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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연재]오스트리아 제국 인물 열전- '라인(Rhine)의 수호신' 카를 대공[유년기-4편] <9살 어린이 카를, 군인이 될 꿈을 꾸다/ 마리아 테레지아, 15년간 고통을 겪다>

by Dr. Seoul 2023. 3. 12.

★★★지난 1~3편의 이야기 간단 요약

(1~3편은 분량조절 실패로 너무 길어졌으니, 아래 내용만 보시고, 이번 4편 부터 꾸준히 읽으셔도 됩니다.)

1)카를 대공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1790년에 신롬 황제 레오폴트 2세로 즉위)와 대공비 마리아 루이자 부부의 3남으로 1771년 9월 5일,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2) 카를 대공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에서 1771~1779년에는 병약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겁도 많아서 덩치 큰 말에 가까이 하는 것도 무서워할 정도였지요.

3)1779년 11월 이후 카를 대공제국수도 빈으로 와서 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양육을 맡게 된 이후, ①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정성스러운 애정과, ②어린 카를(8~9세)의 지도를 담당한 빈의 락센부르크 대저택의 고용인들의 적절한 교육, 그리고 ③더 이상 나약하지 않고 보다 강인해지고 싶다는 카를 본인의 의지 3요소가 맞아 떨어지면서, 1780년 7월 중순에는 기초 승마 기술(평보, 속보, 구보)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말을 무난하게 탈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4)어린 카를 대공은 승마에 능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가정교사 클라이스트 부인을 통해 지리학·자연과학·역사학 등을 배워서, 지적으로도 상당히 성숙했고, 음악교사 메르펠트 부인을 통해 음악/피아노 교육을 배워서 음악적 소양도 높아졌고, 몸이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리듬감도 몸에 익혀놓게 되었습니다.

<4편 Part1:9살 어린이 카를, 군인이 될 결심을 하다>

<4편 Part2:카를의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혈육과의 이별로 고통 받았던 시간들>

1. 큰형님 프란츠와의 반가운 재회

말을 잘 탈 수 있게 되어, 행동 반경이 넓어진 카를 대공은 날이 지날수록 위축된 모습은 줄어들고, 자신감은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고, 락센베르크 저택 고용인들과도 더욱 친해지게 됩니다. 카를을 진심어린 애정으로 대한 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에 대한 신뢰와 감사한 마음 역시 더욱 커져간 것도 물론입니다.

이렇게 락센부르크 저택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1780년 10월 19일, 카를의 친부모인 레오폴트 2세 부부와 큰형 프란츠를 포함한 카를 대공의 원래 가족이 카를의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뵈러 제국수도 빈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카를은 낳아주신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큰형님프란츠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이 정말 기뻤고, 프란츠 형님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1월 1일에 다음날이면 레오폴트 2세의 가족들이 락센부르크 저택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고모부 테셴 공작 알베르트, 그리고 카를은 모두 각자의 말을 직접 타고 나가서 레오폴트의 가족을 마중나가겠다고 만장일치로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목적은 '말을 잘 타는, 달라진 카를의 씩씩한 모습'을 카를의 친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직접 보여주어서,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자는 것이었지요.

①보라색 점선은 원래 카를이 레오폴트 2세 슬하에서 양육될 때 카를이 5번째 자녀, 3남이었던 것을 의미하고요, 붉은 색 화살표로 마리아 크리스티나-알베르트 부부의 슬하로 들어온 것은 1779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카를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카를 대공의 사실상의 양부모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②그리고 '장남 Franz'를 파랑색 박스표로 네모치고 '장손'이라고 써놓은 것은, 황제인 장남 요제프 2세가 자녀가 없어 이 때는 신롬 황제의 후계가 '요제프 2세→동생 레오폴트 2세(1790년 즉위)→그 장남인 프란츠(1792년 프란츠 2세로 즉위)'로 거의 합의되어 있었다고 추론합니다. 따라서, 이 때의 레오폴트 2세의 장남 프란츠는 차차기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 뿐 아니라, 사실상의 '합스부르크 본가의 장손'으로서 해야 할 일에도 상당한 압박을 이미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일 오후 2시경, 레오폴트 가족과 카를 대공은 오랜만에 반가운 가족 상봉을 하게 됩니다.

