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벨기에편 1장 요약>
1781년 6월 3일 벨기에 총독으로 임명된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카를 대공은 제국수도 빈에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까지 1달이 넘는 긴 여행길에 오릅니다. 이 3인 가족은 벨기에로 가는 길에 린츠, 뮌헨, 하이델베르크에 들려서 명소 관광을 하고, 맛집에 들려서 긴 여행 길 중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만, M. 크리스티나 부부의 정치 노선이 황제 요제프 2세와 정반대이기에 앞으로 있을 심각한 갈등에 대해 걱정이라는 대화를 10세 어린이 카를 대공 앞에서도 굳이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벨기에에 도착하면 카를도 남매간 갈등으로 인해 벨기에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예방주사' 차원에서 카를이 미리 알아두는 것이 낫다는 M. 크리스티나의 판단으로, 3인 가족은 어쩌다가 "황제 뒷담화"를 한 셈이 되어버렸지요.
카를 대공과 M. 크리스티나 부부(Mimi-Tino 부부)는 하이델베르크를 지나, 프랑스어권인 룩셈부르크+벨기에 지역에 가기에 앞서서, 현지 적응 차원에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변형합니다. 그리고 카를의 프랑스어 교육을 강화합니다.(Mimi-Tino 부부는 당시 유럽 공용어였던 프랑스어에 능통하기에 카를만 프랑스어를 익히면 되는 것이었죠.)
<스토리 전개에 앞서 주요 등장인물 3인 소개>-1781년 기준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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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사실상 양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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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사실상 양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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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사실상 양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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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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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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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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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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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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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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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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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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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지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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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K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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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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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크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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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시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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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Ch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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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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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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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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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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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설명: 카를 대공의 별명, '다람쥐'는 제가 붙인 것입니다. 부흥 회원 코겐인님께서 카를 대공의 ①키가 150~160cm라는 제보 ②5피트 부근이라는 제보, 이렇게 출처가 다른 두 제보를 해 주셔서 저는 카를 대공의 신체조건을 157cm, 50kg으로 추산하였습니다. 키는 작고 말랐는데, 하체는 발달해 있는 편인, '승마 기수'로서 이상적인 체격조건을 생각해 보니까 이 정도 잡히더라고요. (코겐인님, 감사드립니다.)
'다람쥐'는 사실상의 양부모인 Mimi나 Tino가 썼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카를 대공의 초기 군생활 때 연령이 비슷한 장교들이 처음에는 카를의 조그마한 체구를 보고 그냥 '귀여운 황족' 정도로 생각했다가, 기마술에 능하고 말만 타면 엄청 빨라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면서 '조그마한 주제에 잽싸다'라는 의미에서 "다람쥐 샤를"이라는 별명으로 붙여놓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으로 붙여 본 것입니다.( 카를 대공이 군복무를 시작한 벨기에는 프랑스어권이므로 동기 장교들이 카를의 프랑스어식 이름인 '샤를'로 호칭했을 것이라 추론합니다.)
<벨기에편 2장: 벨기에에 대한 소개/ 룩셈부르크에서 까무러친 Mimi>
★벨기에 각 지역에 대한 소개
1. 중세 시절부터 매우 높았던 벨기에의 도시화율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는 카를 대공에게 아래의 도표를 보여주면서 카를 대공이 머무르던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 지역에 비해 벨기에의 도시화율이 높음을 보여줍니다. (출처: 부흥 회원 잉여군님께서 제공하신 자료)

