리스틴
알베르 카시미르
샤를(Charles)
애칭
Mimi
Tino
다람쥐 샤를
직책
벨기에 공동총독(내정 담당)
실권은 미약함
벨기에 공동총독(군사/치안 담당)
실권은 미약함
장교 지망생
(1788년 가을 입대 예정)

2)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및 황제의 앞잡이

직책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1780~1790)
주벨기에 전권공사(1783~1787)
초상화




성명
요제프 2세
루도비코 디 벨조요소
생년월일
1741.3.13.
1728.1.2.
인물 소개
◎ 1마디 요약: '공상적' 계몽전제군주
i) '기존 특권층'의 횡포를 억제하고 힘없는 농민·빈민·소수종교의 권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
ii) 하지만, 황제 본인의 명령은 '초법적'이고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음
iii) 그래서 제국령 중 헝가리·벨기에 등 원래 높은 수준의 자치가 인정되던 지역에 지주 및 가톨릭 세력 권한 약화를 명분으로 지나친 간섭
▪출생: 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 벨조요소
◎1783년 임명된 관직
i) 신롬 2성 야전 사령관(1783년 4월 26일 임명)
ii) 벨기에 전권공사(1783년 5월 9일 임명)
▪ 벨기에에서 황제 요제프 2세의 칙령을 현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시행
황제의 어명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시행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벨기에 저항운동가

성명
앙리 반 데르 노트
얀 프란스 봉크
초상화




직책
▪벨기에 명문 가문 출신의 변호사
▪브라반트 대표 변호사
▪벨기에 부농의 아들로, 성공한 변호사
▪벨기에 시민 계층의 이익 대변
생년월일
1731.1.7.
1743.11.29.
출신지
벨기에 브뤼셀
벨기에 플란데런 지역 알스트
反오스트리아 정서
▪1780년 이후 강한 저항의식 생김
▪벨기에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요제프 2세와 벨조요소에 대한 반감이 강함.
▪1780년 이후 강한 저항의식 생김
▪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요제프 2세와 벨조요소에 대한 반감이 강함.
출신 가문
전통의 명문 가문(벨기에에서는 귀족 사회로 분류)
부농의 아들(벨기에 상위 중산층에 속함)
정치 성향
전통주의(14세기부터 지켜져온 벨기에 전통의 도시자치 체제와 성직자의 특권을 옹호)
개혁주의(계몽 사상에 입각하여 시민 계층의 정치참여 지분이 증가해야 한다고 주장)
지지 세력
연방주의자(Statist)
→ 벨기에 성직자, 대상인, 귀족 등 유력 계층
봉크 당파(Vonckist)
→ 벨기에 시민 계층(중소 부르주아지)

1. 두 명의 벨기에 변호사, 반 데르 노트봉크

1) 앙리 반 데르 노트의 생각

오스트리아 총독부에서 공동 총독 Mimi-Tino 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벨기에인의 자치권 및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주체가 신성로마황제 요제프 2세라는 사실을 확인한 반 데르 노트"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대규모 시민 집회 및 실력 행사' 를 해야 요제프 2세가 듣는 척이라도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부유하고 유복한 생활을 50년 넘게 해온 그는 "격렬한 투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투쟁을 위해서는 자신과 정책 노선이 다른 급진파의 수장 '얀 프란스 봉크'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1787년 2월 25일 '총독부 항의 방문' 이후에 J.F. 봉크 변호사가 "오스트리아 총독부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한다." 라고 지지의 뜻을 밝혀왔기에 반 데르 노트는 J.F. 봉크와 "오스트리아 총독부에 대한 실력 행사"에 대해 상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반 데르 노트 변호사J.F. 봉크 변호사에게 "봉크 변호사와 만나고 싶습니다. 만남의 목적은 빼앗긴 우리의 자치권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라는 편지를 봉크 변호사에게 보냈고, 봉크 변호사"저항 운동의 구심점이 되신 반 데르 노트 대표께서 저를 초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라고 흔쾌히 초청에 응했습니다. 그래서, 1787년 3월 5일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표 두 사람의 회동이 성사되었습니다.