#1-1. 레오폴트 2세 가족과 마리아 크리스티나 가족의 만남

 장소: 락센부르크 저택 근교

▪ 등장인물

i) 레오폴트 2세 가족측: 레오폴트 2세(33세), 마리아 루이자(35세), 장남 프란츠(12세)

ii) 락센부르크 저택측: 마리아 크리스티나(38세), 테셴 공작 알베르트(42세), 카를 대공(9세)

(레오폴트 2세 가족은 모두가 9살의 카를 대공이 올바른 자세를 잡고 애마 라이바흐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해합니다. 주고받는 편지로 소식은 들었지만, '정말 그럴까'하고 반신반의했던 레오폴트 2세 가족은 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는 어린이 카를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카를:(말을 탄 채로 인사한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자 오랫만에 뵙나이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레오폴트: 우리야 별 일 없었지. 카를, 소식은 편지로 들었다만, 이렇게 안정되고 바른 자세로 말을 타고 있고, 표정도 밝고, 씩씩해 보이는구나. 그리고, 분명히 토스카나에 있을 때보다 건강해 보여. 락센부르크 저택에서 고모부님, 고모님과 같이 정말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이 아비는 정말 기쁘다. 

카를: 아바마마·어마마마와 떨어져 있는 것이 소자는 아쉽지만, 고모님·고모부님께서 애정을 담아 소자를 대해주시고, 락센부르크 저택의 고용인들이 소자를 극진히 돌보고, 필요한 교육을 열성을 다해 해준 덕분에, 소자 조금이나마 건강해졌고, 지식도 약간은 늘었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말을 자유롭게 타게 된 것은 저를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신 크리스티나 고모님의 애정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M.루이자: 아니, 기마술에 능한 아주버님 알베르트 공작 각하가 아니라, 여대공이신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가씨(M.루이자에게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시누이입니다. 위 가계도를 참고하세요.)께서 카를에게 기마술을 알려주셨다고요? 놀랍군요!

M.크리스티나: 제가 한 일은 지난 해 겨울에 카를 조카님 곁에 있으면서, 락센부르크 저택의 No.3니까 위축되지 말라는 암시를 준 것, 그리고 음악교사 메르펠트 부인에게 카를 조카님의 자세를 신경써서 교정해달라고 한 것. 이 정도입니다. 1780년 봄부터는 사실 저도 헝가리 귀부인들 사교 모임에 참여해야 해서 카를 조카님에게 신경을 잘 쓰지 못했어요. 기초 승마술은 대부분 이 저택의 라이너 승마조교가 가르친 것이랍니다. 

레오폴트: 역시 누님이시군요. 저희 부부가 해결 못한 카를의 양육문제를 '간접적이고 심리적인 방법'으로 1년도 안 되어 상당부분 해결하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M.루이자: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크리스티나 아가씨께서 카를을 성공적으로 양육하고 계신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카를을 이렇게 건강하게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M.크리스티나: 저는요, 두 분께서 카를 조카님의 양육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카를 조카님은 극도로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라, '대가족 분위기'에서는 제대로된 양육이 되기 어려운 반면, 저처럼 양육해야 하는 어린이는 단 1명이고, 양육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는 내향적인 성격의 어린이가 생각보다 양육이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카를 조카님의 양육에 제가 갖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잘 살렸을 뿐입니다.

M.루이자: 오늘따라 묘하게 크리스티나 아가씨께서 자꾸 겸손하신 것 같아요. 어쨌든 제 몸으로 나은 친아들 카를과 떨어져 있는 것은 아쉽지만, 크리스티나 아가씨 슬하에서 카를이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면, 카를을 계속 크리스티나 아가씨에게 양육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프란츠: 고모님, 그리고 고모부님! 제 동생 카를을 이렇게 건강하고 활달하게 양육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큰형으로서 카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늘 안타까웠는데요, 두 분께서 카를에게 이처럼 강력한 힘이 되어주시니, 저는 카를의 친형으로서 두 분을 '친동생 카를을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키워주시는 은인'이라고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알베르트: 지금은 11월이오, 생각보다 해가 빨리 떨어지니깐, 안전한 락센부르크 저택으로 이동해서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소. 일단 다함께 저택으로 이동합시다!