이 자료는 잉여군님과 토론할 때, 잉여군님께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도시화율 낮은 지역임을 감안해야 해요." 라는 논지를 제시하실 때 보여주셨던 자료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신 덕분에 '벨기에' 지역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과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잉여군님께 감사드립니다.
<표>1775년 기준 각 국가의 도시화율
◇계산법 ① 1750년과 1800년의 평균값으로 계산
② 녹색으로 표기된 합스부르크 제국은 농업, 목축 비율이 매우 높은 헝가리 지역의 도시화율을 폴란드와 같은 4.5%로 보고, 인구수를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보헤미아+모라비아)=1:1:1로 보고 계산해서, 오스트리아+보헤미아+모라비아(독일권) 도시화율을 대략적으로 계산했습니다.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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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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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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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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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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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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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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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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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제국(전체: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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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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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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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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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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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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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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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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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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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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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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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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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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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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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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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3인 가족 사이에 오가게 됩니다.
카를: 벨기에는 땅도 넓지 않은데, 규모가 큰 도시가 많겠군요.
Mimi: 맞아, 수도 브뤼셀은 약 7만 규모, 안트베르펜·겐트는 약 6만 규모 등 우리가 여행길에 지나온 뮌헨(3.5만)의 두 배규모의 도시들이 바이에른보다 작은 땅에 밀집되어 있는 거야.(도시 규모는 모두 1781년 기준입니다.)
Tino: 이건 일찌감치 형성된 벨기에 도시들에서 우리가 입는 옷가지들을 짜는 '직물업'이 13세기부터 발전했고, 그로 인해 돈 많은 도시들이 일찌감치 형성되었기 때문이지.
카를: 그러고 보니 벨기에는 오히려 중세인 1400년경에 도시화율이 39%로 상상 초월로 높았네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절반 정도인 22%로 떨어진 것은 어떻게 된 것이죠?
Mimi: 15세기에 벨기에가 여러 전란에 휘말렸었어, 유명한 백년 전쟁도 문제였고, 부르고뉴가의 용담공 샤를의 침공 때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 등 도시가 계속된 타격을 입어서 도시화율이 떨어졌지. 1500년경에 28%로 떨어진 것 보이지?
카를: 네, 그런데 또 의문인게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벨기에가 오스트리아령이 된 것이 1714년인데, 우리 오스트리아의 통치기간 동안 도시화율이 1700년의 31%에서, 1750년의 22%로 떨어졌네요. 이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Tino: 내가 그림 하나 보여줄게, 벨기에의 가장 중요 도시 중 하나인 안티베르펜의 17세기 지도야. 본 느낌이 어때?

1624년 안트베르펜의 지도입니다. 17세기에도, 현재에도 벨기에 뿐 아니라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은 항구가 바닷가에 있지 않고 스헬더(Schelde)강 연안에 있습니다.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안트베르펜 도시 및 요새 주변이 전부 농경지로 가득하다는 점입니다. 제 생각에 이는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벨기에 지역이 적대국으로 둘러싸여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에(해상은 영국+네덜란드 해군에 의해 막혀있고, 북쪽은 적대국 네덜란드, 남쪽도 우호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프랑스, 동쪽은 강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식량의 대량 수송이 어렵습니다.) 벨기에의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농경지 확보에 주안점을 둔 토지개발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카를: 도시 주변은 잘 구획된 농경지네요. 여기서 생산된 식량은 일단 안트베르펜 시민들을 먹여살리는 데 쓰이겠군요.
Mimi: 샤를, 맞아. 17세기 스페인 지배 시기부터 벨기에 지역은 '식량 자급자족'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지.
Tino: 그리고 이렇게 벨기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자'는 쪽으로 노력한 점은 우리 오스트리아의 전통적인 정책인 "중농주의 정책"과도 잘 맞아떨어졌어.
카를: 그래서 벨기에는 레이스 직물, 태피스트리 직물 등 온갖 고급 산업이 번창하면서도, 식량생산도 많이 신경쓰다 보니까 도시화율이 22%로 낮아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군요.


