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대공-유년기편 요약>
(유년기-4편 참고)
카를 대공은 1771년 9월 5일 당시 토스카나 대공이었던 레오폴트 2세의 12남 4녀 중 3남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에서 태어납니다. 토스카나에서 신체적으로 병약하고, 정신적으로 소외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카를은 1779년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뵈러, 오스트리아 빈에 방문했을 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바로 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알베르트 공작 부부는 사유재산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상속자가 없는 데다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어 상속자를 들여야 했는데, 카를이 그 예비 상속자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아직 정식 입양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M. 크리스티나가 카를의 양육을 맡게 된 것이지요.)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상속자가 될 카를을 위해 애정을 쏟아붓고, 자신의 커다란 거처 '락센부르크 대저택'의 유능한 고용인들을 적극 활용해서 불과 1년 만에 카를을 이전의 병약한 모습이 아닌, '군인이 되기를 꿈꾸는 어린이'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합니다. 특히, 유능한 승마 조교 라이너에게 카를의 승마 교육을 맡겨서, 카를이 기초 승마술을 터득하여, 9세의 카를 어린이가 말을 타고 꽤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기본기를 만든 것이 큰 성과였습니다.
한편, 카를 대공의 할머니이자 위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러 이유로 1780년 11월 29일, 자기 임무를 다하고 서거합니다. 그 이후 황제 요제프 2세의 첫 아내이자 사망 당시 황태자비였던 "파르마의 이사벨라"때문에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남매(유년기-6편 참고), 요제프 2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갈등으로 인한 문제가 이제 본격화됩니다.
(앞의 내용 더 자세히 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 보셔도 됩니다. 그냥 스킵하셔도 되고요.)
<유년기-4편> 건강해진 카를 대공의 모습, 마리아 테레지아의 재위 후반(1765~1780) 근심거리
<서장: 상헝가리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돈독해진 가족관계>
1. 카를의 3인 가족, 브라티슬라바로 이주하다(1781년 1월 초~1781년 5월 말)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을 마친 카를 대공은 고모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함께 제국수도 빈의 락센부르크 저택을 떠나 헝가리 왕국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1781년 1월 이주하게 됩니다. (보충설명: 헝가리 왕국이 수도를 부다페스트로 옮긴 것은 1783년입니다. 이전까지는 헝가리의 수도가 브라티슬라바입니다.)
헝가리의 브라티슬라바(당시 명칭: 프레스부르크)로 세 사람이 거처를 옮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마리아 크리스티나-알베르트 공작 부부가 같이 있고 싶어서
M. 크리스티나가 카를 대공의 양육을 신경쓸 때는 부부가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테셴 공작 알베르트는 헝가리 총독으로서 공무를 수행하고, 헝가리 귀족들과의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해야 해서, 헝가리 총독부가 있는 브라티슬라바를 비울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알베르트 공작은 1779~1780년에 카를의 양육을 맡아 카를과 함께 빈 근교 락센부르크 저택에 있는 아내 M.크리스티나 여대공과 자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친정어머니/장모님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는, 알베르트 공작의 임지인 브라티슬라바로 가야지만 세 사람은 단란한 가족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2) 황제 요제프 2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을 피하고 싶어서
마리아 테레지아께서 살아계실 때야 어머니 얼굴을 봐서라도 대놓고 심하게 다투기는 어려웠지만, 그나마 남매간의 갈등을 막고 계신 분께서 서거하셨으니, 두 남매는 가까이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었겠지요. 그래서 M. 크리스티나 부부가 황제가 있는 제국수도 빈과 떨어진 브라티슬라바로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3) 헝가리 귀족 및 귀족부인들이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만나고 싶어하니까
남편 알베르트 공작이 기마술에 능해서 기마전통이 강한 헝가리 귀족들을 상대하기 적합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 M. 크리스티나도 헝가리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헝가리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체라고 언급하신 그분(마리아 테레지아)을 닮은 딸이므로
(2) 지적인 수준과 예술적인 수준이 높아서 헝가리의 예술 및 과학 수준을 높여주었기 때문에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23세인 1765년 본인이 직접 그린 자화상입니다. 그림 수준도 엄청난 수준이지만, 그녀가 양손으로 수동 방직기를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기계 원리를 포함한 과학적 소양 역시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락센부르크 저택에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전하, 브라티슬라바로 와주세요!"라는 헝가리 귀족부인들로부터 온 편지가 엄청 쌓여 있었습니다. 이제, 편찮으셨던 어머니(마리아 테레지아)도 돌아가셨고, 조카 카를 대공도 말을 잘 타는지라 헝가리인들을 만나는데 무리가 없게 되었으니, 더 이상 헝가리 귀족 및 귀부인들의 요청을 M. 크리스티나는 거절할 수 없게 되었지요.