이렇게 해서, 11월 2일 카를 대공과 그의 친부모님, 큰형 프란츠 등 카를 대공의 형제자매들, M.크리스티나 부부 등은 락센부르크 저택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3일, 카를의 큰형인 프란츠는 카를을 데리고, 말을 타고 놀자면서 단 둘이서 말을 타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냅니다. 이 때, 서로의 속보(trot: 트로트 음악의 어원이 이 속보 trot 맞습니다) 및 구보(canter: 말발굽 소리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다그닥', '다그닥' 소리가 이 구보입니다.) 기술을 비교해 보고, 큰 저택의 풀밭에서 가볍게 구보 달리기 시합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아래 영상에서 경속보 및 구보가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승마에 관심 있으시거나 경속보나 구보의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여유 되실 때 감상하셔도 됩니다.)

 

 

(영상설명) 제가 3편에서도 인용했던 승마의 '경속보'(속보의 일종) 장면입니다. 기승자가 안장에서 가볍게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두 박자로 경쾌하게 달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속력은 13.2km/h 정도 됩니다.

 

(영상설명) 제가 3편에서도 인용했던 승마의 ' 구보' 장면입니다. 현역 승마 선수께서 찍은 동영상인데요, 강의 도중 '다그닥, 다그닥'을 매우 강조하고 계십니다. 구보는 세 박자의 말의 빠른 걸음으로 속도는 19.8km/h로 말의 기초승마 보법 중에서는 가장 빠릅니다.

#1-2. 프란츠와 카를 형제, 말타고 노는 것을 잠깐 쉬면서 대화를 나누다

 장소: 락센부르크 저택의 조용하고 한적한 쉼터

▪ 등장인물: 프란츠(레오폴트 2세의 장남: 12세), 카를(레오폴트 2세의 3남: 9세)

프란츠: 카를, 정말 놀랍구나. 구보 경주를 너한테 질 뻔 하다니, 너의 승마 실력도 장난 아니구나!

카를: 과찬이세요. 형님. 형님이야말로 다양한 승마 기술을 안정적으로 구사하시는 것이 정말 놀라워요. 여건이 된다면 형님께도 승마를 배울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게 현실적으로 어려워서(토스카나 대공의 장남 프란츠는 한동안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 있어야 하니까요) 안타깝네요.

프란츠: 아냐. 승마 스킬이야 말을 몰다가 답답하면, 알아서 스스로 생각을 하던가, 아니면 승마 조교 같은 사람에게 물어보던가 해서, 시간이 지나면 배우게 되는 것이니깐 그닥 의미가 크지 않아. 오히려 나는 카를하고 애마 라이바흐의 호흡이 너무 좋은 것에 놀랐어. 

카를: 사실, 제가 승마를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된 것이 마침 고모님 댁에 라이바흐라는 3살짜리 명마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라이바흐가 저를 일찌감치 좋아해 줘서, 그래서 라이바흐가 제 말을 너무 잘 들어서 편하게 승마 배운 것이에요.

프란츠: 나는, 카를의 섬세한 성품이 라이바흐를 감동시켰다고 봐. 토스카나 있을 때도, 카를은 아랫사람인 시종/시녀라도, 강아지 같은 동물이라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어. 분명히 카를이 라이바흐를 대할 때 지배하려고 한 게 아니라, 친구처럼, 동생처럼 대했기에 라이바흐와 친해졌을 거라 생각해.

카를: (부끄러워하며) 형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란츠: 참, 카를. 아마 고모님하고 고모부님 따라서 벨기에로 떠나야 할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니?

카를: 맞아요. 전 벨기에 총독(governer)이신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의 친동생)께서 서거하셔서(1780년 7월), 할마마마(마리아 테레지아)께서 후임 총독으로 고모님과 고모부님을 같이 지목하셨다고 고모님께 들었어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의 친동생인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1712-1780, 벨기에 총독재임:1744-1780)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커플의 결혼에 적극찬성해서, 이 극적인 연애결혼의 도우미가 되는 분이십니다. 군사적으로는 재능이 그닥 좋지는 않았으나, 통치자/행정가로서는 무난하고 평판이 좋았습니다. 벨기에 총독시절 "'자유방임'으로 가되 치안을 유지하고, 불법행위만 단속한다. 그 외에는 자치를 보장한다." 정도로 현지 벨기에인을 존중하는 정책을 썼기에 알렉상드르 공의 통치는 벨기에에서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치 시기에 벨기에는 번영했다고(flourish)합니다. 벨기에인들에게 알렉상드르 공은 친근한 '알렉상드르 아저씨(1744-1770:32~58세일 때)' 나중에는 알렉상드르 할아버지(1770~1780:58~68세) 정도의 평가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론해 봅니다. 이 총독의 후임으로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벨기에 총독으로 지목되어서, 카를 대공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함께 1781년 벨기에로 이동하게 됩니다.