위에서 카를이 언급한 벨기에 브뤼셀의 레이스(lace) 직물과 태피스트리 직물입니다. 왼쪽의 레이스 직물은 당시에 브뤼셀 레이스(Brussels lace)라는 최고급 명품으로 베르사유 궁정에서 유행했습니다. 오른쪽의 태피스트리 직물은 '벽걸이 융단'으로 쓰였습니다. 석조 건물이 많은 유럽은 겨울에 실내가 추웠기 때문에, 오른쪽과 같이 만든 태피스트리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냉기를 차단'하는 실용적인 효과도 있었습니다. 브뤼셀 레이스와 마찬가지로 베르사유 궁정에서 브뤼셀산 태피스트리는 사랑받았습니다.
Mimi: 전임 총독이셨던 작은 삼촌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벨기에 총독 재임 1744-1780)은 중농주의 정책을 유지하고 감자 재배를 권장해서 벨기에의 식량 생산량을 늘렸고, 이러다보니 도시 쪽에 공급되는 식량이 많아져서 자연스럽게 벨기에의 전통 산업인 고급 직물 산업이 더욱 번창하게 된 것이야.
Tino: 한 마디로 벨기에는 식량이 자급 자족되고 첨단 직물 산업 역시 발달한 유럽 제1의 꿀땅인 것이지. 벨기에 전체적으로 보자면 말야.
2. 벨기에 각 지역에 대한 소개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는 카를에게 다음의 지도와 4개의 주요 지역에 대해 정리한 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지도는 네덜란드어로 작성된 1789년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즉, 지금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지역에 대한 지도입니다. 제가 중요표시 한 곳은 닻(⚓)으로 항구 표시해 놓은 ①안트베르펜(Antwerpen), 브라반트 공국과 벨기에 전체의 수도인 ②브뤼셀(Brussel), 보라색으로 경계선을 쳐 놓고 가톨릭(☧) 표시를 해 놓은 ③ "리에주 주교제후령"입니다.
지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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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데런 백국
(Vlaand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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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반트 공국
(Brab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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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 주교제후령
(Prince-bishopric of Li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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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공국
(Luxem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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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의 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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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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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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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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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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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된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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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주황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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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노랑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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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테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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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색 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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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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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Gent)
브뤼헤(옛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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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브뤼셀(Brussel)
주요 항구:안트베르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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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Li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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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Luxem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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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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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 모직물, 리넨 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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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직물 및 사치품(가구, 레이스, 태피스트리, 모직물)
안트베르펜:다이아몬드 세공 및 설탕 정제, 각종 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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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농산품 상당수가 브라반트 등으로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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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업
광업(철광석)
농업(포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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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예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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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 제단화
(반 에이크 형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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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플라스(Grand Place)
→벨기에 중앙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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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 대주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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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요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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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Mimi-Tino 부부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카를에게 벨기에 지역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1)벨기에의 옛 중심지와 새 중심지
(1)옛 중심지: 플란데런(Vlaanderen) 백국의 주도 겐트 및 브뤼헤 항구(1510년 이전)
(2)새 중심지: 브라반트(Brabant) 공국의 수도 브뤼셀 및 안트베르펜 항구(1600년 이후)
카를: 확실히 옛 신성로마황제이셨던 카를 5세(생애:1500~1558, 황제 재위 1519~1556)께서는 겐트에서 출생하셨고, 유년기를 보내셨다는 내용을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16세기 초반까지는 겐트가 벨기에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Mimi: 맞아. 그런데, 사실 겐트의 경제적 지위는 15세기부터 애매해지고 있었어. 겐트의 주생산품인 모직물을 수출했던 브뤼헤가 항구에 진흙이 쌓여서, 브뤼헤 항의 기능이 망가지고 있었거든
Tino: 그래서, 벨기에의 No.1 항구가 원래의 브뤼헤에서 점점 북쪽의 안트베르펜으로 옮겨갔어. 게다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 때 피해를 오랬동안 너무 많이 받아서, 겐트는 많이 쇠락하게 돼.
Mimi: 그 때 저지대(네덜란드+벨기에) 전체의 중심지가 북쪽 홀란트의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했는데, 남부 벨기에 지역에서 아득바득 살아남은 도시가 바로 안트베르펜과 브뤼셀이야. 샤를, 그 두 도시가 위치한 지역이 어디이지?
카를: 어? 둘다 브라반트 공국에 있네요. 그럼 벨기에 전체의 핵심 지역은 브라반트로 볼 수 있겠네요.
Mimi: 빙고! 그래서, 우리가 주로 거주하게 될 지역도 브라반트고, 총독부 역시 브라반트의 주도 브뤼셀에 있는 것이지.
2) 벨기에의 주요 도시 및 산업에 대해서
벨기에는 중세부터 유럽의 핵심 직물(fabrics: 모직물, 리넨 직물 등) 생산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소견으로는 플란데런과 브라반트는 경제권이 약간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플란데런은 중세 때부터 "영국에서 양모를 수입해서 모직물로 가공하여 판다."는 영국 경제권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브라반트는 늦어도 17세기 후반 프랑스 베르사유 궁이 완성된 이후로는 중심지 브뤼셀에서 제조한 레이스(lace), 태피스트리(tapestry), 고급 가구 등의 사치품들을 주로 프랑스 베르사유에 거주하는 귀족층에게 판매하는 '프랑스 경제권'에 속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트베르펜의 경우에는 주로 영국 쪽으로 수출/수입하는 항구 기능도 하고, 육로 쪽인 프랑스쪽에 안트베르펜에서 가공·생산한 다이아몬드 및 고급 직물을 팔기도 하기 때문에 저로서는 약간 분류가 애매해 보입니다.
일단 아래 지도에서 스헬더(Scheldt) 강 유역과 당시 벨기에 3대 도시가 나오네요.

