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편 서장: 브라티슬라바에서 돈독해진 가족관계> 요약
1781년 겨울과 봄인 1~5월을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은 당시 헝가리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보냅니다. 거주지인 브라티슬라바 성은 아름답고 예술적 공간이 높은 장소로서, 10세의 어린이 카를 대공은 이곳에서 여러 헝가리 귀족/귀부인들과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헝가리 귀족들 중 인상깊었던 사람은 왕년의 명장 하디크 안드라스(A. 하디크) 장군과 카를과 나이차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서 친근하게 느껴졌던 귤라이 형제(형: 이그나츠, 동생: 알베르트)였습니다.
그리고 카를 대공과 고모부 알베르트 카지미르 공작-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는 드넓은 헝가리 평원에서 승마를 즐기면서 더욱 가까워져서, 실질적으로 카를 대공이 M. 크리스티나 부부의 양자나 다름없는 아래 그림과 같은 관계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이제는 사실상 마리아 크리스티나(Mimi)는 카를의 양어머니, 테셴 공작 알베르트(Tino)는 카를의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카를 대공의 실질적인 가족은 18세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에 흔히 보이는 부부와 1명의 자녀로 구성된 "3인 핵가족" 이었습니다.
<1장: 벨기에로 가는 여행길>
1.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 벨기에 공동 총독으로 발령받다.
1781년 5월 26일, 카를 대공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의 주요 수행원들과 함께 "알베르티나 컬렉션(M. 크리스티나 부부가 보유한 대량의 미술품 컬렉션)" 같은 귀중품과 카를의 라이바흐를 포함한 각자의 애마들을 챙겨서 정들었던 브라티슬라바 성을 나와 다시 제국수도 빈으로 출발했습니다. 빈에서 M. 크리스티나 부부의 벨기에 공동 총독 임명식이 5월 31일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M. 크리스티나 부부를 총독으로 임명하는 주관자는 1781년 2~4월, 두 달간의 벨기에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황제 요제프 2세였습니다. 황제 요제프 2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는 총독 임명식에서 다음과 같은 의례적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황제 요제프 2세: 테셴 공작 알베르트와 그 배우자 여대공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신임 벨기에 총독으로 임명한다.
M. 크리스티나 부부: 황제 폐하! 어명을 받들어 벨기에 총독의 임무를 완수하겠나이다!
그리고 벨기에로 떠나는 긴 여정의 준비를 마친 6월 3일,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카를 대공은 제국수도 빈에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까지 약 1,300km의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어린 카를과 나이든 수행원 등 건강을 신경써야 할 사람들도 있었고, 라이바흐와 같은, 카를 가족이 보유한 말들의 건강도 챙겨야 했기에 M. 크리스티나 부부는 하루에 43km 정도 페이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참고: 직접 몽골에서 게르 생활을 1년간 하신 부흥 회원님 '역사를찾아서' 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이 하루 이동할 수 있는 최대 거리는 75km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지도를 보고 독일 영방 내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여행 경로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로는 "빈(V)→린츠(Lz)→뮌헨(M)→하이델베르크(H)→룩셈부르크(Lx)→리에주(Li)"를 거쳐 마지막으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가는 경로였습니다. 다음 아래 지도에서 그 경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지도에 M. 크리스티나가 정한 여행 경로를 표시했습니다. 빈(V)과 린츠(Lz)는 오스트리아령, 뮌헨(M)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 하이델베르크(H)는 팔츠 선제후국의 옛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Lx)도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령으로 인정되었기에 오스트리아 본토와 색깔이 같습니다. 리에주(Li)가 보라색 땅에 위치한 이유는 리에주가 가톨릭 교회령인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주도이기 때문입니다.(이 지도에서 보라색 땅은 모두 가톨릭 교회령입니다. 이 점을 보면 18세기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독일 영방 내에서 가톨릭 교회세력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벨기에로 향하는 여행길에 들른 도시들
1) 상오스트리아(Upper Austria)의 주도 린츠(Linz)
카를 대공 가족은 제국수도 빈을 떠나 상오스트리아의 주도 린츠(Linz)에 도착했습니다. 린츠의 위치는 아래의 지도와 같이 빈(Wien)과 뮌헨(Munchen)의 거의 중간지점입니다.

린츠(Linz)의 위치를 현재 구글 맵에서 검색했습니다. M. 크리스티나 부부와 카를 대공의 여행경로인 빈→뮌헨의 중간경로에 위치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오스트리아 전체 영토로 보면 북부쪽에 있네요. 현재 오스트리아 공화국 내에서 빈, 그라츠에 이은 제 3의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카를 대공과 M. 크리스티나 부부는 말을 타고 언덕에 있는 도시 전경이 잘 보이는 전망대에 올라 다음과 같은 린츠(Linz)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게 됩니다.

현재 린츠(Linz)의 전경입니다. 카를 대공이 여행을 하고 있는 6월 초여름의 전경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네요. 18세기 말엽에도 도나우강과 뒷배경에 보이는 언덕을 끼고 형성된 시가지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현재와 어느 정도는 통하는 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상오스트리아"에 붙은 접두어 상(Upper)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린츠의 사진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카를 대공과 M. 크리스티나 부부는 이러한 린츠의 전경을 보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등장인물(?) 설명- Mimi: M. 크리스티나, Tino: 테셴 공작 알베르트, 라이바흐: 카를의 애마)
카를: 2년 전(1779년) 토스카나에서 빈으로 오는 길에 들렸을 때는 몰랐는데, 이 도시 너무 아름다워요!