2) 얀 프란스 봉크(1743~1792)

얀 프란스 봉크는 플란데런 지역 알스트(Aalst)에 사는 농민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J.F. 봉크의 부모는 부농이었기 때문에, 봉크는 '흙수저', '개천용' 보다는 중산층 출신으로 분류하는 쪽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J.F. 봉크의 학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브뤼셀의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움(요즘으로 말하면 중학생 시절쯤 되는 것 같습니다.)

(2)헤일(Geel)의 김나지움에서 수학

(3)뢰벤에서 법학 대학 졸업

 
 

봉크 변호사가 중학교 시절을 보낸 브뤼셀(Brussels), 고등학교(김나지움) 시절을 보낸 헤일(Geel), 법학 대학을 나온 뢰벤(Leuven)의 위치입니다. 당시 자녀를 중고등 교육 다 시키고 법학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 것 자체로도 꽤 재력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중학교, 김나지움, 법대가 있는 도시가 다 다를 정도라면, 봉크의 부모는 부농 중에서도 정말 성공한 축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얀 프란스 봉크는 법대 졸업 이후, 변호사로서 성공해서 브뤼셀 사회에서 꽤 명망 있는 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봉크 변호사보수주의자인 반 데르 노트와 달리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아 "①삼권 분립 ②시민의 권한 확대 ③성직자 및 귀족 특권의 축소"를 원하는 진보주의자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정치 성향이 원래 정반대라 사이가 좋지 않았던 H. 반 데르 노트 변호사 J.F. 봉크 변호사"압제자 오스트리아 황제 및 벨조요소 타도"에는 뜻이 같았기에 1780년대 후반에는 이 두 사람이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분위기로 꾸며본 브뤼셀 고급 맨션의 거실이랍니다. 부유한 반 데르 노트 자택의 거실로 분위기가 괜찮을 것 같아 이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2. 벨기에 저항운동 계획

1) 1787년 3월 5일, 반 데르 노트봉크의 만남

앙리 반 데르 노트의 초청을 받은 J.F. 봉크 변호사는 반 데르 노트의 맨션을 방문했습니다. 봉크 변호사는 기다리고 있던 얀센 집사의 안내를 받아 맨션의 거실로 이동했습니다. H. 반 데르 노트의 맨션 거실에는 고급 안티크 가구에 아름다운 회화(paintings), 그리고 창밖에는 아름다운 전망까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꽤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봉크 변호사는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반 데르 노트 변호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반 데르 노트: 안녕하십니까? 봉크 변호사님. 만나서 너무나 반갑습니다. 우리 참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군요.

봉크: 저야말로 벨기에 저항운동의 구심점인 반 데르 노트 대표님과 만나서 영광입니다. 제가 대표님을 위해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반 데르 노트: 오스트리아 총독부, 이거 좋은 말로 해서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봉크: 물론이지요. 대표님께서 제시하신 <1356년 헌장> 4조인 "브라반트 공(1787년에는 황제 요제프 2세)이 헌장을 지키지 않으면, 시민들의 저항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는 그 저항권을 행사할 때입니다.

반 데르 노트: 저항권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수천명의 시민을 결집시켜야 하고, 그리고 그 수천명의 시민실력 행사를 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나보다는 봉크 변호사님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이 자리에 봉크 변호사님을 초청했습니다.

봉크: 일단, 일반 대중들의 피부에 와 닿는 불만을 꼭 선전물(팜플렛)에 써 놓아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계층 구분없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어울리고, 배불리 먹는 가톨릭 축제를 폐지한 요제프 2세는 폭군이다.' 같은 말은 꼭 써야겠지요.