벨기에를 흐르는 주요 강인 스헬더(Scheldt)강과 그 지류, 그리고 스헬더강 유역을 표시한 영어 지도입니다. 벨기에 주요 도시 중 3개 도시가 딱 나와 있습니다. 수도 브뤼셀(BRUSSELS)은 스헬더 강의 지류 제느(Zenne) 강을 끼고 있고, 옛 수도 겐트(GHENT)는 스헬더강과 Leie강 합류점에,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영어로는 앤트워프(ANTWERP)]에 위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브뤼셀(브라반트)
▪ 벨기에 전체, 그리고 브라반트 공국의 수도
▪ 인구: 70,000 이상(1781년 추정치)
◎브뤼셀의 주산업
i)고급 직물: 레이스(lace), 태피스트리(Tapestry)


18세기 벨기에 브뤼셀의 주력상품 중 하나였던 고급 레이스 직물(왼쪽)과 태피스트리 직물(오른쪽)입니다. 태피스트리 직물은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색의 실을 정교하게 짜서 아름다운 모양이나 그림을 만드는 예술적인 직물입니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냉기를 차단하는 보온 효과도 높아서 베르사유 궁정귀족들에게 사랑받던 사치품 중 하나가 태피스트리 직물이었습니다.
ii)일반 직물: 면직물, 모직물
iii)고급 가구: 요즘도 벨기에식 앤틱 가구가 상당히 거래되는 것 같네요.

벨기에 앤틱 가구 사업을 1974년부터 가업으로 하고 있다는 어떤 업체에서 광고로 올린 벨기에 앤틱 가구 사진입니다. 전, 벨기에 태피스트리 전통을 가볍게 살린 고급 소파가 너무 좋아 보이네요.
☞ 브뤼셀의 주산업은 잘 따지고 보면 사치품입니다. 레이스(lace) 및 태피스트리(tapestry), 그리고 위 사진에서 보이는 정교하게 직조된 쿠션을 장착한 의자/소파 등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많이 다루고 있고요. 그렇다면, 브뤼셀 상품의 가장 큰 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대 궁정에 귀족이 가득한 "베르사유 궁정"의 왕실 및 귀족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브뤼셀은 "프랑스 경제권"에 속해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주요 건축물: 브뤼셀 중앙광장인 그랑 플라스(Grand Place)에 많이 있습니다.

브뤼셀 그랑 플라스의 2018년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그랑 플라스는 1695년 루이 14세의 "브뤼셀 포격사건"으로 심하게 파괴된 이후 약 5년에 걸쳐서 재건되어 현재 보이는 구도를 대략 형성했다고 합니다. 1700년 이후로는 보수 공사 및 재건축은 있었으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계속 살려가면서 현재까지 18세기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그랑 플라스(Grand Place)의 파괴와 재건
▪ 이곳은 1695년 루이 14세 휘하 빌레루아(Villeroy) 공작이 거느린 7만 대병력의 침공을 받고, 8월 13~14일 프랑스군의 엄청난 포격을 받고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Bombardment of Brussels)
▪ 이 그랑 플라스를 재건한 주역은 브뤼셀 시민 및 인근 벨기에 도시들로 볼 수 있고, 보조역은 당시 벨기에 총독을 맡았던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이었습니다.(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 먼저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모든 것이 파괴된 브뤼셀과 그랑 플라스에서 군대를 투입하고 민병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가격 동결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브뤼셀의 치안과 민생이 안정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 브뤼셀 주변의 도시들인 안트베르펜, 루뱅(불어:Louvain 네덜란드어:Leuven), 메헬렌(Mechelen) 등의 도시가 물자를 지원해주어 브뤼셀 시민들의 생활을 도왔습니다.
▪ 그리고 브뤼셀 시민들은 길드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약 5년만에 그랑 플라스를 "예전보다 더욱 아름답게" 재건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2) 안트베르펜(브라반트)
▪ 인구: 약 6만(1780년대 추정)
★중요도: ①벨기에 지역 최대 항구도시, ②벨기에 최대 지정학적 요충지
◎안트베르펜의 주산업
i) 각종 직물/ 섬유 산업: 실크 직물(견직물), 리넨 직물(마직물), 섬유산업 등
ii) 다이아몬드 세공업