Mimi: 그 때는 카를의 어린 동생 요제프(당시 3세)도 있고, 카를의 어머니(토스카나의 마리아 루이자 대공비)도 임신중이라 이 풍경을 볼 여유가 없었을 거야.
Tino: 게다가, 카를은 그 때 어리기도 했고, 말을 제대로 탈 수 없었지. 지금은 우리 3명이 모두 말을 무난하게 탈 수 있으니 이 언덕에 올라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
카를: (옆에 있는 자기 애마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라이바흐! 고마워.
라이바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카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귀를 카를 쪽으로 향합니다.)
Tino: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린츠(Linz)는 카를도 알고 있겠지만 상오스트리아(Upper Austria)의 주도야. 그럼, 카를, 하나 물어볼게. 상오스트리아에 붙은 접두어 상(Upper)의 의미를 알고 있니?
카를: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상(Upper)이 접두어로 들어간 다른 지역명은 알고 있어요. 바로 상헝가리(Upper Hungary)지요. 우리가 5월말까지 머물렀던 브라티슬라바는 엄밀히 말하면 상헝가리(현 슬로바키아)의 수도였지요.
Mimi: 그러면 카를, 너는 상(Upper)의 개념을 쉽게 알 수 있겠네. 뭔가를 잘 모르겠을 때는 반의어를 찾으면 쉬운 경우가 많아. 그럼 하(Lower)가 들어간 다른 지역명, 생각나는 것 없어?
카를: 생각났어요! 하오스트리아(Lower Austria). 그리고 하오스트리아의 주도는 바로 제국수도 빈이지요!
Mimi: 맞아, 그럼 린츠(Linz)와 빈(Wien)은 모두 오스트리아 지역 중심지인데 딱 상(Upper)과 하(Lower)의 차이가 있을 뿐이잖아. 무엇을 기준으로 상(Upper)과 하(Lower)로 구분했을까? 힌트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이야!
카를: 풍경이라면, 도나우강과 언덕 뿐인데, 언덕은 빈까지 이어져 있을리 없으니 뺄게요. 그럼 남는 건 도나우강인데 도나우강은 서→동으로 흐르지요! 아, 그럼 알겠어요! Mimi 고모. 서쪽의 린츠(Linz)가 도나우강 상류니까 상오스트리아(Upper Austria), 동쪽의 빈(Wien)이 상대적으로 도나우강 하류니까 하오스트리아(Lower Austria)군요.

카를 어린이가 린츠(Linz)가 도나우강 상류, 빈(Vienna)이 도나우강 하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위의 지도를 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도나우강을 크루즈선으로 여행하는 어떤 여행사 광고에 쓰인 지도입니다. 이 크루즈 여행의 시작점은 독일의 뉘른부르크이고 종착점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이군요. 린츠와 빈은 중간 경로에 있습니다.
Mimi: 빙고! 접두어 상(Upper)과 하(Lower)가 지명에 쓰일 때는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게 기본이야.
Tino: 강이 좀 길다 싶으면 상(Upper)과 하(Lower)가 쓰이는 지역이 꽤 많지. 독일 영방을 흐르는 대표적인 강인 라인강유역도 남쪽의 상라인 지역[Upper Rhine: 주요도시는 프랑스령인 스트라스부르와 독일령인 만하임(Mannheim), 마인츠(Mainz) 등]과 북쪽의 하라인 지역[Lower Rhine: 주요도시는 쾰른, 뒤셀도르프 등]으로 구분되는 지역이 있어. 카를, 라인강이 흐르는 방향은 어떻게 되지?
카를: 제 기억으로 라인 강의 시작점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있고, 하구는 네덜란드에 있어요. 스위스→네덜란드 방향이면, 라인강은 남→북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군요. 그래서 Tino 고모부 말씀대로 남쪽에 상라인 지역(Upper Rhine)이, 북쪽에 하라인 지역(Lower Rhine)이 위치하는 것이군요!
Mimi: 카를! 라인 강의 시작점, 하구 모두 정확히 맞췄어. 카를의 가정교사인 클라이스트 남작부인이 카를에게 지리학 확실히 가르쳤나 보구나!
카를: 네, 클라이스트 부인은 저의 관심사와 수준을 정확히 보고, '어린이 맞춤형'의 지리학을 알려주었어요. 그 덕분에 제가 지도 보는 재미가 있어서 자주 지도를 보다 보니, 마치 '반사 신경' 처럼 지명이 떠오르곤 해요.
Tino: Mimi 여대공의 사람 보는 안목과 특유의 직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소. 자녀도 없는데 진작 영입해놓은 가정교사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Mimi: 그냥, 저는 클라이스트 남작부인이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홀어머니로서 자녀들 부양하려고, 귀족 신분인데도 일감 열심히 찾아서 일하는 게 짠해 보여서 영입한 거에요.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여성이라 가정교사가 아니라도 필요할 일이 많았고요.
Tino: 하기야, 1777년 이후 클라이스트 남작부인과 과학에 대해 상담한 일도 꽤 있었지요. 덕분에 우리들의 과학 이해도도 높아졌고, 과학에 관심이 많은 헝가리인들에게 할 말도 많아졌었고 말이오.