프란츠: 제국수도 빈에서 벨기에 브뤼셀까지는 1100km나 되는 먼 길이야. 이제 락센부르크 저택이 아닌 낯선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데 괜찮겠어?

카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저에게는 용감한 크리스티나 고모님이 함께 있으니까요. 그 고모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죠. '카를 조카님,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어린 나이에 여러 곳을 다녀 보아야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고, 많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 몸으로 부딪쳐서 아는 게 많아져야 어른이 되어서 어떤 일이 닥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답니다. 용기를 내세요!' 라고요. 

오스트리아 빈에서 벨기에 브뤼셀까지의 거리, 자동차로 찍어보니까 최단경로가 1100km 정도 됩니다. 나중에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당시 10세의 카를 대공과 같이 빈에서 브뤼셀로 이동할 때는 약 36일에 걸쳐 31km/일 정도의 페이스로 느긋하게 이동했다고 하네요.

프란츠: 그래, 좋은 일이지. 어차피 사실상 크리스티나 고모님이 카를의 보호자니까 카를이 고모님을 신뢰하는 건 당연히 그래야 하고, 카를에게도 고모님에게도 유익한 일이지. 다만....

카를: 저도, 이 좋은 락센부르크 저택에서 든든한 고모님과 같이 살면서 다 좋은데 아쉬운 점이 있어요. 바로 큰형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토스카나에서 몸 약해서 뭐든 힘들어하던 저를 업어주시고, 여러 모로 돌봐주시던 큰형님의 모습, 제가 어찌 잊겠어요? 

프란츠: 별로 도움도 안되던 형인데, 날 생각해줘서 참 고마워. 그리고, 나도 항상 생각하고 있어, 카를과 몸은 떨어져 있지만, 카를은 영원한 내 귀여운 동생이라고. 카를이 같이 있지 않더라도, 나중에 고모와 고모부의 양자가 되더라도, 내겐 카를은 피를 나눈 소중한 동생이야.

카를: 제게도, 프란츠 큰형님은 제 영원한 큰형님이세요.

프란츠: 카를, 병약하던 너가 점점 건강해지고, 정신적으로는 씩씩함을 넘어 늠름함까지 보이고 있어. 난 왠지 카를이 훌륭한 군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카를: 정말, 아직 약한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프란츠: 물론이야! 어릴 때 병약했던 사람이 허약함을 극복해내고 강인해져서 유명한 장군이 되는 사례는 역사 속에서 많이 봤어. 게다가 카를은 이제 사실상 군인 집안 외아들이나 다름없지. 고모부 알베르트 공작께서 기병 전술에 조예가 깊으시고 군 경력도 많으신 분이니까 카를에게 좋은 군사학 선생님이 될 수 있을거야. 거기에 용감하고 예술적인 크리스티나 고모도 카를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니, 카를을 좋은 군인으로 만들 조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생각해.

카를: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좋은 군인이 되보도록 노력해보겠어요. 

프란츠: 만일 좋은 군인이 된다면, 우리 제국을 위해서 합스부르크 황실의 자부심을 걸고 용감하게 싸워주길 이 큰형이 간곡히 부탁할게. 나도 마음 한 구석에는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아무래도 난 장남이니까 직접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사실 좀 아쉬운 점이 있어. 그 대신 합스부르크 집안의 '장손'으로서의 여러 압박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ㅠㅠ