현재도 안트베르펜은 전세계 다이아몬드 세공의 60%~80%를 담당하는 '다이아몬드의 도시' 입니다. 18세기 당시에는 경쟁도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함께 유럽의 다이아몬드 공예업을 거의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iii) 설탕 정제업: 원산지에서 만들어진 설탕을 식품 첨가에 적합하게 가공하는 설탕 정제업 역시 발달했습니다. 정제한 설탕은 영국, 프랑스 등으로 수출되는 비율이 높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트베르펜의 산업에 대한 저의 생각
▪ 원래는 모직물(영국 신사의 양복) 등 각종 직물을 주로 영국에 판매하는 '영국 경제권'으로 발달했습니다. 한편, 다이아몬드 가공업이 발달하고, 17세기 후반 베르사유 궁정이 완성되면서 다이아몬드 등의 사치품을 프랑스 쪽에 판매하게 되어 안트베르펜 경제에 프랑스의 비율도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안트베르펜은 영국 경제권+프랑스 경제권 모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 제1의 지정학적 요충지 안트베르펜
→이는 '대형 항구' 안트베르펜의 위치가 특이한 곳에 있는 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안트베르펜은 우리가 '항구' 하면 쉽게 떠오르는 해항(바닷가에 있는 항구: Sea Port)가 아니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하항(River Port)인데다가, 스헬더(Schelde)강이 곡류를 형성한 곳에 안트베르펜이 위치합니다.
다시 한 번 안트베르펜의 위치가 표기된 지도를 보시면요,

파랑색으로 박스를 쳐 놓은 곳을 들여다보시면 안트베르펜(Antwerpen)에 대해 좀더 잘 아실 수 있습니다. 안트베르펜은 강폭이 꽤 되는 스헬더 강 하류지역에 위치해 있어, 바다의 파도로 인한 파선(배가 부서짐)의 위험이 없는 곳입니다. 이는 제 생각에는 북해의 바다가 험하기 때문에 거친 바람과 파도가 잦아서 파도에 노출된 해항(Sea Port)보다는 파도에서 안전한 하항(River Port)을 더 선호하는 경향 때문에 형성된 항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비슷한 입지의 항구로는 템즈 강 하류의 런던, 엘베강 하류의 함부르크 등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여드리는 1624년 안트베르펜의 그림입니다. 도시 자체의 방어도 상당해 보이고, 도시 옆 별 모양 요새는 진짜 함락이 매우 어려워 보이네요. 거기다 남쪽 강 건너에도 요새가 2개 정도 되어 보이고요. 도시 주변 강도 이상하게 굽이치고 있어서 상륙 지점 자체가 정말 안 보입니다. 프랑스군에 의해 안트베르펜과 그 주변 요새가 점령된 상황에서 제가 영국군이라면 제 쪽이 7만 병력이고, 프랑스군이 1.5만 정도라도, 전 왠만하면 요새공략 하기 싫습니다. 함락 성공하더라도 보유 병력 절반은 날아가게 생겼으니까요.
◎안트베르펜, 왜 벨기에 제1의 요충지인가?
▪ 위에서 말씀드렸듯 안트베르펜 항구 자체가 다이아몬드 산업 등으로 경제적 가치가 엄청 큽니다.
▪ 더 중요한 이유는 위의 지도와 그림에 나오는 안트베르펜의 특이한 지형 때문입니다.
▪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트베르펜은 바다에 있는 진입 수로·스헬더강이 모두 상당히 굽이치고 있어서, 대륙의 강한 군대(예: 프랑스군)가 이 안트베르펜을 점령했을 경우 영국으로서는 상륙작전으로 탈환이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 실제 영국은 1809년 오스트리아-나폴레옹군이 싸우느라 나폴레옹군 주력이 빠져있을 때 영국군 40,000을 상륙시켜 안트베르펜 탈환을 시도했으나, 악명 높은 '저지대 모기떼'(강변이므로 여름이면 모기떼가 우글우글하겠군요.)에 의해 절반 가까운 16,000의 병력 손실을 보면서 안트베르펜 근처도 못가봤다고 합니다. (출처: 아래 링크)
▪ 위의 이유 때문에 영국 입장에서 안트베르펜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프랑스에게 내주는 일은 없어야 하는 항구" 였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위트레흐트 조약(1714년)에서 벨기에가 오스트리아 속령이 된 이유(개인적 생각)
▪ 원래 벨기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속령이었습니다.(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까지)
▪ 그런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부르봉가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에서 계승자로 내세운 카를 6세가 형 요제프 1세의 사망으로 1711년 신롬 황제가 되어 이 카를 6세가 스페인왕까지 겸했다가는 합스부르크 괴물 제국이 부활하게 되니까, 이는 영국이 막은 것입니다.)
▪ 프랑스와 스페인의 합병은 막았지만, 프랑스-스페인은 같은 부르봉가로 사실상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영국 안보상 가장 중요한 안트베르펜 항구가 포함된 벨기에가 부르봉가의 지배로 남아 있으면, 영국 입장에서는 안보면에서 굉장히 불안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 그래서 영국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쪽과도 막후 교섭을 진행해서, "스페인 왕위는 포기하시길. 단, 벨기에라는 유럽 제 1의 꿀땅은 당신꺼 해서 실속을 차리면 어떤가?" 라고 해서 벨기에가 오스트리아 속령이 된 것 같습니다.
▪ 정리하자면, 영국으로서는 프랑스/부르봉 쪽에는 절대로 줄 수 없고, 그렇다고 직접 지배도 안 되는(①벨기에 좁은 땅에 주둔 가능한 상비군은 2만 정도인데 이걸로 초강력 프랑스군을 막기는 불가능 ②벨기에 주민은 아일랜드나 폴란드에 비견할 수 있는 골수 가톨릭이라 개신교(성공회) 영국이 통치하기가 어려움) 벨기에를 '제 3의 선택'으로, 즉, 가톨릭 국가이면서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당시 영국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에 넘겨준 것입니다.
(3)겐트(플란데런)
▪ 벨기에의 옛 수도, 플란데런 백국의 주도.
▪ 인구: 약 60,000(1781년 기준)
▪ 산업: 모직물 등 직물 산업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763년 Engelbert van Siclers 작품 <De Kouter in Ghent>라는 회화의 모조품을 조카 카를에게 보여주었습니다.