Mimi: 이제 점심 먹으러 가야 할 것 같네요. 어느새 오전 11시가 넘었어요. 레스토랑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까 지금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슈바르첸베르크의 부연설명>
▪ 카를 대공이 1795년 라인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직책은 "하라인(Lower Rhine) 방면 사령관" 이었습니다.
▪ 독일어로 '상(上)'에 해당하는 접두어는 "Ober-"인데요. 이 Ober는 지명에 쓰였을 때는 위의 대화 내용대로 대부분 '강의 상류 지역' 을 일컫는 용도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 독일어로 '하(下)'에 해당하는 접두어는 (1)"Unter-", (2)"Nieder-"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1)의 "Unter-"는 영어의 Under와 비슷한 어원이라 지명에 쓰이면 그냥 "강의 하류쪽"으로 의미가 깔끔합니다. 그런데, 독일어 지명에서는 (1)의 "Unter-"보다 (2)의 "Nieder-"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ex) 하오스트리아: 독일어로는 'Niederösterreich'로 적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2)의 'Nieder-'는 지역명에 쓰였을 때 기본 의미가 두 가지입니다.
①'해발고도가 낮은 땅'이라는 의미: 예) Niederlande: 낮은 땅(저지대, 곧 네덜란드를 의미합니다.)
②강의 하류 지역이라는 의미: 예) 하오스트리아: Niederösterreich, 니더작센(NiederSachsen)
※니더작센 주와 작센 주가 강으로 연결 안 되어 있는줄 알았더니, 찾아보니까 "엘베 강"이 딱 연결되어 있더군요. 엘베 강 상류 쪽에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 엘베강 하류쪽에 니더작센 주의 대도시 함부르크로 설명이 깔끔합니다. 아소카님과 댓글로 대화 나눌 때 아소카님이 언급하신 "2차대전 이후 독일 경제 발전의 중심은 루르와 니더작센이었다."는 대목에서 니더작센이 어떻게 형성된 네이밍인지 생각해보다가, 엘베 강의 흐름을 발견하고 의문 풀었습니다.

작센의 주도 드레스덴(보라색 밑줄)과 니더작센 주의 대도시 함부르크(오렌지색 으로 표기)가 엘베강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지도입니다. 상(독일어:Ober)과 하(독일어:Nieder)는 상오스트리아/하오스트리아의 경우처럼 양쪽에 모두 접두어를 붙이기도 하지만, 위 지도에서 보는 작센/니더작센처럼 한 쪽에만 접두어를 붙여서 구분하기도 합니다.
※카를 대공 가족은 린츠에서 1박 2일을 보낸 후 다시 여행길에 나섭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 국경 너머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국경지대에 이르렀습니다. 국경지대를 경비하던 바이에른 수비병들은 합스부르크의 노란 바탕 쌍두 독수리 깃발을 보고 M. 크리스티나 부부 일행에게 경의를 보인 뒤,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카를 대공은 "신롬 황제의 프리패스는 파워풀(powerful)하다!"라고 세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에른 국경을 넘어 카를 대공 가족은 1781년 6월 15일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에 도착합니다.
2) 바이에른 선제후국(Electorate of Bavaria)의 수도 뮌헨(Munchen)
◎단어 설명
①Electorate: 신롬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유권자라는 의미의 Elector에 국가를 뜻하는 접미사 -ate가 합쳐서 만들어진 '선제후국'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②Bavaria의 영어 발음: '버베어리아'[bəˈvɛəriə]에 가깝습니다.
③Bayern의 독일어 발음: '바이안[ˈbaɪɐn]'에 가깝습니다. (바이에른은 사실 한글 명칭이 약간은 에러입니다.)
◎뮌헨(Munchen)의 실제 발음
i) 독일어(북부 표준어, 바이에른 주를 제외한 독일 대부분 지역) 발음: 뮌힌, 뮌흔, 뮌셴
ii) 실제 뮌헨 시민의 발음: 밍아(Minga)
iii) 바이에른 주+오스트리아인의 발음: 밍아(Minga)
iv) 영어식 표기 및 발음: Munich(뮤니크)
→실제 독일에서 '뮌헨'이라는 발음은 안 통하고요. 위에서 말한 바이에른 주 외의 영역에서는 '뮌힌, 뮌흔, 뮌셴'으로 발음해야 알아듣고, 뮌헨 시나 그 주변 바이에른 주에서는 "밍아(Minga)" 발음을 해 주면 반응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뮌헨이라고 말할 바에야 차라리 영어 '뮤니크'로 말해야 독일인들은 어딘지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뮌헨에 도착한 카를 대공과 M. 크리스티나 부부는 먼저 시내 중심가를 둘러보았습니다.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당시 뮌헨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가톨릭 대성당(Cathedral)인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였습니다. 10세의 카를 어린이는 대성당의 100m나 되는 높이를 직접 보고 놀라움과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이 약 300년 전(이 이야기의 시점은 1781년입니다.)인 1488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M. 크리스티나에게 전해듣고 중세 유럽의 건축기술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뮌헨 중앙광장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의 큰 건물은 뮌헨 신 시청사로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지어졌습니다. 왼쪽의 쌍둥이 탑이 있는 건물은 프라우헨 교회(Frauenkirche, 가톨릭 대성당인 Cathedral에 해당합니다.)입니다. 이 교회는 1488년에 완공된 건물로써 쌍둥이 탑의 최고높이가 100m나 됩니다. 따라서, 1781년 뮌헨을 방문한 카를 대공 가족에게 오른쪽의 뮌헨 신 시청사는 볼 수 없는 반면, 왼쪽의 크고 높은 프라우헨 교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 같습니다.
