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니 축구공으로 나노 시대 열다 세상을 바꾼 화학자(2) 리처드 E. 스몰리
“도대체 무슨 모양으로 결합된 것일까?”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며칠 동안 꼼짝도 않고 고민에 잠겼다. 얼마 전 헬륨 가스 안에서 흑연에 강력한 레이저 빔을 쏘아 기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탄소분자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소만으로 이루어진 물체는 당시만 해도 다이아몬드와 흑연뿐이었다. 다이아몬드는 1개의 탄소원자가 4개의 탄소원자에 결합된 형태를 하고 있고, 흑연은 6개의 탄소원자가 6각형으로 배열돼 있다. 이런 구조의 차이로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물리적 성질이 매우 다르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이 물질은 질량분석계로 측정한 결과 60개의 탄소로 이루어진 것이 확인됐다. 탄소원자 간에 어떤 형태로 결합되었기에 이처럼 안정된 탄소덩어리가 되었을까? 과학자의 의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점심식사 후 식탁에 앉아 계산용지로 이리저리 맞추어보다가 언뜻 축구공을 떠올린 것. 정육각형과 정오각형으로 이루어진 32면체인 축구공의 꼭지점이 바로 60개임을 깨달은 것이다. 과학자는 계산용지로 축구공 형태를 한 모형을 만들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랬더니 튀어오를 정도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 과학자의 이름은 바로 나노기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처드 E. 스몰리이며, 그가 발견한 물질은 풀러렌이다. 풀러렌은 훗날 그의 추측대로 정말 축구공 모양임이 확인됐다. 1991년 4월 X선 회절과 적외선 스펙트럼 등으로 측정한 결과, 풀러렌은 축구공처럼 20개의 6각형과 12개의 5각형이 합쳐진 모양이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건축가이자 수학자인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가 1940년대에 고안한 구조물인 지오데식 돔과도 같은 구조였다. 풀러는 ‘오일러의 정리’를 건축에 응용, 정이십면체와 같은 정다면체의 면들을 분할해 가면서 면적을 줄이는 방법으로 지오데식 돔을 개발했다.
숨겨진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탄소동소체의 구조가 지오데식 돔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과학자들은 건축가인 풀러의 이름을 따서 ‘풀러렌’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풀러렌 중에서도 특히 탄소원자 60개로 만들어진 C60을 ‘벅민스터 풀러렌’이라 하며, 간단히 줄여 벅민스터의 축구공임을 뜻하는 ‘버키볼’이라고도 한다.
▲ 각 탄소동소체의 구조 ⓒ
스몰리가 탄소 동소체인 풀러렌을 발견한 것은 라이스 대학의 동료 교수인 로버트 F. 컬 및 영국의 해럴드 W. 크로토와의 공동연구로 인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성간에 널리 퍼져 존재하는 탄소 먼지에 대해 흥미를 가졌는데, 크로토가 적색거성에 의해 생긴 탄소분자들의 구조를 결정하기 위해 성간먼지에서 탄소를 포함하는 몇 가지 분자들을 확인했다.
당시 학자들은 성간 먼지가 주로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진공 속에 삽입한 두 개의 탄소 전극을 통해 전류를 통과시키면서 흑연을 기화시켰다. 세 사람은 강력한 레이저빔을 사용하여 1만℃에서 흑연을 기화시킨 후 검댕 분자의 조성을 조사했는데, 탄소원자를 60개 갖고 있는 분자가 다른 화합물보다 많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85년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풀러렌은 독특한 모양과 더불어 여러 가지 물리적 특성으로 과학자들의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우선 원자 크기로 매우 작기 때문에 이용도가 그 어느 물질보다도 높다는 데 장점이 있다.
특히 축구공처럼 속이 텅 빈 구조는 의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풀러렌 안에 약체를 투입한 후 체내에서 적당한 시기와 위치에서 문이 열리는 약품의 개발이 가능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재 암의 약물치료가 암세포 주변의 정상세포까지 위협하는 경우가 많은데, 풀러렌을 이용하면 ‘표적지향형 약물전달시스템’으로 활용될 수 있다.