1763년 Engelbert van Siclers 작품 <De Kouter in Ghent>에서 묘사된 플란데런 지역의 주도이자, 벨기에의 옛 수도였던 겐트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분명 겐트는 브뤼셀처럼 활기를 띄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쇠락한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1781년 당시 겐트의 인구는 6만 가량으로 최대 항구도시인 안티베르펜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카를: 어? 겐트 시내도 깔끔하고 활기가 살아 있네요. 중심지가 옮겨졌다고 해서 도시가 아예 쇠락한 것은 전혀 아니군요.
Mimi: 그럼, 겐트 시민들 역시 브뤼셀, 안트베르펜 시민과 마찬가지로 긍지(pride)가 매우 높은 시민들이야.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도시를 지켜내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안트베르펜과 맞먹는 6만 도시의 규모를 갖고 있는 거야.
Tino: 아무리 요즘 브뤼셀 직물이 잘 나간다지만, 겐트의 전통 직물은 워낙 역사가 깊은지라, 특히 양모를 재료로 만드는 겐트산 모직물 상품의 경쟁력은 아직 살아 있어. 겐트산 모직물은 요즘에는 수출용보다는 벨기에 지역 시민 중산층들이 입는 내수용으로 팔리고 있지.
그리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겐트의 최대 자랑안 성 바프 대성당의 제대에 있는 15세기 제작된 반 에이크(van Eyck) 형제의 걸작인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에 대해 소개해 주었습니다. 겐트 제단화는 정면은 8개의 panel로, 뒷면은 5개의 panel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면 회화 전체의 크기는 5.2×3.75m의 크기라고 합니다. 이 제단화는 1420~1432년, 무려 12년에 걸쳐 제작되었고, 형 위베르트 반 에이크는 그림이 완성되기 전인 1426년 사망하고, 남은 기간에는 동생인 얀 반 에이크 주도로 그림이 제작되었습니다.

15세기 초 반 에이크 형제가 남긴 거대 규모의 종교 회화. <겐트 제단화>의 정면입니다. 상단은 그리스도교의 신과 성모 마리아,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들, 알몸의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회화입니다. 하단은 성경 <묵시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회화입니다. 하단 중앙에는 십자가와 '어린 양' 즉, 예수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단의 오른쪽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과 사도들, 하단왼쪽은 가톨릭 질서를 수호하는 기사들에 대한 묘사로 보입니다.


이것은 겐트 제단화 뒤편의 다섯 panel에 묘사된 그림인데요. 오른쪽 여성은 '신'의 옆에 있던 여성과 얼굴이 일치하지요?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렇다면 왼쪽의 날개 달린 천사는 가브리엘 대천사입니다. 가톨릭 기준으로 3월 25일(크리스마스 9개월 전) "복되신 여인이여, 너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라고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준 '수태고지'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겐트 제단화 제작의 주역 반 에이크(van Eyck) 형제입니다. 왼쪽은 형인 휘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1426)이고요, 오른쪽은 동생인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441)입니다. 1420년 겐트 제단화 제작이 시작될때는 형제가 함께였는데, 1426년에 형 위베르트가 사망한 이후, 6년간은 동생이 형의 빈자리까지 메우며 겐트 제단화라는 대작의 완성을 주도해야 했습니다.