카를: 이 엄청 높고 튼튼한 건물을 300년 전에 완성시켰다고요! 요즘(18세기 후반) 암흑 시대라고 일컫는 중세 시대에도 엄청난 건축기술이 있었던 것이군요!
Mimi: 그럼, 사실 유럽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오스트리아 건축 기술의 모태도 이러한 교회/성당 건축이야. 이 100m 높이의 성당도 약 20년(1468~1488) 만에 완성시킨 것이고.
Tino: 건축의 기초는 석재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지. 중세시대에 다져진 '석재 만들기', '쓰러지지 않게 높은 건물 만들기' 같은 기초 기술들이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기에 우리가 와 있는 밍아(Minga: 바이에른-오스트리아 계열의 남독일계 표준어(=바이에른어)에서는 뮌헨을 이렇게 부릅니다.), 빈(Wien), 브라티슬라바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찬 도시들이 지금 있을 수 있는 것이야.
카를: 확실히 기술에 있어서도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기술'이 매우 중요하군요. 그리고 우리는 오랜 전통에서 정통성을 얻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소속이고요.
Mimi: 그래서 나와 Tino 공작은 황제폐하(요제프 2세)께서 갖고 계신 생각이 걱정인거야. 황제폐하께서 지적으로 탁월하신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이렇게 경시하시는 건 그 분의 정통성과 권위를 스스로 해치는 '자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시는지, 답답하다고.
Tino: Mimi 여대공이 이렇게 속내 털어놓고, 감정 드러내는 것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소.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라 약간 놀라기도 했고, 귀엽기도 하오. 하지만 10살 어린이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황제를 비난해도 되는 것이오?
Mimi: Tino 공작, 어차피 벨기에에 도착하면 카를이 뭔가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어요. 황제폐하께서 이미 벨기에에 방문하셨다는 건 벨기에의 통치 방식을 이전의 자치권을 많이 부여한 간접 통치에서, 황제의 직접 통치로 바꾸겠다는 의도로 보여요. 이럼 자치권을 빼앗긴 벨기에인들이 많이 기분나쁠 거에요. 그럼 벨기에 시민들이 '평화 시위'를 하 든 '무기를 든 폭력 투쟁'을 하든 가만 있지는 않을 것 같네요.
Tino: Mimi 여대공의 말, 들어보니 상당히 타당성이 있소. 나도 사실 앞으로 벨기에에서 전개될 일에 대해서는 그대와 비슷하게 예상했소. 그러니 아무 말 안 하다가 카를이 갑자기 충격받는 것 보다는 이렇게 간간이 우리가 예고를 해 줌으로써, 카를이 벨기에에 가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군요, Mimi 여대공은.
Mimi: 네, 맞아요. (카를에게 시선을 돌리며) 카를, 벨기에 근처부터는 진짜 긴장해야 될거야. 하지만, 벨기에 적응 준비는 하이델베르크를 떠나면서부터 할 거니까, 그 전까지는 여행을 즐겨.
카를: 고모, 고모부! 저 배고파요. 일단 레스토랑으로 가는 게 어때요?
Mimi & Tino: 그래. 시간도 거의 낮 12시 다 되었네. 그럼 식사하러 Let's Go!
※이렇게 해서 Mimi-Tino 부부와 카를은 뮌헨 번화가의 한 레스토랑에 방문해서 슈니첼을 메인 요리, side dish로는 독일식 감자 샐러드로 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왼쪽이 독일에 살고 계신 어떤 연구원분이 뮌헨에서 최근에 드신 슈니첼입니다.(출처:[뮌헨 맛집] 독일음식추천_제어부스 하이디 S..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오른쪽은 독일식 감자 샐러드인데요. 레시피를 보니 재료가 단단한 점질감자(waxy potato), 잘게 다진 베이컨과 양파, 서양식 쇠고기 육수(beef stock) 그리고 백색 식초(white vinegar)라네요.
카를: 오랜만에 먹는 돼지고기 슈니첼!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말랑해서 너무 좋아요. 느끼하지 않게 크랜베리 소스도 있어서 정말 맛있구요.
Mimi: 호호! 카를이 나이(10세)에 비해 많이 성숙한 건 맞지만, 아직 어린이인건 맞네. 잘 먹고 커야 할 성장기니까 천천히만 먹으면 돼.
Tino: 흠, 슈니첼도 맛이 좋지만, 나는 베이컨과 양파가 섞인 감자 샐러드 쪽도 참 맛깔나서 좋군요. 카를, 너무 슈니첼만 먹지 말고, 감자 샐러드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좀 가져가서 맛을 보는게 어때?
카를: 네, 고모부. (일단 감자 샐러드를 카를의 접시에 조금 가져갑니다. 그리고 감자 샐러드를 먹어봅니다.) 어? 이 감자라는 음식, 생각보다 꽤나 맛있네요. 전 그냥 생활수준이 어려운 서민의 음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Tino: '감자는 서민의 음식이니까 맛이 있을 리가 없다.' 라는 것은 고정관념에 불과해. 감자도 엄연히 어떤 지역에서는 자주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고, 이 레스토랑의 셰프처럼 훌륭한 조리사의 손길을 거치면 이렇게 맛좋은 음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란다.