더불어 풀러렌의 전기적, 광학적 성질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빛을 흡수하고 전자를 잘 받는 성질이 있는 C60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알칼리 금속을 적절히 결합시키면 초전도체가 된다는 보고 이후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 여러 금속원자를 섞어 도체, 초전도체로 이용하거나 수많은 풀러렌을 서로 연결해 새로운 섬유, 촉매, 센서 등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 미세한 구조로 인해 조그만 양으로도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풀러렌의 이런 다양한 쓰임새는 나노과학기술(NT)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즉, 세상에 나노(nano)라는 말을 널리 알리는 데 풀러렌이 일등공신 역할을 한 셈이다.
나노기술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스몰리는 1943년 6월 미국 오하이오주의 애크런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구공장 가문 출신으로서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와 인쇄기사이자 뛰어난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스몰리는 일찍부터 과학에 빠져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종종 집 주변 연못에서 단세포 생물을 채집해 현미경으로 관찰하곤 했다.
▲ 풀러렌의 구조 모형 ⓒ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는 스몰리에게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데, 미국 여성 최초로 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는 화학을 전공하게 된다.
당시 미국 최고의 화학 학부 과정을 자랑하던 호프대를 거쳐 미시건대로 진학한 그는 졸업 후 세계적인 화학회사인 셀에 입사한다. 품질관리 화학기사로 일하며 스몰리는 폭넓은 현장경험을 통해 ‘화학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1973년 프린스턴대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딴 그는 곧바로 시카고대의 포스트닥으로 자리 잡아 레너드 와튼 및 도널드 레비 등과 함께 초음파 레이저 분광학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한다. 1976년 스몰리는 텍사스 휴스턴의 라이스대 화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는데, 당시 라이스대는 레이저 분광학 분야에서 앞선 연구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거기서 컬 교수와 함께 분광장치 AP2를 개발하고, 그 장치를 통해 풀러렌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풀러렌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몰리는 1996년 마침내 크로토, 컬과 함께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스몰리는 과학자로서 결코 좋지 않은 일들을 겪기도 한다.
절친한 연구 동료였던 크로토와의 결별이 그 첫 번째 사건. 풀러렌의 구조를 규명한 것을 놓고 서로의 공을 내세우다 충돌하여 결국 결별에까지 이르렀다. 두 번째는 노벨상 수상에 얽힌 로비설이다. 축구공처럼 생긴 초미니 탄소분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운 데다 풀러렌은 특이한 성질로 응용범위가 넓어 노벨상 수상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스몰리는 전 세계 주요 과학자들에게 풀러렌 발견의 중요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강연 등에서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그의 적극성이 로비설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러렌 발견의 세 공로자 중 스몰리가 나노기술의 대부로 꼽힐 수 있었던 건 그의 나노기술에 대한 애착과 부단한 노력 덕분이었다. 1991년 풀러렌을 관찰하던 일본의 이지마 박사가 우연히 탄소나노튜브를 발견, 가늘고 긴 대롱 모양의 탄소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 이후 스몰리의 행보
이후 스몰리는 연구 대상을 풀러렌에서 탄소나노튜브 쪽으로 전환하여 1996년 탄소나노튜브를 다발로 묶는 데 성공한다. 무진장 강한 탄소나노튜브 밧줄을 만든 것이다. 그가 합성한 다발 형태의 탄소나노튜브가 반도체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탄소나노튜브는 단번에 NT의 핵심 연구과제로 떠오른다.
이처럼 나노기술의 세계적 리더였던 스몰리는 흥미롭게도 나노기술의 장래에 대해서는 지나친 기대와 낙관을 경계하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미국의 에릭 드렉슬러 박사가 “미래에는 스스로 자기복제를 하는 나노로봇이 등장하여 화학반응을 유도하며 모든 노동을 대신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스몰리는 나노로봇의 등장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원자들 위치를 이리저리 조작한다고 해서 분자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며 “드렉슬러가 화학적으로 불가능한 분자조립기 위험성을 부각시켜 나노기술에 대한 불신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말년에는 환경보호를 위한 대체에너지 기술 관련연구의 옹호자로도 활약한 스몰리는 지난해 10월 28일 림프종 암으로 투병하다 결국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