<여기까지의 설정(픽션입니다)에 대한 슈바르첸베르크의 해명>

실제 카를 대공에 대한 기록에는 "카를 대공이 성장하면서 군대·무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원래 성직자의 길을 가기를 원했던 부모에게 강력하게 군인이 되고 싶다고 주장하여, 카를 대공이 군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런데요, 황제 프란츠 2세가 카를 대공을 극진하게 챙겼던 것(①1800년에 건강 문제로 카를 대공이 출전하지 않은 것도 전혀 뭐라 하지도 않고, ②1829년 카를 대공의 칼뱅파 배우자인 헨리에타 여대공이 별세했을 때 개신교인을 가톨릭의 성지에 들일 수 없다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동생을 극진하게 사랑해준 그 여성을 종파를 이유로 황실 묘역에 들이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황제포스·형님포스 발휘하면서 기어코 합스부르크 가톨릭의 묘역에 평생 개신교인이었던 헨리에타 여대공을 들여놓은 일 등)을 볼 때, 혹시 카를 대공의 큰형 프란츠가 카를 대공이 군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데 한가지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나 해서 픽션을 가미해서 이 장면을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카를 대공이 말을 잘 타는 것을 확인한 형제의 상봉은 마리아 테레지아 돌아가시기 전에 있어야 화기애애하니까 마리아 테레지아 서거(11월 29일) 이전 시점으로 잡은 것이고요.

프란츠를 포함한 레오폴트 2세의 가족들은 위대한 여군주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나고, 11월 8일경 제국수도 빈을 떠나 토스카나 대공국을 향해 출발합니다. 이것이 레오폴트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2. 위대한 여군주 마리아 테레지아의 서거의 배경 알아보기

-1부: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에 닥친 정신적인 충격 요인

★ 1761~1771년 10년간 직계가족 9명과의 이별(사망, 정략결혼, 전출 등의 이유로)

성명
마테지와의 관계
이별한 연도
이별한 이유
이동 장소
After Story
카를 요제프
차남
1761
요절(천연두)
   
마리아 요한나
8녀
1762
요절(천연두)
   
(가)
프란츠 1세
남편
1765
사망(뇌졸중)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이 우울증, 폭식증 등에 빠져버리고, 검은 상복만 입고 지내게 됩니다.
레오폴트 2세
원래 3남
(형 사망 후 차남)
1765
서거한 아버지 영지 토스카나 통치로
인한 전출
빈→피렌체
그나마 어머니 맘 알아주고 오스트리아 제국 구조를 이해하는 몇 안되는 자녀(2~3명) 중 하나인데, 떠나 버리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나)
마리아 요제파
9녀
1767
요절(천연두)
 
16세에 예쁜 딸이 요절한 것도 너무 슬픈 일인데, 정략결혼 순서까지 완전 꼬여버렸습니다. ㅠ 자세한 설명은 뒤쪽에서 하죠.
마리아 카롤리나
10녀
1768
정략결혼
빈→나폴리
그나마 일 제대로 하는 씩씩한 여장부. 시집가서 나폴리 왕국 장악하고, 나폴리 왕국을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위성국으로 만듭니다. 한편, 친정 오스트리아의 투자를 받아서 나폴리 왕국 내정도 꽤 수준급으로 다스립니다.
마리아 아말리아
6녀
1769
정략결혼
빈→파르마
연애결혼 하려고 했다가 어머니에 의해 저지당하고 강제로 소국 파르마에 정략결혼 당해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모녀간의 연을 끊어버립니다.
파르마 여공작으로서의 통치는 엄청 잘했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의 외세 전부 몰아내고, '파르마 공국'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현지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11녀(막내딸)
1770
정략결혼
빈→파리
사실, 언니 마리아 요제파의 요절로, 순번이 밀려서 프랑스로 정략결혼을 온 것이랍니다. 프랑스로 가서 저지른 여러 실수는 '준비가 안된' 탓이 큽니다. 14세에 프랑스어도 제대로 못 익힌채로 프랑스로 갔으니 뭘 제대로 할 수 있을리 없죠 ㅠ
페르디난트
4남
1771
통치를 위한 전출
빈→밀라노
17세에 밀라노 총독 자리가 비어서 그쪽으로 부임받아 어머니의 곁을 떠납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슬프셨을 것 같지 않습니까? 남편과의 사이에서 직접 자기 몸으로 16명(5남 11녀)를 낳았는데 1761~1771년에 사망으로 잃은 가족만 4명입니다. 그리고 딸을 정략결혼시킨 것은 어머니로서 엄청 잔혹한 행위지만, 그 잔혹한 행위를 하면서 마음이 편하셨을 리가 없지요. 