Mimi: 카를, Tino 공작이 언급하신 '감자가 자주 식탁에 오르는 어떤 지역'이 바로 벨기에란다. 전임 총독이셨던 작은삼촌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Mimi의 친아버지 프란츠 1세의 친동생이므로 Mimi에게는 작은삼촌(숙부)입니다.]께서 벨기에에 감자를 힘써 보급하신 결과 벨기에의 농업생산량이 상당히 높아졌고, 굶주리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었어.
카를: 전임 총독이신 작은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굉장하신 분이셨군요. 그런데, 밀이 아닌 감자를 심으니까 식량이 늘어나서 굶어죽는 사람이 줄었다니, 감자가 그렇게 좋은 작물인가요?
Tino: 카를이 8살까지 살았던 피렌체(북위 43.8도)나 우리와 함께했던 빈, 브라티슬라바(북위 48도)는 맑은 날이 많은데다 일조량이 많고 따스해서 주변이 밀농사에 적합해. 하지만, 벨기에는 이런 지역보다 더 북쪽(브뤼셀: 북위 51도)인데다가 흐린 날이 많아 일조량이 부족하지. 게다가 기온도 낮고.
그래서 벨기에 지역은 밀농사가 별로야. 대신, 이렇게 기온이 낮고 일조량 적은 곳에서 오히려 잘 자라는 게 감자니까 밀 대신 감자를 심으면 생산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거야.
Mimi: 그래서 벨기에인들은 감자를 많이 먹게 되었어. 우리 부부가 벨기에 총독으로서 일을 하려면, 벨기에인에 대해서 알고 이해해야 하니, 벨기에인의 음식문화 중 하나인 '감자 요리'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더 먹어보는 게 좋겠지.
카를: 그리고 저도 벨기에에서 생활을 해야 하니 고모와 고모부께서 감자 요리를 저에게 맛보게 하신 것이군요! 벨기에 현지 사정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된 것 같아요.
Mimi: 그래, 맞아. 우리는 전임 총독인 샤를 알렉상드르 공처럼 벨기에인을 알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해. 우리는 신분이 높다고 해서, 벨기에인을 압제해서는 안돼. 그건 앞으로 130년 뒤 한국을 압제하는 Japan(독일어: 자아판) 총독부나 하는 짓이라고!
Tino: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음식을 다 먹었군요. 그럼 오후 관광코스로 이동하도록 하지요. 오후 관광코스는 밍아(Minga:뮌헨)를 대표하는 두 궁전이오.
※그래서 카를과 Mimi-Tino 부부는 레스토랑을 나와 뮌헨의 두 궁전 중 하나인 슐라이스하임 궁전(Schleissheim Palace)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침 초여름 6월이라 꽃도 많이 피어 있어 궁전은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뮌헨의 슐라이스하임 궁전입니다. ㅁ자형의 옛 궁전을 뒤로 하고 지은 새 궁전의 모습입니다. 정원과 분수는 바로크식이라고 하네요. 슐라이스하임 궁전 건물의 모양은 왠지 1782-1784년 마리아 크리스티나 주도로 지어진 라컨 궁전(Laekan palace)과 비슷해 보입니다. 왠지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이 슐라이스하임 궁전에서 자신과 남편, 카를이 거주하게 될 라컨 궁전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카를: 우리 제국수도 빈의 궁전보다는 아담하지만, 깔끔한 궁전 같아요.
Mimi: 맞아, 전통적으로 바이에른 선제후들이 궁전 건축을 좋아해서 이쪽도 궁전 및 건축에 조예가 깊어. 중세시대에는 오전에 봤던 높이 100m의 프라우헨 교회처럼 오히려 우리 오스트리아보다 기술이 앞서가기도 했어.
Tino: 진짜는 두 번째 궁전이오. 따라오시겠소?
※그래서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은 슐라이스하임 궁전을 떠나 님펜부르크 궁전(Nymphenburg Palace)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래 풍경화와 같은 님펜부르크 궁전을 보고 카를 어린이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싶다고 고모와 고모부에게 부탁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풍경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가 그린 1760년의 님펜부르크 궁전(Nymphenburg Palace)의 모습입니다.카를 대공 가족이 1781년 구경한 님펜부르크 궁전의 모습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궁전의 양 옆으로 위풍당당하게 가지런히 심은 조경수들도 멋지고, 궁전 앞 분수광장도 멋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궁전의 앞에 조성된 큰 연못입니다! 분수가 솟아오르고, 작은 배를 타고 뱃놀이할 수 있는 연못은 저는 이 궁전에서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카를: 굉장하군요! 피렌체에서도, 빈에서도, 브라티슬라바에서도 전혀 본 적 없는 "천국에 궁전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다." 싶은 궁전이네요!
Mimi: 카를과 함께 뮌헨에서 1박 2일을 계획한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 님펜부르크 궁전 보여주려고 한거야!
Tino: 내가 봐도 놀랍소. 건축만 해도 엄청난 수준인데, 여러 대의 분수, 수많은 조경수(궁전 양 옆에 쭉 심은 나무), 그리고 궁전 앞 연못의 수질관리까지 거의 완벽하게 해 내는 게 더 놀랍군요.
카를: 아니, 무슨 여기가 책에서 본 베네치아도 아니고, 노젓는 배로 뱃놀이를 하는게 정말 꿈만 같아요! 우리 같이 저 연못에서 뱃놀이하는 건 안될까요?