4) 10세 카를 어린이의 승마술이 능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M. 크리스티나-알베르트 부부, 카를까지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즐길 수 있는 레포츠 활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드넓은 헝가리 평원에서 승마하기!" 입니다.

헝가리 평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끝없는 평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 꿈만 같겠지요? 그리고 헝가리 평원은 기후가 온화한 평원입니다. 헝가리의 겨울은 한국보다 덜 춥거나 기온이 조금 더 높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알베르트 공작 그리고 10세 어린이 카를 대공은 3명이서 같이 이 드넓은 평원에서 말을 타는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갖게 됩니다.
카를 어린이와 M. 크리스티나 부부는 각각 자신들의 애마를 타고, 1781년 1~5월 시간날 때마다 헝가리 평원에서 승마를 즐기고는 했습니다. 카를의 애마 라이바흐, M. 크리스티나의 애마 플로라, 알베르트 공작의 애마 비드고슈제는 제각기 등에 자신의 동반자를 태우고 평원을 달리며 멋진 자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세 사람이 승마를 함께 즐기면서, 서로의 유대관계는 더욱 돈독해져갔습니다. 특히 1780년까지는 접점이 많지 않았던 카를과 고모부 알베르트 공작의 관계는 이전보다 확실히 가까워졌습니다.
2. 10세의 카를 대공이 브라티슬라바에서 거주하던 성
지금도 브라티슬라바에 가면 방문할 수 있는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거주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성은 규모가 꽤 컸기에 귀족들의 공공 공간, 알베르트 공작 부부가 보유한 미술품 컬렉션인 "알베르티나 컬렉션(Albertina Collection)"이 진열되어 있는 미술품 갤러리, 그리고 헝가리 고위 귀족들의 생활 공간들이 있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알베르트 부부도 이 성에 자신들의 입주 공간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카를 대공도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함께 브라티슬라바 성에 살게 되었습니다. 일단, 카를 어린이와 M. 크리스티나 부부가 살던 브라티슬라바 성의 모습을 보실까요?


왼쪽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와 어린 카를 대공이 1781년 전반기에 살았던 '브라티슬라바 성'의 전경입니다. 오른쪽은 내부의 계단인데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양식을 살려서 재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성과 내부가 깨끗하냐하면요, 사실 이 성은 최근에 복원된 성이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시기인 1809년 성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헝가리 왕국의 중심지가 브라티슬라바→부다페스트로 옮겨가는 바람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1957년 공산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에 와서야 복원 사업이 시작됩니다. 그마저도 1968년 '프라하의 봄' 사건때 소련군에 점령되면서 복원이 지연되다가, 1997년에 와서야 지붕까지 완성되어서 얼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1997년이면, 공산정권 무너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갈라져서,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의 수도가 된 때입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원형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해서 지금의 아름다운 성을 재건해 낸 체코슬로바키아 및 슬로바키아 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알베르티나 컬렉션(Albertina Collection-남편 Albert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의 두 작품을 감상하시죠. 1500년 전후,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상당히 오래된 작품도 있더군요.


왼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 구상할 때 그려본 소묘화(데셍, drawing)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흐트 뒤러의 <산토끼>입니다. 알베르티나 컬렉션에는 이처럼 오래된 작품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그림과 같은 소묘화(drawing)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 컬렉션은 원래 제노바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 귀화한 외교관 지아코모 두라초 백작이 알베르트 공작 부부에게 자신이 소장한 1,000여점의 귀한 미술품을 기증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에는 프란츠 2세가 빈의 호프부르크 왕궁 주변에 고모와 고모부를 위해 건설해준 3층 저택이 용도변경되어 쓰이고 있는 "알베르티나 박물관(=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이 '알베르티나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예술적인 공간인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10세의 카를 대공은 이 성을 드나든 여러 헝가리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깍듯한 예우를 받게 됩니다. 헝가리 귀족 부부들은 ①귀한 황실 대공께서 자신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점에서 ②자신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M. 크리스티나 부부의 귀한 조카이자, 사실상의 양아들이라는 점에서 카를 대공을 극진히 모시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 중에 카를 대공의 기억에는 독일어를 잘 하는 두 귀족 가문의 인물들이 기억에 남게 됩니다.