그 중 제 생각에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 가장 큰 아픔으로 다가온 것은 (가)남편 황제 프란츠 1세께서 서거하셔서 미망인이 되신 것 (나) 예쁜 아홉번째 딸 마리아 요제파가 갑자기 천연두로 16세로 요절한 것. 이렇게 두 가지가 특히 타격이 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가.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의 서거로 인한 아픔

☞이건 밑의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초상화만 비교해도 쉽게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왼쪽은 1762년(45세), 오른쪽은 1771년(54세)의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모습입니다. 1762년 아직 남편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은 눈빛이 살아 있고, 피부에 탄력도 살아 있고, 머리숱도 꽤 풍성해 보이는데, 1771년의 모습은 눈에는 마치 울었던 흔적이 있는 것 같고, 탈모도 심해 보이고, 우울해하시는 기색이 완연하십니다. 그리고 복장은 검은 색의 상복이지요.(마리아 요제파의 사망인 1767년부터 따져도 4년이나 지난 후입니다.) 하지만, 이 분이 괜히 위대한 여군주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우울하고 힘든 1765~1780년에 오히려 정무에서 맡은 일은 이전보다 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셨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업적의 절반 이상도 미망인 시절인 1765~1780년에 나옵니다.

 

1765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은 저는 상복을 입은 것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왼쪽 그림이 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가 서거하신지 얼마 안 된 1766년경(49세)인 것 같습니다. 아직 테레지아 전하의 피부에 탄력이 있고, 딸인 마리아 요제파 사망 이전이라 남편의 추모에만 집중하시는 것 같거든요. 왼쪽 초상에서 들고 있는 초상화가 아마 남편이신 전 황제 프란츠 1세의 초상화겠지요. 오른쪽 초상은 1773년(56세) 초상입니다. 확연히 체중이 불어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초상에서 확인하실 수 있듯이 마리아 테레지아께서는 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의 사후, 옷차림은 오로지 검은 상복만 입으시며, 우울증과 폭식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1765년까지는 긍정적이고, 잘 노시고, 활기차신 성격이었는데, 1765년 8월 18일 미망인이 되신 후로는 비관적이고 침울해하시는 성격으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게 되셨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슬픔에 잠기고 성격이 비관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국을 지지하는 버팀목이다."라는 책임감은 더욱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편 살아있을 때보다 열일하십니다. 위에도 말씀드렸듯이 전 아동(6~12세) 초등교육(오스트리아 본토:1771, 헝가리:1774) 등 중요 개혁들이 이 힘드셨던 '미망인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나. 예쁜 16세 딸 9황녀 마리아 요제파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한 슬픔, 그리고 정략결혼 순번까지 꼬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시집보낸 '마리 앙투아네트'로 인해 골머리 썩으시는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

마리아 요제파 황녀(1751-1767)의 초상

이 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9녀 마리아 요제파 황녀(1751-1767)입니다. 아마 딱 시집보내기 직전 16세때 나폴리 왕국에 보내려던 초상화인 것 같습니다. 나폴리로 시집가기 직전,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요절하십니다.

☞취향에 따라 이 분의 미모는 평가가 달라지시겠지만, 적어도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는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은 딸' 이었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정략결혼으로 이별하게 될 딸이라도, 허망하게 천연두로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 1767년 10월 15일 남편에 이어 마리아 요제파 황녀(당시 16세)마저 잃은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심정은 정말 비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필 이 분이 사망하신 때가 나폴리 왕가에 시집보내기 직전이라, 나폴리 왕가에는 급하게 바로 밑의 동생인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당시 15세)를 원래 시집보내기로 한 위 초상화의 마리아 요제파 대신에 시집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카롤리나의 시집보내기 전 초상화는 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언니 대신 나폴리 왕국에 시집가게 된 마리아 카롤리나(1752-1814)입니다. 정략결혼이지만 부부관계는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슬하 자녀가 영문위키 기준 17명(7남 10녀)입니다. 나중에 황제가 되는 프란츠 2세의 고모인데, 큰딸 마리아 테레사(1772~1807, 그러니깐 프란츠 2세하고는 4촌입니다.)를 프란츠 2세의 두 번째 황후로 시집보내서 프란츠 2세의 고모에서 '장모님'으로 변신합니다.(한동안 좀 뜸했던 근친혼이 부활한 거죠.)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다른 자녀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 최후까지 살아남으시는데, 1806-1814년에는 제국수도 빈으로 오셔서, 황제의 장모님(장모님 태후?)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절친한 자매였기에, 이 분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듣자 프랑스와 혁명이라면 이를 갈고 증오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오스트리아 내부 주전파의 배후에는 언제나 '황제의 장모님' 마리아 카롤리나가 계셨답니다.