Mimi: 나도 정말 뱃놀이하고 싶어. 하지만 안돼! 첫째 이유는 카를이야. 넌 아침부터 뮌헨 시내 구경하느라 꽤나 지친 것 같거든. 이렇게 카를이 지쳤을 때 흔들림 많은 배에 너를 태우는 건 너의 양육자로서 난 용납할 수 없어!
카를: 저, 아직 쌩쌩해요. 아직 충분히 놀 수 있어요. 말도 이제 어렵지 않게 오래 탈 수 있는 거 잘 아시잖아요? 조금만 타 보면 안될까요?
Mimi: 내가 수행원들에게 각별히 부탁해서 승마 교육부터 시킨 중요한 이유 한 가지 더 공개할게. 그건, 카를의 병약한 체질을 근본적으로 고칠 방법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야. 승마는 교육 과정에서 힘이 많이 들지, 한번 승마에 숙달되면 걷는 것보다 체력이 꽤 절약되거든.
Tino: 대체 Mimi 여대공은 큰그림을 어디까지 그리는 것이오? (카를에게) Mimi 고모 말이 맞아. 카를이 행동 반경이 넓어진 것은 지금 옆에 있는 너의 친구 '라이바흐' 덕이 크지. 카를이 라이바흐에 타고 있는 동안은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으니까, 그 절약된 체력만큼 뛰어놀고, 공부도 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오늘은 시내 관광이다보니 말에서 탔다 내렸다도 많이 하고, 걸어서 라이바흐를 옆에서 끌고 가는 때가 많다 보니 체력 소모가 심했어. 내가 봐도, 고모가 권고한대로 뱃놀이는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카를: (옆에 있는 라이바흐의 목덜미부터 등을 따라 엉덩이까지 쓰다듬으며) 라이바흐! 항상 내 뜻대로 움직여줘서 고마워. 난 언제나 널 믿고 있어
라이바흐: (카를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고, 귀를 카를 쪽으로 향하며 가볍게 소리냅니다.) 히이잉~
Mimi: 이 풍경 너무 아름답잖아. 그냥 우리 세 사람 이대로 님펜부르크 궁전 지켜보면서 쉬었다가 오후 5시쯤 돌아가자.
※이렇게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은 1781년 6월 15일 밤을 뮌헨에서 보내고 6월 16일 뮌헨을 떠나 하이델베르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뮌헨-하이델베르크 사이 거리는 약 340km로, 43km/일의 속도로 이동하니 뮌헨을 떠난지 8일만인 1781년 6월 24일,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습니다.
3) 팔츠 선제후국의 옛 수도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는 원래 팔츠 선제후국의 옛 수도로 번영했으나, 17세기 말 루이 14세의 침공 등 여러 전란으로 많이 파괴되어서 옛 영광은 다소 퇴색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유럽 및 독일 영방의 학술 중심지 중 하나였기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이 도시는 명맥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Mimi-Tino 부부와 카를 대공이 하이델베르크를 도착했을 때는 도시 인구는 약 1만명, 18세기 후반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대학생들은 당시 300~400명 정도 숫자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도서관의 사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86년에 설치된 독일영방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입니다. 하이델베르크가 프랑스-독일 접경지대라서 여러 번 전란을 당해도 도시가 계속 재건되었던 것은 유럽에서 손 꼽던 학술 중심지였던 이 대학의 존재가 매우 컸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Mimi-Tino 부부와 카를은 당시 기준으로 400년이나 된 대학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카를: 400년이나 된 대학이라니 굉장해요! 이 도서관 안에 어떤 책이 있을지 무척 궁금하고요.
Mimi: 우리 합스부르크 가문이 설립한 빈 대학(1365년 설립) 보다는 약간 늦지만 여기도 굉장한 곳이야. 이 대학은 서부 독일 지역의 학술 중심지 역할을 해 왔어.
Tino: 내 고향(Tino, 즉 알베르트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아들입니다.)인 폴란드에 있는 크라쿠프 자유시의 야기엘론스키 대학도 비슷한 시기(1364년)에 세워졌지요.
카를: 그럼! 폴란드도 14세기에 굉장했었네요. 오히려 우리 오스트리아보다 대학이 더 빨리 세워질 정도로 말예요.
Tino: 그 때 폴란드 국왕 되시는 분이 카지미에시 대왕(카지미에시 3세)이라는 성군이셨어. 외우내환으로 난리가 난 폴란드의 왕위를 이어받으셔서, 내부 기강을 바로잡고, 헝가리와의 동맹으로 외적들을 물리치셨지.
Mimi: 얼마 전 작고하신 어마마마(마리아 테레지아)와 공통점이 있네요. 헝가리와의 동맹으로 외적을 격퇴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제가 봐도 어마마마의 상황보다 카지미에시 대왕의 상황이 더 안 좋았고, 전반적인 능력도 카지미에시 대왕께서 어마마마보다 조금은 위라고 인정해요.
Tino: 폴란드에서는 카지미에시 대왕의 업적을 이렇게 칭송한다오. "목조 폴란드를 물려받아 석조 폴란드를 남겼다."


왼쪽은 폴란드의 성군 카지미에시 3세(재위 1333~1370)의 초상입니다. 카지미에시 대왕께서 오른손에 들고 있는 판 같은 곳에는 분명히 "ACADEMIA(대학)"이 새겨져 있습니다. 즉, 초상화의 오른손의 판은 바로 그가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 설립한 야기엘론스키 대학 설립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야기엘론스키 대학 건물 중 14세기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건물 Collegium Maius의 메인 홀입니다.