1) 하디크 가문의 하디크 안드라스(Hadik András) 백작(1710~1790)
(편의상 A.하디크 백작으로 표시하겠습니다.)
※보충설명: 헝가리는 동양 3국처럼 성+이름 순서입니다. 헝가리는 원래 아시아계 기마민족에서 유래했고, 헝가리어는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합니다. 헝가리인들은 아시아적 전통에 상당한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유럽인들과는 다르게 '성+이름' 순서를 고수하는 것도 헝가리인들이 아시아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왼쪽은 A.하디크 장군이 인생에서 가장 빛났을 시절인 1757년 '1차 베를린 습격' 때(7년전쟁 초반) 성문을 따고 들어가서 당황한 베를린 시장과 그 휘하의 관료들을 굽신거리게 만든 일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카를 대공이 1781년(A. 하디크 백작 71세때) 만났을 것으로 예상되는 A.하디크 백작은 오른쪽 모습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른쪽 초상은 1783년 작품이거든요.
하디크 안드라스(Hadik András)는 1710년 중소지주(gentry)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헝가리계, 어머니는 독일계로 헝가리-독일 혼혈입니다. 1730년 경기병 후사르 연대에 지원했고, 1732년 22세 때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5),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1737~1739)에 참전하면서 군경력을 쌓으며 1738년 28세에 대위로 진급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서 큰 전공을 세웁니다. 프로이센군과 니사(Nysa, 슐레지엔의 한 도시)에서 싸우는 동안, 그는 경기병대를 동원한 'small war'(일종의 치고 빠지기 같습니다.)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전과를 올려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사령관 로렌의 샤를 알렉산더 공(프란츠 1세 동생) 휘하에서 계속 전공을 올리며 신임을 받아 전쟁 막판인 1747년(37세)에는 장군(준장:★)으로 진급하고 기병 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A. 하디크 장군은 군인으로서 크게 명성을 얻어 30대 후반이었지만 아직 미혼이었던 그는 슐레지엔과 모라비아 지역의 유서 깊은 명문가 리히노프스키(Lichnowsky) 백작가문의 프란치스카(1725~1787)와 결혼해서 '백작'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부부 관계에서는 2남 1녀가 태어났습니다.


왼쪽이 A. 하디크 장군과 결혼한 프란치스카 백작부인의 친정인 '리히노프스키' 가문의 문장입니다. 모라비아의 '리히노프(Lichnov)' 영지를 확보하여 '리히노프스키(Lichnowsky)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500년경입니다. 즉, 1781년 기준으로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0년 가까이 이어 내려온 유서 깊은 가문이 바로 리히노프스키 가문이었습니다. 오른쪽에 유명하신 L.베토벤을 소환한 이유는 바로 베토벤의 중요 후원 가문 중 하나가 리히노프스키 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년 전쟁(1756-1763)의 초반인 1757년, 프로이센의 수도 방어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A. 하디크 장군은 5,000여 결사대를 이끌고 적국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 급습작전(1757 Raid on Berlin)에 돌입합니다. 10월 11일 출발한 A.하디크 장군과 그 결사대는 10월 15일까지 최대한 조용히 베를린 외곽지역까지 접근한 뒤, 10월 16일 무방비 상태의 베를린 성문을 열어제끼고 들이닥칩니다. 당황한 베를린 시장과 수비대 사령관 Rochow 장군은 A.하디크 장군의 허장성세에 제대로 속아서, 자신들의 병력이 크게 열세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아래 회화의 묘사와 같이 베를린 수비대장과 베를린 시장은 A.하디크 장군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싹싹 비는 신세가 됩니다.

이 회화에서는 헝가리군의 군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헝가리 장교들은 붉은 코트(영국군과 비슷한 색이군요.)를 입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란색 군복을 입고 팔짱을 끼고 '내 성질 건드리기만 해봐라. 너넨 다 죽은 목숨이야!'라고 허장성세를 펼치는 분이 A. 하디크 장군입니다. 이분은 복장이 화려하기도 하지만, 역시 눈에 띄는 포인트는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는 헝가리 특유의 곡도입니다. 하디크 장군 뒤의 헝가리 장교는 레이피어 류의 직도(스트레이트 소드)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헝가리 곡도"는 확실히 아무나 패용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즉, '헝가리 곡도'는 헝가리 '고위 귀족 및 군인'만 착용할 수 있는 권위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A. 하디크 장군은 베를린 점령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적의 수비대도 숫자가 비슷하다는 것을 파악했기에 "이 정도 겁을 줬으면 되었다." 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구원군이 깜짝 놀라 베를린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기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만하자. 퇴각해야지. 그러나 지금 베를린 수뇌부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을 최대한 이용한다."