☞나폴리 쪽은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를 시집보내서 어떻게든 해결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깐 남은 딸이 11황녀(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생) 뿐이고 시집보내야 할 곳은 부르봉 본가인 프랑스입니다. 그래서 다른 부르봉 분가 왕조지역(파르마, 나폴리 등)보다 준비가 더 철저했어야 했는데, 프랑스 쪽에 시집 보내려던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를 나폴리 왕국에 보내고 나니,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사 일이 바빠서 자녀 교육에 많이 신경을 못 썼고, 특히 어린 자녀쪽은 더더욱 신경을 못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막내딸 11황녀 M.앙투아네트에게는 오히려 아버지인 프란츠 1세가 더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프란츠 1세(1708~1765)에게 M.앙투아네트는 47세의 느즈막에 얻은 너무 귀여운 막내딸입니다. 아마도 프란츠 1세는 막내딸을 엄청 귀여워했겠지요. 앙투아네트는 아버지를 많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앙투아네트는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 다르게, 10대 초반 때는 '말을 잘 타고 장난을 좋아하는 선머슴'끼가 다분한 소녀였습니다. 아마, 어릴 때 사냥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많이 따라다니느라, 말타기와 사냥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위의 언니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와 함께 세트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사고뭉치로 유명했답니다. 

◎사냥복 입고 사냥을 나가는 마리 앙투아네트(1772년)

이건 Joseph Kranzinger라는 독일계 화가가 1772년 마리 앙투아네트를 따라 베르사유로 와서 그린 사냥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17세)의 초상화입니다.(출처:Marie-Antoinette von Österreich-Lothringen, 독일위키). 이때는 루이 16세하고 아마 첫 관계도 못 했을 때라, 오스트리아에서 즐겨 하던 사냥이 많이 땡겼던 것 같습니다. 말채찍 잡고 있는 손모양이 제가 보기엔 범상치 않습니다.

☞어떠신지요? 확실히 위의 초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치스런 드레스를 걸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사실 10대 초기(12-14세)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이 바로 위 초상화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측 기록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예쁜 초상화를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사냥복 입은, 사냥 나갈 때 그림밖에 없어서, 초상화를 급조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급조한 초상화 밑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1769년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글쌔요, 전 외모는 그렇다치고, 이 초상은 9황녀 마리아 요제파나 10황녀 마리아 카롤리나에 있는 '번쩍번쩍함'이 느껴지지 않고 붓터치도 썩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앙투아네트의 손 쪽은 붓터치가 영 아닌 것 같아서, 급조한 티가 나는 것 같은데요?

◎1770년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1769년 초상화보다 붓터치는 나은데, 이건 황녀답지 않게 너무 소박합니다. 얼굴 쪽을 예쁘게 그리느라, 다른 쪽에 신경을 전혀 못 쓴듯 합니다.

◎9황녀 M.요제파, 10황녀 M.카롤리나, 11황녀 M.앙투아네트 초상 비교하겠습니다.

 
 

9황녀, 10황녀, 11황녀 초상 비교해 보겠습니다. 외모는 빼고 봐도, 9황녀는 진짜 번쩍번쩍 광채가 돋보이고요, 10황녀는 9황녀만은 못해도 피부 깨끗하고, 드레스 묘사가 잘 되어 있어서 이쪽도 좋은 초상으로 보입니다. 헌데 막내 11황녀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는 옷부터가 좀, 황족치고는 소박해 보이고, 헤어스타일도 언니들만 못하네요. 비교해 보니 확실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는 '급조된 초상화'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략결혼은 '초상화조차 급조하는' 준비 안된 티가 팍팍 나는 정략결혼이었지요.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집 가서 많은 실수를 저질러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당히 부실하게 정략결혼 교육을 받았던 마리 앙투아네트 

☞아래의 M.앙투아네트가 만든 간단한 수예작품(?)과 글씨를 보고 설명드리겠습니다.

왼쪽에 있는 '헝겊'을 붙인 것이 어설퍼 보이죠?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글씨입니다. 제가 빨강색 원으로 체크해 놓은 곳, 펜으로 글씨를 쓰다가 잉크가 번진 자국이 매우 선명하지요. 자세한 것은 밑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출처: Marie-Antoinette d'Autriche, 프랑스어 위키의 사진첨부된 것이고요, <Gazette des atours de Marie-Antoinette>라는 책(1782년 저작), 아마존에서 파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Gazette des atours de Marie-Antoinette>라는 책의 일부고, 아마,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물'을 왼쪽에 붙이고 그에 따른 설명을 오른쪽에 적은 것 같습니다. 이 필적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필적이 맞는지는 확인 부탁드립니다.