카를: 지금 폴란드가 너무 약해진 것이 너무 안타깝네요. 분명히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라는 유럽의 거대국가였고 1683년에는 위기에 처한 우리의 수도 빈을 구출해준 국가였는데요.
Tino: 나는 폴란드가 약해진 것이 다른 나라 탓이라고 보지 않아. 가장 큰 이유는 국왕이 선출제이고 폴란드 의회(세임)이 무제한 거부권(리베룸 베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Mimi: 카를, 내가 Tino 공작에게 들은 것으로는 국왕이 개혁정책을 펴려고 해도, 주로 지주귀족으로 구성된 폴란드 의회가 계속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고 거부권을 행사해서, 계속 후진적인 체제가 유지되었다는 거야.
Tino: 내 아버님 되시는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께서도 전쟁까지 해가면서 폴란드 왕위를 얻어냈지만,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세임(폴란드 의회)의 반대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
카를: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져 가니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건 어떨까요? Mimi 고모
Mimi: 준비된 곳이 있어. 가보자!
※그래서 카를과 Mimi-Tino 커플은 Mimi가 준비한 하이델베르크의 명소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개신교회인 하이델베르크의 성령 교회(Church of Holy Spirit)을 방문한 뒤, 가톨릭 성당인 예수회 성당(Jesuit Church)를 방문했습니다.
<개신교의 성령 교회 VS 가톨릭의 예수회 성당 외부 사진>


왼쪽은 하이델베르크의 대표적인 개신교의 대형 건축물인 '성령 교회(Church of Holy Spirit)'이고 오른쪽은 하이델베르크의 대표적인 가톨릭 성당인 '예수회 성당(Jesuit Church)입니다. 겉에서 언뜻 보기에는 개신교회 쪽이 창문이 엄청 크고, 가톨릭 성당 쪽은 창문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차이 정도 말고는 구조가 비슷해 보입니다.
<개신교의 성령 교회 VS 가톨릭의 예수회 성당 내부 사진>


이 두 사진은 확실히 왼쪽이 개신교 분위기고, 오른쪽은 촛대, 정밀한 종교적 회화 등으로 보았을 때 가톨릭 분위기입니다. 당연히 왼쪽이 개신교의 성령 교회 내부 사진이고, 오른쪽이 가톨릭의 예수회 성당 맨 안쪽(가톨릭에서는 제대라고 합니다.)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두 종교 건축물을 둘러본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카를: 개신교 건축물도 꽤 멋지게 지었군요. 밖에서 보면 오히려 개신교의 '성령 교회' 쪽이 더 멋진거 같구요, 내부를 봐도 우리가 익숙한 가톨릭 성당에 비해 좀 화려한 맛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깨끗해서 괜찮아 보이네요.
Mimi: 카를, 오늘 내가 '성령 교회' 방문을 준비한 건 카를에게 '개신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야.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받아 제국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해 있지만, 제국 내에는 결코 적지않은 수의 개신교인들이 있고, 그 개신교인 중 대부분은 제국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지.
Tino: 오스트리아의 제1 파트너 헝가리 왕국만 해도 1/4은 개신교인(칼뱅파)이고, 내 영지 테셴을 비롯한 오스트리아령 실레지아도 과반수가 개신교인(루터파)이야.
Mimi: 그리고 우리 제국령은 아니지만, 제국과 절친한 Tino 공작의 출신국가 작센도 왕실은 가톨릭이지만, 작센 주민들은 90%이상이 개신교야.
카를: 즉, 우리 제국은 로마 가톨릭을 근본으로 유지하면서도 개신교인을 박해하지 않고 포용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네요.
Mimi: 카를 말이 옳아. 제국의 종교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제국의 대다수 83% 정도를 차지하는 가톨릭 쪽도, 비교적 소수인 제국 전체적으로 10~12%정도의 개신교 쪽도 모두 고려해서 균형잡힌 정책을 실시해야 돼
Tino: 우리가 부임하는 벨기에는 제국 본토보다도 더 열렬한 가톨릭 우세지역(90~94%)이야. 1773년 강력한 수도회인 예수회 세력을 약화시킨 오스트리아 본토와 달리, 벨기에는 예수회도 살아 있고, 각종 가톨릭 수도회 세력이 엄청 강한 곳이지.

우리나라 서강대학교의 '로욜라 도서관' 입니다. I. 로욜라는 예수회의 설립자입니다. 즉, 한국에서 손꼽는 명문대학 서강대는 예수회가 설립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예수회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세력이 약화된 지금도 예수회의 힘이 상당한데, 18세기 아직 "가톨릭 교회령"이 독일 영방 내에 곳곳에 있던 시절의 예수회라면 그 세력이 엄청났을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를: 예수회가 지은 성당은 다시 봐도 시각적인 효과가 매우 강렬해요. 정말 스스로가 '개신교로 갈까 가톨릭으로 갈까' 종파를 못 정하고 있을 때 예수회가 제시한 시각적인 종교회화를 보면 가톨릭으로 쏙 빨려들어갈 것 같네요.
Mimi: 카를의 말대로, 예수회가 살아 있는 벨기에는 가톨릭이 매우 강렬한 곳이야. 문제는 황제 폐하(요제프 2세)께서, "가톨릭 신학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하고 계시고 벨기에의 가톨릭 전통에 부정적이라는 점이야. 카를, 이렇게 되면 황제 폐하에 대해 벨기에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카를: 제 생각에는 벨기에인들이 '황제가 가톨릭을 싫어한다.' 라는 것만 알아도 들고 일어날 것 같은데요.