벨기에가 '유럽의 전쟁터' 로서 여러 차례 전쟁에 휩싸였는지라, 이 거대한 겐트 제단화도 여러 차례 약탈당하거나 훼손되는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위 사진은 2차 대전 이후 어떤 소금 광산에서 제단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장면을 후세에 남기고 있습니다.

겐트 제단화에 대한 정밀한 복원 작업은 최근에 실시되었습니다. 앞면은 2012-2016년, 뒷면은 2017-2020년에 실시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예수를 의미하는 '어린양'을 복원 작업의 Before(좌)/After(우)를 찍은 것입니다. 어린양은 제단화 정면이니까 2012~2016년 사이에 복원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규모의 제단화에 대해 듣고 카를은 크게 감탄합니다.
카를: 15세기 초반(1420~1432년)에 엄청난 규모의 그림이네요! 지금(1781년) 제작해도 그리기 힘든 회화를 어떻게 15세기에 그려낼 수 있었을까요? 반 에이크 형제도 대단하고 존경스럽지만 비용이 엄청났을 것 같은데요.
Mimi: 샤를은 역시, 뭘 말해줘도 한 단계 더 내다보는 눈이 있어. 이런 엄청난 비용이 드는 회화를 제작했다는 것은 이 벨기에 지역의 경제력이 그만큼 중세 시대부터 엄청났다는 것이야.
Tino: 그리고, 요즘 '계몽 사상' 때문에 자꾸 폄하되지만, 명백히 요즈음(18세기)의 발달한 예술을 낳은 모태도 '종교 예술'이야. 흔히 인문주의·르네상스라고들 하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의 대표작들을 가만 보면 성경 이야기가 많거든.
카를: 맞아요. 다 빈치의 유명한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전부 성경 이야기에요.
Mimi: 나도 종교 회화가 우리 유럽 예술의 뿌리임을 부인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가톨릭이 고리타분한 면이 있어서 맘에 안 드는 구석은 있지.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 가톨릭을 부정하면, 우리 유럽 예술의 뿌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건 결국 유럽 예술에 속한 내 예술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가톨릭을 송두리째 부정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계속 보여드리는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23세 때 직접 그린 <자화상>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 그림을 다시 소환한 것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매우 뛰어난 예술가였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 이렇게 하고 나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카를 대공에게 다시 지도를 보여주며, 벨기에 총독의 직접 관할 지역(플란데런+브라반트)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두 구역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3) 리에주 주교제후령과 룩셈부르크
(1)리에주 주교제후령(Prince-Bishopric of Liège)
▪ 총 인구: 약 60만 명
▪ 리에주 시의 인구: 약 6만 명(안트베르펜, 겐트와 비슷한 인구 규모)
▪ 가톨릭 교회령이라 벨기에 총독이 관여할 수 없는 지역
◎리에주 주교제후령의 주산업: 농업(농산품 상당 부분이 리에주 주교제후령 외부로 수출됨)
(2)룩셈부르크(Luxemburg)
▪ 룩셈부르크 공작: 신성로마 황제와 동일인
▪ 경제권이 '독일 영방' 쪽으로 이어져 있어 플란데런+브라반트 지역에 비해 황제에 더 충성스러운 지역
3. 룩셈부르크에서 전해들은 충격적인 소식
※위와 같이 Mimi-Tino 부부는 벨기에 지역에 대해 며칠동안 카를에게 설명을 하면서 이동하다보니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은 7월 1일 룩셈부르크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에 도착하자, 룩셈부르크 시청에서 전령이 도착하여 급보를 전했습니다.
전령: 벨기에 총독 각하! 급보입니다. 룩셈부르크의 베텔 시장이 급한 용무로 저를 총독 각하께 보냈습니다.
M. 크리스티나: (마차에서 내리며) 무슨 일인데,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오? 용무를 말해줄 수 있소?
전령: 송구하오나, 보안상의 문제로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베텔 시장은 여대공 전하와 테셴 공작 각하께서 직접 시청으로 와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습니다.
M. 크리스티나: 흠, 베텔 시장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꽤 중요하고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겠군요. 알겠소. 아마 내일쯤 시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베텔 시장에게 내일 시청에 방문하겠다고 전해주시오.
전령: 알겠습니다! (말머리를 돌려 룩셈부르크 시로 향한다.)
※7월 2일 룩셈부르크 시청에 도착한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카를 대공은 약속 장소인 시청 내부의 홀(hall)에서 룩셈부르크 시장, 베텔과 만났습니다. 베텔 시장은 다음과 같이,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베텔 시장: 지난 봄에 황제 폐하(요제프 2세)께서 벨기에 전 지역을 시찰하신 것은 아시지요?
M. 크리스티나: 물론이오. 황제폐하 성격상 구석구석 다 둘러보았겠지요.
베텔 시장: 플란데런의 주도 겐트에서 큰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M. 크리스티나: 겐트 말이요? 어째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요.
베텔 시장: 바로 겐트 제단화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그림에 대한 소식입니다.
M. 크리스티나: 아무리 황제폐하라도. 설마, 그 350년 전통의 성스러운 예술작품에.....
베텔 시장: 안타깝지만, 바로 그 설마입니다. 황제폐하께서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외설스럽다고, 아담과 이브의 벌거벗은 부분을 가죽으로 가려놓는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M. 크리스티나: (안색이 바뀌면서) 뭐요? 어처구니 없.... (말을 잇지 못하고 정신을 잃습니다.)
알베르트: (아내를 부축하며) 여대공, 괜찮으시오?
카를: 마리 크리스틴 여대공 고모, 괜찮으신가요?
베텔 시장: (알베르트에게) 일단 응급처치용 브랜디를 드리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시청 직원들에게) 여대공 전하를 시청 내 쾌적한 휴식공간으로 모실 준비를 하라!