그래서 겁을 잔뜩 집어먹은 베를린 시장 및 수비대장에게 '돈 주면 안 잡아먹고 철수할게'를 시전, 은화 20~30만 탈러(출처에 따라 다릅니다.)를 프로이센으로부터 넘겨받고 희생자 거의 없이 철수합니다. 이 때 탈취한 거액의 은화는 자신을 충성스럽게 따라준 결사대 대원들에게 나누어주는 큰 배포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7년 전쟁 이후로는 그 동안의 군공을 인정받아 현재의 세르비아 북부에 있는 푸타크(Futak) 지역에 영지를 하사받고 사실상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헝가리의 중심지 부다(19세기 초까지는 아직 도나우 강 동안의 페스트 지구는 제대로 복구가 안 되어 부다페스트가 아닌 부다로 부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및 헝가리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와서 "원로 장군"의 모습을 그를 존경하는 보다 젊은 귀족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1781년, 71세의 A. 하디크 장군은 M. 크리스티나 부부와 같이 있는 10세의 카를 대공을 뵙고 문안인사를 올리게 됩니다.
"이 늙은이가 참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귀하신 합스부르크가의 대공 전하를 이 나이에 뵙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나이다. 대공 전하, 신의 가호와 축복이 전하께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아마도 카를 대공이 1781년 만났을 A. 하디크 백작의 모습입니다. 1763년 7년 전쟁 끝난 뒤 사실상 은퇴하셨으니, 굳이 험악한 인상 쓸 일이 없으셨나봅니다. 진짜 '인상 좋은 할아버지 귀족' 그 자체입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는 군인 특유의 엄격한 권위는 아직도 살아 있어 보입니다.
카를 대공은 70대 노장군의 깍듯한 인사에 약간은 머쓱했습니다. 하지만, 카를 대공은 자신의 할아버지뻘인 노장군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M. 크리스티나 부부에게 'A. 하디크 장군은 어떤 분이셨어요?' 하고 물어보았고, M. 크리스티나 부부는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A. 하디크 장군의 행적에 대해 천천히 10세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2) 귤라이 형제
귤라이 형제의 아버지 귤라이 사무엘(Gyulay Sámuel)과 어머니 보르네미사(Bornemisza) 가문의 여남작 안나(Anna) 모두 트란실바니아에 영지(아버지 사무엘은 Marosnémeti: 현 루마니아 민티아(Mintia)/ 어머니 안나는 Kászon: 현 루마니아 Plăieșii de Jos) 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남 이그나츠(Ignác)는 당시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의 북서부)의 주도 시비우 출생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귤라이 가문은 트란실바니아에 연고를 둔 가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왼쪽이 보르네미사 가문의 문장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분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는 귤라이 형제의 어머니 보르네미사 가문의 여남작 안나입니다. 이 분의 장남 이그나츠는 보병 병과로, 차남 알베르트는 주로 기병 병과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합니다. 두 장군을 둔 강인한 어머니 안나 는 1814년 4월 나폴레옹의 몰락을 보시고, 두 아들이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는 일에 흐뭇해 하시면서 80세를 일기로 그 해 10월 삶을 마감하십니다.
1781년 봄, 트란실바니아에 연고를 둔 귤라이 가족은 브라티슬라바를 오랜만에 방문했고, 이 때 카를 대공과 귤라이 가족이 만나게 됩니다. 10세의 카를 대공은 이때 귤라이 가문의 장남 귤라이 이그나츠(1763년생, 당시 18세)와 차남 귤라이 알베르트(1766년생, 당시 15세)와도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이그나츠는 아버지 사무엘의 부대 중 32번 귤라이 보병 연대(#32 Gyulay Infantry Regiment)에 소위로 임관되어 군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고 차남 귤라이 알베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사관학교로 들어가 군사학 공부를 한 뒤, 아버지 사무엘의 부대에서 복무하게 될 예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귤라이 형제의 아버지 귤라이 사무엘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의 편재를 M. 크리스티나 부부와 함께 보게 됩니다. 귤라이 사무엘 장군의 부대는 최소한 4개 연대로 구성된, 지금으로 말하면 사단급이거나 그 이상의 편재였던 것 같습니다.
