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일론 탄생에 숨겨진 허무한 죽음
세상을 바꾼 화학자 (1) 월리스 흄 캐로더스
‘석탄과 물, 공기가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1940년 5월 15일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내걸린 미국 뉴욕시의 각 백화점 앞에는 개장 몇 시간 전부터 여성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사려는 물건은 다름 아닌 스타킹이었다. 백화점이 개장되자 스타킹을 산 여성들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가에서 다리를 들고 선 채 스타킹을 신어보기도 했다.
시판 첫날부터 미국 전역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킨 이 스타킹의 재료는 바로 나일론이었다. ‘나이롱 환자’나 ‘나이롱 대학생’ 등 나일론이 ‘가짜’나 ‘싸구려’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첫 시판 당시 나일론 스타킹은 기존의 실크 제품보다 2배나 비쌌다. 실크보다 질기고 면보다 가벼우며 신축성이 뛰어난 나일론 스타킹은 불티나게 팔렸다.
시판 첫날 미국 전역에서 팔린 나일론 스타킹은 약 500만 켤레. 나일론 스타킹을 만든 듀폰사는 시판 첫해 900만 달러, 이듬해 2천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최초의 합성섬유이자 재료의 혁명을 가져왔던 나일론의 첫 제품은 1938년 2월 듀폰사에서 내놓은 칫솔모였다. 이전까지 칫솔모의 재료는 수퇘지의 목털로서, 잘 마르지 않고 축축해 세균이 득실거렸다. 이에 비해 나일론 칫솔모는 금세 말라 위생적이었고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초기 나일론 칫솔모 제품은 너무 딱딱해 잇몸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다.
나일론이 정작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성의 다리를 감싸는 스타킹 소재로 사용되면서부터였다. 이후 나일론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차츰 사용 범위를 넓혀 나갔다. 당시 여성용 블라우스는 값비싼 실크를 사용했는데, 마침 나일론이 시판될 무렵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비단 수입이 단절됐다. 이후 나일론은 급속도로 여성용 고급의류 시장을 장악해갔다.
나일론은 세계 최대의 화학회사인 듀폰사의 규모를 2배로 늘렸으며, 중합체를 듀폰사의 핵심기술로 자리 잡게 했다. 오늘날 나일론은 의복뿐만 아니라 낚싯줄, 수술용 실, 융단 및 벽걸이 장식재료, 돛과 삭구, 사출 성형, 기계부품 등 1인당 연간 700g을 사용할 정도로 폭넓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공에 비해 정작 나일론을 개발한 화학자인 월리스 흄 캐로더스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그는 스타킹 소재로 사용된 6-6 나일론의 특허를 신청한 지 3주일이 지난 어느 날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방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캐로더스는 1896년 미국 아이오와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신체도 허약했고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도 않은 그는 평범한 청년기를 보냈다. 전문대에서 상업부기를 배운 그가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대의 유명한 화학자로서 공유결합론의 창시자였던 루이스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화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캐로더스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분자결합론을 전공하여 192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해부터 하버드대학의 강사로 활동한 캐로더스는 당시 첨단 분야였던 중합체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고무나 섬유 같은 화합물의 화학적 특성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많은 화학자들은 수많은 저분자 물질이 불규칙하고 복잡하게 결합하여 그와 같은 물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독일의 화학자 슈타우딩거는 “섬유질인 셀룰로오스의 분자는 고분자로 구성돼 있으며, 저분자의 물질을 합성하면 고분자의 인조고무나 합성섬유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화학계의 의견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슈타우딩거의 주장에 관심이 많던 캐로더스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듀폰사에서 중앙연구소 기초연구부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강사 월급의 2배에 가까운 금액을 제시해 온 것이다. 상업적 연구가 아닌 기초연구라는 조건과 좋은 연구환경의 제공은 연구에 매달리고 싶은 젊은 과학자에겐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또 당시 중앙연구소를 이끌던 스타인이 요구한 “새롭게 등장한 중합체의 세계를 열어보자”는 제의도 캐로더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듀폰사로 옮겨온 캐로더스는 첫 번째 연구과제로 합성고무를 선택했다. 전선과 타이어 등에 사용되는 천연고무의 수요량 급증으로 당시 합성고무에 대한 연구가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캐로더스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네오플렌’이라는 인공고무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캐로더스는 합성섬유로 방향을 바꿔 연구에 열중했다. 새로운 중합체의 합성에 전력을 기울이던 그는 마침내 ‘폴리아미드’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폴리아미드는 녹는점이 너무 높아 섬유로 길게 뽑아낼 수가 없었다. 이처럼 난관에 부닥친 그에게 아이디어를 준 것은 연구원들의 우연한 장난이 계기가 됐다.
1934년 듀폰 중앙연구소 연구원들은 캐로더스가 외출한 틈을 타서 모처럼 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 만들어 놓은 재료를 가지고 누가 더 길게 실을 뽑는지 내기를 한 것이다. 연구원 중 한 명인 줄리언 힐은 병속에 들어 있던 폴리에스테르를 유리막대로 찍어 허공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마치 거미줄 같은 실들이 길게 뽑아져 나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캐로더스는 전율을 느꼈다. 캐로더스 연구팀은 상온에서 잡아 늘이면 분자들이 한 방향으로 늘어서게 되어 폴리에스테르의 강도가 증가하는 것을 밝혀냈다. 녹는점이 낮아 섬유를 만들 수 없는 폴리에스테르에 이런 성질이 있다면 녹는점이 너무 높은 폴리아미드는 어떨까?
캐로더스는 오랫동안 선반 뒤로 밀쳐놓은 폴리아미드를 집어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 폴리아미드에서는 긴 실이 내뿜어져 나왔다. 나일론이 인류에게 처음 인사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캐로더스가 처음 개발했던 나일론은 질기지 않아서 상업적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때마침 중앙연구소 책임자가 바뀌었고, 새로 온 책임자는 기초연구보다 상업적인 성과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순수한 기초연구를 지향하던 캐로더스는 이 같은 상사의 성향에 맞추지 못했다. 원래 약간의 우울증이 있던 그는 그때부터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상사의 지시대로 6-6 폴리아미드를 연구했으나, 갑작스런 누이의 죽음과 맞물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결국 나일론의 공정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37년 4월 29일 그는 필라델피아의 어느 호텔방에서 청산가리를 들이켰다.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이렇게 발명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안고 탄생한 나일론은 듀폰이 세계 최초로 합성섬유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사용한 상품명이지만, 현재는 섬유를 만드는 성질의 폴리아미드계 합성고분자를 일컫는 일반용어가 되었다.
나일론(nylon)의 의미에 대해서는 캐로더스의 허무한 죽음에서 따온 니힐(nihil, 허무)과 듀폰(Dupont)의 온(on)을 합성해 만든 이름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