Tino: 그래, 카를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2~4월에 다녀가시면서 뭔가 현지 전통을 바꿔버릴 분위기 같은 신호는 벨기에 유력자들이 뭔가 파악했을 거야. 그 벨기에 유력자들이 황제 폐하의 정책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구나.
Mimi: 그러니 카를,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벨기에의 분위기는 많이 시끄러울 거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위험할 수도 있어. 우리 모두 언제든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카를: Mimi 고모와 Tino 고모부 덕분에 전 병약함에서 많이 벗어났고, 앞으로 군인이 되겠다는 꿈까지 가지게 되었어요. 군인은 언제든 자기 목숨을 걸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용감한 고모와, 진짜 군인 고모부를 믿고 있어요. 저도 언제나 고모, 고모부와 같이 할 겁니다!
Mimi+Tino: 우리 세 사람이 한 뜻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야. 용기를 내보자!
※그리고 카를 대공 가족은 6월 25일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오스트리아령으로 되어 있는 룩셈부르크를 향해 출발합니다. 룩셈부르크부터는 확실한 프랑스어권이기 때문에 M. 크리스티나는 가정교사 클라이스트 남작부인에게 지시를 내려, 카를의 프랑스어 교육에 좀더 중점을 두라고 했습니다.
3. 카를 어린이와 Mimi-Tino 부부, 프랑스식으로 이름을 변형하다.
카를 대공은 1777년 만 6세 때부터 프랑스어를 조금씩 배워는 왔지만, 프랑스어로 대화할 기회는 많지 않았기에 프랑스어 회화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10세 어린이인 것을 감안하면 카를의 프랑스어 어휘 및 독해 능력은 평균 이상이었지만, 카를의 천성이 원래 소심하기에 프랑스어로 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부르크를 떠난 뒤 Mimi는 미리 생각해 놨던 '프랑스어에 익숙해지기' 작전을 실행합니다. 일단 그 첫 단계는 원래 독일식인 세 사람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변형하는 것이었습니다.
(1)알베르트(Albert) → 알베르(Albert): Tino
(2)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 마리 크리스틴(Marie Christine): Mimi
(3)카를(Karl) → 샤를(Charles)
이렇게 변형된 이름을 보고, 카를(=샤를)은 뾰로통해졌습니다.
카를: 저 프랑스어 자신없는데요. 이름 스펠링도 저만 완전히 다 바뀌네요. 원래 독일식하고 너무 헷갈리겠어요.
Mimi: 샤를, 그리 생각하는 것 보다는 일단 이름이 하나 더 생긴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카를: 흠, 제 이름은 짤막하고, 쓰기도 편해서 좋기도 했지만, 사실 좀 재미 없는 면도 없지는 않았어요. 그럼 발음해 볼까요 '샤를~르'
Mimi: 잘 했어, 우리 같은 독일계가 프랑스어 할 때 가장 애 먹는 게 [ʀ] 발음기호인데, 그거 처음부터 신경쓰면 프랑스어 진짜 못해먹지.
Tino: 어학, 특히 회화는 성급하면, 진짜 되는 게 없어. 일단 편하고 재미있는 것 부터 먼저 하다가, 어려운 [ʀ] 발음기호같은 것은 많이 들어보고 '이거다' 싶을 때 그때 하는 게 더 좋아. '샤흘르', Mimi 고모의 프랑스식 이름을 불러볼래?
카를: 알베르 고모부, 알겠어요. 해볼게요. (Mimi에게) 마리 크리스틴~느 고모!
Mimi: 그래, 잘 하고 있어! 프랑스어는 그렇게 마지막 자음(마지막에 오는 [n], [l] 등)을 가지고 노는 재미로 하는 거야.
Tino: 처음에는 [ʀ]이나 [ʁ] 같은 생소한 발음기호 미세한 차이는 별로 신경쓰지 말고, 되는 대로 자신있게 해봐! 어차피 '샤흘르'는 성년이 되려면 최소 7년 있어야 하니까 서두를 것 없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걸 믿고 클라이스트 남작부인 교육방식 따라가면 돼!
카를: 저 '샤를~르'. 프랑스어 열심히 해 볼게요.
Mimi: 그리고 우리가 프랑스식으로 이름을 변형해야 하는 진짜 결정적인 이유 알려줄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얘기했지? 벨기에 분위기 험악할 거라고.
카를: 네, 기억나요. 황제 폐하(요제프 2세)의 정책을 싫어하는 벨기에인이라면, 황제 폐하께서 파견하신 총독인 고모와 고모부 역시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Tino: 그러니까, 우리가 이름이라도 벨기에 현지인이 쓰는 말인 프랑스어식으로 변형해 놓아야 그나마 벨기에인들 미움을 덜 사겠지.
카를: 알겠어요. 왜 우리가 프랑스어식 이름을 써야 하는지 확실히 이해했어요. 알베르 고모부, 마리 크리스틴~느 고모.
Mimi: 그런 자세라면, 프랑스어는 잘 하게 될거야. 프랑스어는 어차피 유럽 공용어니까 우리 합스부르크 가문은 프랑스어를 공부 안 할 수 없지. 좋게 생각해. 벨기에 와서 프랑스어 확실하게 익혀놓는게 도움 많이 될 거니까!
카를: 네, 저 샤를~르! 열심히 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