<표: 1787년경 귤라이 사무엘 장군이 거느렸던 4개 연대(Regiment)>
부대명
|
부대번호
|
병과
|
특이사항
|
#1 Kaiser Hussar Regiment
(1번 황제 후사르 연대)
|
1번 연대
|
경기병(후사르)
|
귤라이 가문의 합스부르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
|
#19 Alvinczi Infantry Regiment
(19번 알빈치 보병 연대)
|
19번 연대
|
보병
|
|
#32 Gyulay Infantry Regiment
(32번 귤라이 보병 연대)
|
32번 연대
|
보병
|
귤라이 가문 장남에게 세습되던 부대
|
#44 Szekler Hussar Regiment
(44번 세클레르 후사르 연대)
|
44번 연대
|
경기병(후사르)
|
위의 편재를 보고 M. 크리스티나 부부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은 카를 대공은 더욱 호기심이 생겨 고모와 고모부와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대화록1: 귤라이 가문과 귤라이 사무엘 장군의 부대에 대하여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이 나눈 대화
▪시기: 1781년 4월 초
▪장소: 브라티슬라바 성내, 카를 대공 가족이 거주하는 별실
카를: 알베르트 고모부님, 귤라이 형들(이그나츠는 카를보다 8살 연상, 귤라이 알베르트는 5살 연상) 가문이 이렇게 대단했군요! 최소 6,000명~최대 10,000명 이상의 대부대를 평소에 상비군으로 거느리는 대단한 가문이네요!
알베르트: 그렇지요.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남 이그나츠 군이 소위로 임관할 32번 보병 연대 이름이지요. 대놓고 "귤라이 보병 연대"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카를 조카님도 아시겠지요?
카를: 이 32번 연대는 대놓고 "귤라이 가문의 연대(Regiment)"라고 말하고 있네요. 그럼 귀족 가문의 영지가 세습되듯이, 이그나츠 형이 그의 아버지 되는 귤라이 사무엘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물려받게 되나요?
M. 크리스티나: 역시 카를 조카님은 이해가 빠르세요. 네, 맞아요. 그리고 이그나츠 군도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그 맏아들에게 32번 연대를 물려주게 되는 것이랍니다.
카를: 그럼 "32번 귤라이 연대"인 1,500~2,000명은 사실상 귤라이 가문의 사병으로 봐야겠네요. 그런데요, 귤라이 가문은 이 많은 사병을 어떻게 유지하는 거죠? 인원수만 우리 가족 수행원들의 10배가 넘어가고, 거기다 군인 월급에 보급품까지 지급하고, 먹여 살려야 되니 돈 억수로 많이 들 것 같은데요.
M. 크리스티나: 일단, 그 32번 연대는 1차적으로 귤라이 가문 자체적으로 유지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귤라이 가문의 장남이 선호하는 신부감은 작위가 높은 여성보다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여성이랍니다.
카를: 아, 그래서 귤라이 형들의 어머니는 비교적 신흥귀족(17세기부터 귀족 대열에 들어섰다고 합니다.)인 남작 가문인데도 트란실바니아 동부에 보유한 토지가 수익성이 좋아서 전통 깊은 백작 가문인 귤라이 사무엘 장군과 결혼하게 된 것이로군요.
알베르트: 네, 여기까지는 카를 조카님이 잘 이해했어요. 고모부가 하나 더 물어보지요. 32번 귤라이 연대까지는 어찌어찌 귤라이 가문과 그 배우자의 대토지로 유지해 본다고 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머지 3개 연대 이상의 병력, 전체적으로 1만명 가까운 대군은 어떻게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카를: 좀, 어렵네요. 우리 제국 정부에서 지원해서 유지되는 것인가요?
M. 크리스티나: 그러기엔 트란실바니아 위치가 제국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트란실바니아는 일단 헝가리 왕국 관할이라서 제국 정부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에요. 아래 지도를 보고 다시 생각해 보실까요?

1783년경 유럽 지도에서 갈색으로 험준한 카르파티아 산맥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귤라이 가문의 연고지인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의 경계선도 표시(북쪽과 서쪽은 하늘색, 동쪽과 남쪽은 갈색의 카르파티아 산맥)했습니다. 트란실바니아는 '신성로마제국(독일영방)' 바깥쪽이기 때문에 명백히 "헝가리 관할" 입니다.
알베르트: 힌트 하나 더 드릴게요. 귤라이 가문의 차남 알베르트 군의 출생지는 형과 달라요. 부다(현재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 서안 '부다 지구')에서 알베르트 군이 태어났어요.
카를: 그럼 사무엘 장군의 부대는 트란실바니아에만 있지 않고 헝가리 왕국을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얘기군요. 일단, 제 생각에는 사무엘 장군 부대가 '보안관/경찰 업무' 같은 헝가리 내 치안 유지 업무를 수행했을 것 같아요.