왼쪽이 겐트 제단화에서 반 에이크 형제가 그린 아담과 이브의 그림 원형입니다. 요제프 2세는 왼쪽의 그림이 외설스럽다고, 오른쪽같이 중요부위를 덮어버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까무러친 1차적인 이유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대선배라고 존경하던 반 에이크 화백의 그림을 황제인 오빠 요제프 2세가 오른쪽 그림처럼 훼손해버렸다고 머리속으로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청 내 조용한 공간으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후송되어 휴식을 취했고,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안정을 취하는 동안 알베르트 공작과 베텔 시장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알베르트: 베텔 시장, 고맙소. 뤽상부르(룩셈부르크의 프랑스어 발음) 시장은 내 배우자인 여대공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까지 고려해서, 이곳에서 소식을 듣게 한 것이군요.
베텔 시장: 네,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차피 겐트 제단화에 대한 소식은 언젠가 여대공 전하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대공께서 그 소식을 듣게 되시면 충격을 엄청 받으실 텐데, 그나마 그 충격을 수습하기 쉬운 공간에서 소식을 들으시는 쪽이 저는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청 내부에서 소식을 전해드린 것입니다.
알베르트: 정확한 판단이오. 그리고 베텔 시장 덕분에 그 소식을 빨리 파악하게 된 것도 다행이오. 이렇게 빨리 파악해야 우리 부부도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더 쉬워지지요.
베텔 시장: 벨기에 총독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다행입니다. 총독 각하의 말씀에서 여대공께서 충분히 충격을 이겨내실 수 있다는 암시가 느껴집니다.
알베르트: 어차피 우리 부부는 벨기에 총독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다 각오 하고 있었소. 사실 황제폐하(요제프 2세)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인한 현지인 반발 쪽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예상못한 예술품 검열(?)이 나와버리니,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는 쪽을 얻어맞아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오. 좀 있으면 괜찮아 질 것이오.
(알베르트의 속마음): 마누라가 깨어날 때가 좀 무섭겠군. 눈 뜨자마자 난리를 피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나마 여긴 시청 내부의 조용한 공간이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네.
※ 카를은 정신을 잃은 후 안정을 취하고 있던 고모 M. 크리스티나 옆에서 고모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랬던 카를에게 알베르트 공작은 'Mimi 고모는 괜찮아. 머지 않아 눈을 뜰거야.' 라고 안심시켰고, 약 2시간 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눈을 떴습니다. 깨어난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눈에는 맨 먼저 남편 알베르트 공작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M. 크리스티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오빠 조제프(Joseph)는 문화·예술을 훼손하는 탈레반이에요! 그리고 이건 나에 대한 선전 포고구요!"
※보충 설명: 조제프(Joseph)는 요제프(Joseph)의 프랑스식 발음입니다. 그러므로 Mimi가 언급한 '내 오빠 조제프'는 M. 크리스티나의 1살 위 오빠이자 제국 황제인 요제프 2세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