반 데르 노트: 그리고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침해한 점을 꼭 부각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정통 가톨릭은 우리 벨기에인 절대다수가 신봉하는, 그래서 벨기에인을 결집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니까요.

봉크: 네, 맞습니다. 그리고 현재 오스트리아 총독부 정책의 문제점과 그것이 1356년 헌장 몇 조 위반인지를 연결하면 깔끔한 구호가 나올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요.

"벨기에인 대표들동의 없이 멋대로 정책 추진: 헌장 1조 위반"

반 데르 노트: 그런 식으로 해서 2조, 3조 위반을 한줄씩 써놓고, "그래서 우리는 헌장 4조의 저항권을 발동하여 실력 행사를 한다."는 방향의 팜플렛을 만들면 되겠군요.

봉크: 네, 그런 식으로 팜플렛 내용을 작성하면 될 것 같습니다. 팜플렛 내용 초안은 저와 저를 따르는 청년들이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반 데르 노트 벨기에 대표님께서는 그 내용의 최종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반 데르 노트: 봉크 변호사님, 협력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팜플렛 초안을 가져다 주시면 간단한 법적인 검토를 한 뒤에 팜플렛 인쇄는 내 쪽에서 맡겠습니다. 약 2만 부 정도 인쇄하면 되겠지요.

봉크: 역시, 대표님께서 앞장서서 저항운동을 하시니 자금 걱정은 정말 없네요. 참,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팜플렛네덜란드어 판본프랑스어 판본보다 3배 정도는 더 만들어야 합니다.

반 데르 노트: 아! 맞아요. 브뤼셀에서 프랑스어상류층+상위 중산층에서나 쓰는 말이지, 대다수의 브뤼셀 시민네덜란드어를 쓰니까요. 사실 난 깜빡했어요. 봉크 변호사 아니었으면 프랑스어 팜플렛만 찍을 뻔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로 정치성향이 정반대인 반 데르 노트 변호사봉크 변호사는 의기투합해서 反오스트리아 총독부 팜플렛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 5,000부, 네덜란드어 15,000부팜플렛이 인쇄되었습니다.

1830년 벨기에 혁명 때 인쇄된 팜플렛의 내용입니다. 프랑스어 판본입니다. 제목은 <사람들에게 호소함:Appel au People>이고, 눈에 띄는 문구는 용감한 벨기에인(Braves Belges), 용감한 브뤼셀인(Braves Bruxellois, r뒤의 n은 오타 같습니다.)이 눈에 띕니다. 이 때는 벨기에 혁명이 한창인 1830년 9월 24일이라 "네덜란드에 맞서 싸우자"라는 단순한 말로 메시지가 전해졌을 때입니다.

2) 反오스트리아 팜플렛의 내용

우리 브뤼셀 시민은 용감하다. 1356년 10월 24일, 도시를 포위한 외적을 물리치고 이 도시에 브라반트 공이 입성할 수 있게 해준 주역은 브뤼셀 시민들이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우리는 <1356년 헌장>에 명시된 영원한 자치권과 종교적 자유를 부여받았다. 1780년 이전까지 어떤 군주도 이 <헌장>에 명시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1780년부터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야금야금 침해하기 시작하더니, 올해 1787년에는 아예 우리의 자유와 권리전부 빼앗아 버렸다. 이는 황제제국법을 지키지 않는 비상식적인 폭거이자 만행이다. 그의 불법 행위는 다음과 같은 항목에서 쉽게 알 수 있다.