M. 크리스티나: 네, 맞아요. 사무엘 장군의 부대는 평소에는 관할 지역을 순찰하면서 치안 유지 업무도 수행하지요. 그럼 사무엘 장군 덕분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헝가리 귀족과 시민들은 사무엘 장군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겠지요?
카를: 고모님! 감이 좀 잡히네요. 사무엘 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치안 및 국방(오스만 제국의 국경 경비)의 의무를 담당하고 있으니, 관할 구역의 지주 귀족들은 서로 합의하여 지원금을 모아서 사무엘 장군에게 전달하겠군요. 헝가리 대지주 귀족들은 정말 찐부자들이니까, 그들이 지원해 준다면 대부대 유지도 문제없겠지요.
알베르트: 카를 조카님! 명석한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시 봤어요. 아직 제대로 공부해 보지도 않은 군대의 부대 편제에 대해 이렇게 빨리 이해했군요. 이전에 조카님의 큰형 프란츠 대공의 이야기처럼 카를 조카님이 군인으로서 소질이 뛰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M. 크리스티나: 카를 대공의 직업 선택지는 두 가지이죠. 귀한 황족으로 태어난 것은 좋은 점만은 아니에요. '황족의 의무'도 수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황족의 직업 선택지는 기본적으로 1)가톨릭 성직자(제 1계급), 2) 군인(제 2계급) 뿐인데, 지금까지는 내가 봐도 성직자쪽 보다는 군인쪽이네요. 앞으로 시간은 좀 있으니(당시 귀족 계급 이상은 늦어도 만 13~14세쯤에는 자기 진로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생각을 좀 해 보아야겠지만요.
카를: 저도 군인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귤라이 형들이 정말 믿음직스러워요. 분명 우리하고 혈통은 다른데, 왜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느낌이 나는지 참 특이해요.
M. 크리스티나: 카를 조카님의 느낌이 좋은 거에요. 귤라이 가문은 확실한 제국의 충신 맞아요.
알베르트: 한 번 더 귤라이 사무엘 장군의 부대 편성을 보시죠. 귤라이 가문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알 수 있을 거에요.
부대명
|
부대번호
|
병과
|
특이사항
|
#1 Kaiser Hussar Regiment
(1번 황제 후사르 연대)
|
1번 연대
|
경기병(후사르)
|
귤라이 가문의 합스부르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
|
#19 Alvinczi Infantry Regiment
(19번 알빈치 보병 연대)
|
19번 연대
|
보병
|
|
#32 Gyulay Infantry Regiment
(32번 귤라이 보병 연대)
|
32번 연대
|
보병
|
귤라이 가문 장남에게 세습되던 부대
|
#44 Szekler Hussar Regiment
(44번 세클레르 후사르 연대)
|
44번 연대
|
경기병(후사르)
|
카를: 1번 연대가 "황제 연대(Kaiser Regiment)"일 정도라면 정말 황제폐하께 충성스러운 것 맞는 것 같아요.
M. 크리스티나: 이렇게 한 번 충성맹세(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헝가리 의회에서 한 충성맹세를 의미)했으면 어떻게든 그 서약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헝가리 귀족군인들이에요.
알베르트: 참 뒤통수가 만연하는 요즘 세상(18세기 당시를 말합니다.)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헝가리 귀족들이지요. 이제 얼마 안 있어(1781년 6월) 벨기에 총독으로 가게 되면, 이 정들었던 사람들을 언제 보게 될지 모르겠군요. 헝가리를 떠나고 나서 아쉬움이 참 많아질 것 같군요.
M. 크리스티나: 정말 헝가리인들과 함께한 15년(1766~1781년)은 정말 행복했지요. 사람들도 너무 좋았고요. 그리고 알부자들 천지인 헝가리 대귀족들 client로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사유재산이 3백만 굴덴이 넘어가게 되었네요.
다만, 저희가 떠나게 되는 다음이 걱정이에요. 저는 오라버니이기도 한 현재 황제폐하의 생각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알베르트: 흠, 확실히 그렇소. 우리 제국을 1741년 위기('동생국가 작센'을 포함한 모든 국가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오스트리아 중부 중요도시 린츠까지 함락되어 수도 빈까지 위협받았던 일)에서 구해준 헝가리만큼은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들이 그닥 없는데, 황제폐하께서 유독 중앙집권을 선호하시는 게 문제이지요.