◇1782년이면 앙투아네트의 나이 27세입니다. 27세 때도 "펜글씨"에 눈에 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글씨 쓰는 습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알기로 제가 위에서 동그라미친 잉크 번진 흔적은 철자가 틀린 글씨를 고쳐 쓰려고 하던가, 아니면 필적이 맘에 안들어서 억지로 고치려고 했던가. 그러한 이유로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필적도 악필로 보입니다. 

※소결론: 마리 앙투아네트는 심지어 글씨체조차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에 시집을 갖고 그 안 좋은 필체가 시집간지 12년 되는 1782년까지 별로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자꾸 잉크로 글씨 고치는 습관이, 프랑스어 쓸 때만 나오는지, 아니면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를 펜글씨로 쓸때도 나오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급하게 프랑스로 시집보낸 이후 골머리 썩으시는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

◇막내딸의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을 분이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이십니다.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고, 메르시 백작이라는 감시역으로부터 프랑스 궁정의 동향을 보고받는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의 심정은 계속 속이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프랑스에 시집보낸 딸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속앓이를 하시는 마테지 전하의 상황은 눈을 감으시는 1780년 11월 29일까지 계속됩니다.

▣오늘의 글, 카를 대공 4편 요약

<Part.1 카를 대공 쪽 이야기>

1) 승마 훈련을 통해 말을 타는 데 능숙해지고 건강해졌으며 씩씩해진 9살 어린이 카를 대공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뵈러 제국수도 빈으로 상경한 친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재회했습니다.

2)특히, 카를 대공은 큰형인 프란츠 대공(후일의 프란츠 2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프란츠 형님이 '카를, 넌 좋은 군인이 될 수 있어.'라고 해준 말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좋은 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생전 처음으로 가지게 됩니다.

<Part.2 마리아 테레지아 쪽 이야기>

-1780년 11월 말 서거하시기 전 배경묘사 1부

1)1740~1780년 내내 제국의 버팀목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서는 1761~1771년 10년간 직계 가족 9명과의 이별이라는 깊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2)그 이별 중에서도 가장 충격이 큰 사건은 (1)남편 황제 프란츠 1세의 서거(1765년), (2) 예쁜 9황녀 마리아 요제파(1751-1767)의 요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유럽 왕실 역사상 유래없는 연애결혼으로 결혼에 성공한 남편의 서거는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원래 쾌활하고, 낙천적이던 전하의 성격은 프란츠 1세의 사후 미망인이 된 이후에는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바뀌어버립니다.

☞(2)마리아 요제파 제9황녀가 16세에 요절한 사건은 그 자체도 어머니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지만, 연쇄적으로 외국에 시집보내는 순번이 꼬여버려서, 전혀 결혼 준비가 안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황녀가 가장 까다로운 국가 프랑스에 시집가버리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버립니다.

3)전혀 결혼 준비가 되지 않은 마리 앙투아네트 황녀가 1770년 프랑스 세자빈, 루이 15세 사후 1774년 프랑스 왕비가 되자, 걱정대로 프랑스 쪽, 마리 앙투아네트 쪽에서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일은 프랑스에 파견한 감시역 메르시 백작에 의해 마테지 전하에게 보고되었고, 전하의 고민이 깊어지게 만듭니다.

<마치며>

마리아 테레지아 전하께서 1765년 이후 심각한 건강악화를 겪게 되신 요인 중 중요한 요인 첫번째로 "혈육과의 이별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보다 친숙하신 인물들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등장하는지라 저는 이번 글에서는 카를 대공보다는 그 할머니 되시는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 쪽에 보다 중점을 두고 서술하였습니다. 

원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서거와 그 분의 사후 불거지는 황제 요제프 2세와 그 여동생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갈등까지 쓰려고 했는데, 제 글을 꾸준히 챙겨보시고, 계속 좋은 조언을 해 주시는 '윰딩'님의 "글이 너무 길면 곤란하다"는 조언이 있었기에, 제목과 내용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내용도 짧지는 않지만, 초상화가 많고 글은 생각보다는 적기 때문에, 이전보다는 읽으실 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