1. 벨기에 대표동의 없이 행정·사법 정책 무단 시행: <헌장>1조 '벨기에 대표 동의 없이 주요 정책 실시 없다.' 위반

2. 즐거운 가톨릭 축제 카니발(Carnival) 금지: <헌장>2조 '벨기에 가톨릭의 자유 보장' 위반

3. 자치도시의 의회·법원 무단 폐쇄 및 통폐합: <헌장>3조 '벨기에 자치도시의 자유 및 자치권 보장' 위반

요제프 2세그의 앞잡이 벨조요소는 위와 같이 <1356년 헌장>의 1,2,3조모두 위반하였다. 그러므로 브뤼셀 시민<헌장> 제 4조에 명시된 '브라반트 통치자가 헌장 위반시 시민저항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거, 합법적인 저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브뤼셀 시민들이여! 힘써 들고 일어나라! 우리가 단합하여 강하게 행동하면 빼앗긴 자유와 권리를 찾아올 수 있다. 강하게, 과격하게 저항하라! 그리해야만 폭군이 두손두발 다 들고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벨기에 시민 대표 변호사

앙리 반 데르 노트

 

3) 1787년 브뤼셀 봉기의 계획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反오스트리아 팜플렛은 1787년 3~4월 브뤼셀 시 전체에 배포되었습니다. 대략 팜플렛브뤼셀 시 전체에 배포되었다고 생각한 4월 20일경, 반 데르 노트는 측근들을 모아놓고 나직하게 한 마디 지시했습니다.

"지금부터 한 달 간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소. 그래야 오스트리아 총독부 측에서 '팜플렛은 그냥 홧김에 작성한 것이고, 시민봉기 같은 건 없다.'라고 착각할 테니까 말이오."

사실 반 데르 노트는 총독부가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는 봉크 변호사벨기에 여러 길드 쪽에 연락을 비밀리에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몰래 "브라반트 꽃 문장"도 많이 생산해서 길드 쪽에 전달해 놓았습니다.

 

왼쪽은 원래 브라반트 공국(Duchy of Brabant)의 문장입니다. 바탕의 검정, 사자의 노랑, 혀와 발톱의 빨강색으로 쉽게 색이 구분이 됩니다. 이런 문장을 응용해서 만든 '브라반트 혁명' 문장이 오른쪽의 꽃 모양의 문장입니다. 안쪽부터 검정, 노랑, 빨강색이네요. 이 문장은 늦어도 1787년에는 등장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봉기한 시민들이 모자에 이 문장을 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봉크 변호사벨기에 길드와의 연락망을 통해 시민 봉기에 참여할 수천 명의 시민은 대략 확보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1579년 합스부르크 가(펠리페 2세)에 항복한 이후 일어나지 않았던 벨기에의 대규모 시민 봉기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3. 마침내 일어난 1787년 5월 30일 브뤼셀 시민 봉기!

1) 총독 관저로 난입한 수천명의 브뤼셀 시민들

앙리 반 데르 노트의 예상대로 벨조요소 백작反오스트리아 팜플렛을 본 초기인 1787년 4월에만 잔뜩 신경을 썼고, 팜플렛 작성자인 '앙리 반 데르 노트'의 자택 주위만 감시하다가 아무 단서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5월이 되어서는 '뻥쟁이 변호사의 장난이었나 보다.'고 치부하고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평소에 있던 소규모 시위도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총독부 측"시민 저항 운동"에 대한 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 총독부의 느슨해진 경계심을 본 앙리 반 데르 노트는 비밀 지령을 내려, "5월 30일 총궐기"를 봉크 변호사벨기에 여러 길드에 암호로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5월 30일이 되었습니다.

5월 30일 해가 지고,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할 때 횃불을 든 수천명의 시민들오스트리아 총독부로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민들의 대다수는 당시 MimiTino, 카를이 거주하고 있던 Place Royale(플라스 루아얄)로 들이닥쳤습니다. 성난 시민들의 모자에는 검정, 노랑, 빨강의 꽃 형태의 브라반트 문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 높여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벨기에 총독 각하! 어서 나오십시오!"

"1356년 헌장을 위반한 벨조요소처단하십시오!"

"벨기에의 자치권을 훼손한 모든 정책을 철회하십시오!"

"브라반트 독립 만세! 벨기에 독립 만세! 압제자 오스트리아는 물러가라!"