카를: 확실히, 헝가리인들만큼 믿을 만한 사람들도 없는데, 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해선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요. 큰삼촌(황제 요제프 2세를 의미)이 '농노 해방'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게 걱정이에요. 저도 농노 제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헝가리인들이 우리 은인인데, 강제로 농노해방을 집행하면 농노를 많이 거느린 대지주 헝가리 귀족들이 화낼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알베르트: 자, 어느새 밤이 깊었군요. 카를 조카님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에요. 우리 세 사람이 황제 폐하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오늘 대화는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당시 황제인 요제프 2세를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제 이전 작성글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밑에 링크 달아놓은 글이 바로 마리아 크리스티나 입장에서 황제 요제프 2세를 비판한 글에 가까우니까요.)
3. 카를 대공과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 사실상 완전한 3인 핵가족이 되다
※4~5월에도 카를 대공과 그의 고모, 고모부는 같이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카를 대공 입장에서는 어린 카를에 대한 고모와 고모부의 깍듯한 존대가 상당히 부담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대화록2: 카를 대공과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다
▪시기: 1781년 5월 23일
▪장소: 브라티슬라바 성내 카를 대공 가족이 거주하는 별실
카를: 저, 고모님. 하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M. 크리스티나: 무슨 부탁이신가요?
카를: 앞으로 고모님을 '미미 고모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M. 크리스티나: 호호호~ 이 고모는 기다리고 있었지요. 당연히 됩니다!
카를: 감사해요. '미미 고모님'
알베르트: 허어, 두 분끼리만 친하게 지내고 나만 '공작 각하' 따위의 딱딱한 칭호로 부를 참이요?
카를: 그럴 줄 알고 고모부님도 준비된 게 있지요. 들어보시겠어요?
알베르트: 흠, 일단 들어보겠소!
카를: '티노(Tino) 고모부님' 어떠신가요?
알베르트: 마음에 드네요. 기왕에 애칭인 티노(Tino) 쓰는 김에 뒤에 붙은 '님'자까지 떼 버리는 게 낫겠지요.
카를: 그럼, 티노 고모부!
알베르트: 그럼, 그 분위기가 낫지요.
M. 크리스티나: 카를 조카님의 어학 센스 굉장하군요. 이탈리아어를 이용했군요?
카를: 네, 맞아요.(카를은 8살까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이탈리아어는 알고 있습니다.) 티노 고모부의 본명이 알베르트(Albert)인데, 이탈리아어로는 알베르티노(Albertino)니까 여기서 따왔지요.
알베르트: 미미 여대공, 이미 뒤에 '님'자는 떼고 가기로 하지 않았소? 그럼 '카를 조카님'도 이제부터 안 쓰는 것이 낫겠지요. 일단 카를 대공의 의견은 어떤가요?
카를: 저야말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두 분 모두 저를 과도하게 깍듯이 높여주시는 게 이유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젠 눈치볼 이유가 다 사라진 것 같거든요. '대공'이라는 무거운 호칭도 빼고요. 두 분은 저를 그냥 이름으로 '카를'이라 불러 주시고 말씀도 편하게 해 주세요.
M. 크리스티나: 카를이 원한다면, 그리 해야겠지. 단, 우리끼리 있을 때 한정이야. 다른 사람들 있는 공식석상에서는 서로 높임을 써야 하는 건 알지, 카를?
카를: 네, 미미 고모. 당연히 보통 귀족도 아니고 황족인데, 공식석상에서는 예의를 갖춰야죠. 그래도 사석에서라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알베르트: 1779년말~1780년말에 미미 여대공이 날 브라티슬라바에 놔두고, 카를의 승마 교육에 집중했던 게 이 이유였구나! 승마 기초 훈련 다 시켜 놓고 카를이 브라티슬라바로 오니, 세 사람이 드넓은 헝가리 평원에서 승마하는 동안 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구나!


왼쪽은 카를 대공의 애마로 설정된 라이바흐의 사진(?)이고요, 오른쪽은 드넓은 헝가리 평원입니다. 카를 대공의 3인 가족이 함께 말을 타고 드넓은 평원을 달리는 승마 레포츠를 같이 했다면, 세 사람의 관계는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는 것을 예상하실 수 있을 것잊ㅂ니다.
M. 크리스티나: 티노 공작, 약간 둔하시군요. 이제야 제 큰그림을 파악하시다뇨. 저 없는 동안 제 몫까지 헝가리 귀족들 상대하느라 그러셨던 걸로 이해는 할게요.
카를: 이제 우리는 사실상 3인 핵가족이군요. 정식 입양만 되지 않았을 뿐 미미 고모와 티노 고모부는 제 부모님이나 다름없어요!