1830년 벨기에 혁명 당시 시위대의 모습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벨기에인이 시위대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집회처럼 비무장 집회가 아니라 검과 총검으로 무장한 사람도 많은 상당히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총독 관저에 들이닥친 벨기에 시민 시위대는 이것보다 적어도 몇 배는 더 살벌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벨기에인들의 살벌한 분위기를 창문으로 지켜보던 Mimi는 잠시 생각하다가, Tino카를과 같이 시위대가 잘 보이는 발코니로 나왔습니다. 벨기에 총독을 본 성난 군중은 더욱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총독 각하, 불법을 자행하는 벨조요소를 어서 처단하십시오!"

"브라반트 독립 만세! 벨기에 독립 만세! 압제자 오스트리아는 물러가라!"

이 때, Mimi발코니 쪽으로 몸을 향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 벨기에 총독 마리 크리스틴, 시민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함성을 멈춰 주시지요!"

Mimi의 목소리를 들은 거사 주동자들은 시민들에게 신호를 보내 함성을 멈추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벨기에 총독 Mimi브뤼셀 시민 대표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의 회색 모자에 "독립 브라반트 문장"을 부착하면 어떻게될까 궁금해서 만든 합성사진입니다. Mimi의 증언에 따르면 1787년 5월 30일 총독관저에 난입한 수천명의 군중들이 이처럼 모자에 '독립 브라반트 문장'을 달고 있었답니다.

2) Mimi VS 벨기에 시민 수천명

수천명의 시민들이 모인 벨기에 총독 관저가 조용해지자마자, Mimi는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기로 이름난 자랑스러운 브뤼셀 시민입니다. 그런데, 내 귀에는 시민 일부의 무절제한 약탈 소식이 들려 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실제로 이 때 벨기에 총독부 금고와 대성당의 금고가 약탈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Mimi'약탈'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시위 주동자들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데니스 쿤총독에게 겨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7년 동안 황제그의 앞잡이 벨조요소에 의해 억울하게 종교적 자유와 자치권을 침해당해 왔습니다. 그들은 제국법을 어겨가며 수도원, 자치의회, 자치법정 등을 무단으로 폐쇄했습니다. 황제와 총독부가 법을 지키지 않는데, 저희황제의 명령에 굴복하며 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흥분한 몇몇 사람들이 일탈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번 약탈은 지난 7년간 황제와 벨조요소가 저지른 횡포에 의하면 너무 경미한 수준입니다."

Mimi데니스 쿤'약탈', '일탈'을 인정한 것을 듣고 자신감을 얻어 말했습니다.

"시민대표께서도 '약탈', '일탈'은 인정하셨군요. 오늘 시민들이 궐기하셔서, 내가 사는 총독관저에 난입하는 일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14세기부터 시민 저항 운동은 그렇게 이뤄져 왔으니까요. 하지만, '약탈'이라는 범죄 행위가 발생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심각한 약점이 생겼습니다. 즉, '약탈' 때문에 여러분께서 그렇게 원하시는 '벨기에 독립'은 물 건너 가버렸군요."

'벨기에 독립이 물 건너갔다.'Mimi의 도발을 듣자 다른 시위 주동자인 요엘 크라머가 발끈해서 소리쳤습니다.

"총독 각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벨기에가 독립할 수 없다니요? 몇백년 간 도시 자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번영해 왔던 우리 벨기에'고작 약탈 한 건' 때문에 독립할 수 없게 되었다니 저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른 군중들도 요엘 크라머의 외침을 따라 "무슨 말씀입니까? 총독!"이라고 소리쳤습니다. Mimi"설명하겠으니, 조용히 하시죠." 라고 외친 뒤, 조용해지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 오스트리아가 여러분의 요구대로 벨기에를 떠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브뤼셀 약탈 사건 때문에 '벨기에는 스스로 질서 유지를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이걸 트집잡아서 남쪽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프랑스가 쳐들어 올 수 있단 말이죠. 이렇게 되면 어찌하려고 독립 선언을 하시면서 약탈 행위를 막지 않았나요?"