알베르트+M.크리스티나: 카를이 우리를 사실상의 부모로 인정해주니, 우리야말로 감동이야!
※이렇게 해서 M. 크리스티나 부부와 그 조카 카를 어린이(10세)로 이루어진, 어떤 의미에서는 친부모-자녀 관계보다도 더 끈끈한 유대관계가 생긴 '3인 핵가족'이 탄생했습니다.

1781년의 카를 대공 가족인데요, 나름대로 1781년에 가장 가까운 시점의 초상들을 찾아 가계도를 만들었습니다. Tino(알베르트 공작)는 1777년 초상, Mimi(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776년 초상, 카를 대공 역시 1776년의 초상('카를 어린이'에 어울리는 초상을 이것밖에 못 찾아서요.)에서 따왔습니다. 기준을 Tino 고모부로 맞췄는데요, 너무 긴 얼굴이고, Mimi 고모 역시 머리카락 및 머리장식이 너무 위쪽으로 올라가 있어서(Mimi 여대공의 목디스크가 걱정되네요.), 구도 잡아 자르기 힘들었습니다. 어쨌든, 1781년 시점에서는 카를 대공에게 있어 Tino-Mimi 부부는 말이 고모부·고모지 실질적으로는 친부모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추론됩니다.
★Tino-Mimi 부부와 그 조카 카를 어린이 사이에서 호칭
(1) Tino→Mimi: Mimi 여대공
(2) Mimi→Tino: Tino 공작
(3) Tino→카를, Mimi→카를: 카를
(4) 카를→Mimi: Mimi 고모
(5) 카를→Tino: Tino 고모부
※달라진 호칭의 의미: 카를 어린이가 Mimi-Tino 부부를 사실상 양부모로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 Mimi: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애칭
▪ Tino: 테셴 공작 알베르트의 애칭
4. 오늘의 이야기 <벨기에편 서장:브라티슬라바에서 돈독해진 가족관계> 요약
1) 카를과 M. 크리스티나 부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헝가리 왕국의 수도였던 브라티슬라바에서 1781년 1~5월을 보내게 됩니다.
2) 아름답고 예술적인 공간인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카를은 여러 헝가리 귀족/귀부인을 만났습니다. 그 중 특히 카를의 기억에 남는 사람은 노장 '1757 베를린 급습 작전'의 A. 하디크 장군과 트란실바니아에 연고가 있는 헝가리 유력 귀족 귤라이 가문의 장남과 차남인 귤라이 이그나츠, 귤라이 알베르트 형제였습니다.
3) 카를과 M. 크리스티나 부부는 헝가리 대평원에서 승마를 같이 하면서 유대관계가 돈독해져서, 5월 말에는 서로를 이름 혹은 애칭으로 부르는 단계까지 갑니다. 즉, 카를은 사실상 M. 크리스티나 부부를 마음속으로도 양부모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연재 후 소감>
마리아 테레지아가 별세하신 1780년 11월 말부터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벨기에 공동 총독으로 부임받아 빈을 출발하는 1781년 6월 초까지 기간에 카를 대공의 가족이 당시 헝가리 수도였던 브라티슬라바 성에 주거지를 잡고 생활했다고 추론하여 서술했습니다. 하다보니까, "카를 대공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를 사실상 양부모로 인정하는" 설정이 진작에 되어 있어야 이후 전개가 편하기에, 본편 <벨기에편-서장>에서 그 내용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헝가리의 노장 A. 하디크 장군을 등장시킨 이유는, 카를 대공의 20대 시절 여러 번 나타났던 "빈틈이 보이면 거침없이 공격한다."는 성향이 어린 시절 만났던 A. 하디크 장군의 전술을 공부했던 영향이 있다는 설정을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귤라이 형제의 경우에는 1793~1794 플랜더스 전선(벨기에 전선)부터, 즉 카를 대공 군 사령관 초기부터 같이 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여기서 만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흥미를 갖고 있던 귤라이 형제의 집안 배경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공부하다보니 "32번 귤라이 보병 연대"라는 사실상 귤라이 백작가문의 사병부대가 고려 말 태조 이성계가 거느렸던 막강한 사병부대인 가별초 부대와 상당히 유사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번 이야기는 "벨기에로 가는 길"을 전개하려는 원래 계획과 달리 오히려 "헝가리 장군들과 헝가리군의 체계" 쪽이 더 두드러지는 이야기로 변했네요. 아마도 제가 "헝가리 장군"에 대한 애착을 요즘 상당히 갖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