"SPANISH NETHERLANDS"라고 표기된 땅이 현재의 벨기에입니다. 그리고 그 남쪽의 주황색(ARTOIS 지역 전부)과 빨강색 땅(주요 도시: Lille, Dunkirk) 모두가 루이 14세 때 벨기에(당시 스페인 치하)가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역입니다.

Mimi"프랑스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요?"라는 말을 듣고 브뤼셀 시민들은 조용해졌습니다. '프랑스의 침략'은 17세기 내내 벨기에를 괴롭혀왔던 트라우마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 때 원래 벨기에 영역에 속했던 아르투아 전체(중심도시: 아라스)을 포함한 플란데런 지역에서도 많은 영역을 빼았겼습니다. 게다가 브뤼셀은 1695년 8월 루이 14세 휘하의 빌레루아 공작에 의해 끔찍하게 파괴된 적도 있었습니다.

1695년 8월 13~14일 자행된 브뤼셀 대폭격(The Bombardment of Brussels)입니다. 루이 14세의 허가를 받아 빌레루아 공작이 이끄는 7만 군대 소속의 포병대가 브뤼셀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브뤼셀 도심지가 처참한 폐허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Mimi브뤼셀 시민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프랑스 침략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격앙된 시민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의 분위기에서 '자칫하다 아무 것도 못 얻겠다.'는 심리를 파악한 Mimi시위대가 원하는 당근을 제시했습니다.

"나 벨기에 총독 마리 크리스틴은 전권공사 벨조요소 백작권한 정지 및 근신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명령합니다. 전권공사가 적어도 당분간은 벨기에 시민 여러분의 자유 및 권리를 더 이상 침해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증오하던 "벨조요소 백작권한 정지" 라는 말을 들은 브뤼셀 시민들은 '최소한의 성과는 올렸다.'고 어느 정도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벨조요소 백작의 권력을 박탈한 Mimi 총독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위대 군중들은 Mimi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했습니다.

"마리 크리스틴, 알베르 카시미르! 벨기에 공동 총독 각하, 감사합니다."

이렇게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키고, 벨기에 시민적대감을 오히려 호감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Mimi는 이 때를 놓지지 않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나 벨기에 총독 마리 크리스틴에게 있어 이 벨기에 땅은 작고하신 내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상속지나 다름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나와 테셴 공작 알베르트는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전 총독 샤를 알렉상드르 공과 같이 벨기에의 자치와 전통을 존중하는 훌륭한 통치를 해 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내 오라버니 되시는 황제께서 우리 부부에게 6년간 기회 한 번 주지 않고 '허수아비 총독'으로 만들어서, 우리 부부는 여러분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여러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던 점에 항상 안타까워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시민 여러분께서 이렇게 분연히 궐기해 주신 덕분에 우리 부부가 여러분을 위해 제대로된 통치를 하고, 여러분은 그 동안 빼앗긴 자유와 권리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부는 <1356년, 즐거운 입성 헌장>에 의해 보장되어온 벨기에인종교적 자유와 도시 자치권이 앞으로도 영원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는 벨기에인 여러분의 빼앗긴 종교적 자유와 자치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무리 완고하실지라도 <1356년 헌장>헌장 4조에 의해 행사된 오늘 여러분의 저항권 행사를 보고받으신다면, 더 이상 우리 총독 부부의 통치권에 간섭할 수 없고, 여러분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해온 지금까지의 정책을 철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Mimi"벨기에인의 자치권과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자, 브뤼셀 시민들이 갖고 있던 총독 부부에 대한 호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시민들"벨기에 총독 각하, 만세!"를 외치고 해산했습니다.

브뤼셀에는 맥주 주말 축제가 매년 9월 초에 열립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축제라고 하네요. 2023년에는 벨기에의 46개 맥주 양조장에서 제조한 400 종류의 맥주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 맥주 주말 축제 시기에는 위 사진과 같이 마차를 타고 구경할 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87년 5월 31일, 벨조요소 백작권한을 박탈하고 "벨기에인의 정당한 자치권과 권리를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한 마리아 크리스티나-알베르트 카시미르 공작 총독 부부와 그 조카 카를 대공은 마차로 브뤼셀 시내의 여러 장소를 방문했으며 가는 곳마다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4. 맺음말: 그날 밤 Mimi의 실제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Mimi는 겉보기에는 성난 수천명의 군중들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브뤼셀의 궁정 시종은 "Mimi의 냉철함 덕분에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1787년 5월 30일 사건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빈 궁정에 전해지자 요제프 2세의 대신들 역시 Mimi 부부의 대응을 칭찬했습니다.(마틴 래디 저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344p)

하지만, Mimi가 동생 레오폴트 2세(영문위키에는 brother라고 되어 있는데, Mimi가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었던 Mimi의 남성 형제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뿐이었습니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Mimi가 그날 느꼈던 인간적인 내면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자(hat)에 독립 브라반트 문장을 단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 날을 공포스럽게 만들었지.

그리고 총독부와 교회의 창고가 약탈당하던 일,평판이 나쁜 총독부 관리들을 죽여버리라고 강요한 일

이러한 일들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일이라는 걸 미리 알았기 때문에 더 두려웠어.

그리고 그들은 브라반트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었지.

마리아 크리스티나, 남동생 레오폴트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처럼 그녀1787년 5월 30일 밤 자신이 사는 처소인 관저에 들이닥친 수천 명의 군중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5월 30일 그 날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영문: we had certain information that it was intended to begin that very evening) Mimi는 확실히 이 봉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다만, 벨기에 시민들이 봉기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고 봉기시 시위대가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한 꽤 상세한 정보를 확보했기에, Mimi 그날 밤에 미리 준비된 최선의 대처를 할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이처럼 Mimi의 잘 준비된 침착한 대응으로 벨기에 시민의 1787년 5월 30일 1차 봉기('small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는 진정되었습니다. 하지만, Mimi의 5월 31일 일기를 보면 그녀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던 듯 합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애정이

결코 화살로 돌아오는 일이 없기를

마리아 크리스티나, 1787년 5월 31일 일기

1787년 6월 초, Mimi남편과 함께 벨기에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총독다운 업무"를 보면서 즐거워 했습니다. 그리고 브뤼셀 시내에서 Mimi 가족을 보고 열렬한 환영 인사를 보내는 시민들을 만날 때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Mimi는 자신의 1살 위 오빠 황제 요제프 2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5월 30일 밤, 브뤼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식을 황제가 접하게 된다면, 황제는 성공적으로 시민 봉기를 진정시킨 여동생 Mimi의 능력을 인정하기는 커녕, 자신의 정책에 차질이 빚어지는 데 분노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Mimi황제의 칙령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다음편 예고 [세 곳의 혁명: 5장]- 황제의 소환장과 초청장

Mimi의 걱정은 불행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카우니츠, G.메테르니히 등 조정 대신들이 Mimi 부부의 침착한 수습을 칭찬했지만, 황제 요제프 2세는 "왜 폭도들에게 총독이 항복했는가?"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시민 봉기의 재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슈뢰더 장군 휘하 1만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면서, 벨기에 총독부부와 문제의 전권공사 벨조요소 백작을 모두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벨기에인 대표를 초청했습니다.

황제가 못마땅해하는 벨기에 총독부부를 소환하는 것까지는 예상 범위입니다. 그런데, 벨기에인 대표는 왜 초청했을까요? 혹시, 벨기에인 목소리를 들어보기는 하겠다는 액션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